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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in런던] 내 인생 첫 빈티지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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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in런던] 내 인생 첫 빈티지 잔
  • 김지민
  • 승인 2021.12.13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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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지민)
 영국 중고마트에서 구입한 김지민 씨의 첫 빈티지 잔. (사진=김지민)

겨울이 돌아왔다. 또 다른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이가 발견되어 영국을 포함 유럽의 국가들은 다시 방역 단계를 높이기 시작했다. 마스크 착용에 대한 지침을 강화하고 다시 재택근무를 권고했다. 영국은 이미 국민의 대다수가 백신 접종을 2차까지 완료한 상황이지만,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경계는 늦추지 않고 추가 접종을 장려하는 중이다. 하지만 12월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크리스마스 감성은 가게들과 거리 곳곳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 또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한껏 누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중이다.

본래도 이 시기의 런던은 전 세계 사람들의 반 정도가 와 있는 게 아닐까 할 만큼 사람들로 붐비곤 했다. 런던을 휘감는 연말 분위기는 크리스마스를 그저 하루 쉬는 날 정도로 생각하는 나조차 기분을 들뜨게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거리에 사람이 많아질수록 내가 집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는 줄어든다. 이역만리에서 혼자 아프면 서럽고 내 손해일 뿐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렇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 혼자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이미 상향 조정하고 있었다.

팬데믹 상황이 장기화되고 그에 따라 나의 생활양식도 바뀌면서 더는 필요 없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보다는 쓰임새를 알아줄 주인을 찾아 하나둘씩 인터넷으로 팔기 시작했다. 집에만 있으니 옷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옷걸이에 옷을 잘 걸어 사진을 찍고 간단한 설명과 함께 글을 게시했다. 몇 가지의 물건들에 새 주인을 찾아 준 나는 총 7파운드 (약 12,000원 상당) 라는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 돈을 당장 내 통장으로 옮길 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 다른 누군가가 올려 둔 예쁜 찻잔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운명인가? 딱 1인 가구에게 완벽한 구성이었다. 찻잔과 찻잔 받침, 그리고 디저트를 담을 수 있는 여분의 접시까지 총 3점이 한 세트로 올라와 있었다. 여태 영국에 살면서 그 유명하다는 도자기 브랜드들의 컵이나 접시에 특별히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언제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할지 모르는 유학 생활의 미덕은 짐을 늘리지 않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앱 상단에 올라와 있던 찻잔에 눈길이 간 것이 새삼스럽기는 했다.

꽃이 그려진 컵과 접시들은 색깔도 나의 취향에 맞춘 듯 회색과 푸른색이었다. 그것도 거의 새것과 같은 상태라고? 이것은 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꽃무늬를 썩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택배비를 포함해 내가 가진 7파운드로 충분히 살 수 있는 가격이라는 점 또한 매력이었다. 한국에서는 당근마켓을 통한 중고거래가 그렇게 유행이라는데, 이 맛에 다들 그렇게 열광하는가 싶었다. 이것이 바로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통칭 소확행)인가? 첫 구매에 성공(그것도 마음씨 좋은 판매자가 1파운드나 깎아 줬다)하고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택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찬장에 찻잔을 넣어 둘 공간을 만들고 어떤 차를 우려 볼까 고민도 하고 슈퍼에서 차와 함께 먹을 비스킷을 사두었다.

영국의 겨울은 추적추적 비가 자주 오고 안개가 자욱하게 도시를 덮는다. 흔히들 떠올리는 영국의 날씨는 겨울 날씨다. 칼바람이 불어 살을 에는 한국과는 달리 영국의 겨울은 집 안으로 들어가도 으슬으슬 뼈가 시리다. 이런 날씨 탓인지 영국인들은 차를 많이 마신다. 영국인은 아니지만 살다보니 나 또한 차를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커피도 좋아해서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온종일 작업을 하다 추워지면 차를 끓여와 마신다. 그러다가 또 잊어버리고 작업을 하다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이 얼 때 완전히 식어 차가워진 차를 발견한다. 그러면 다시 또 차를 끓인다.

이 무한의 굴레는 학교로 출근하든 재택근무를 하든 달라지지 않는 점이었다. 출근을 하던 때에는 같은 방의 동료들과 오후에 차를 마시면서 연구에 관한 얘기도 하고 안부를 나누는 시간을 갖곤 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어 결국 차는 그저 글을 쓰다가 추워지면 몸을 따뜻하게 하는 기능으로만 남아 버렸다. 차를 끓이러 가지 않으면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질 않았다. 그래서 이전에는 도서관을 가거나 일부러라도 움직이기 위해 카페에 나가서 커피를 사 마시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내 인생의 첫 빈티지 잔이 도착하고, 심혈을 기울여 잔과 접시들을 소독했다. 내가 좋아하는 차 중에서도 장미 향이 나는 홍차를 꺼내고, 미리 사둔 비스킷도 두엇 예쁘게 담았다. 잔잔한 음악도 틀어두고, 책상에서 떨어져 창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찻잔에 차를 마셨다.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꽃무늬는 실제로 보니 훨씬 예뻤다. 따뜻한 차를 마시자 그것만으로도 복잡했던 머릿속이 잠잠해졌다. 영국인들은 심각한 일이 생겼을 때 차부터 끓인다던데 그게 단순히 농담은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해준 밥과 커피가 제일 맛있기는 하지만, 내가 만든 차와 커피도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쉽지 않은 요즘의 일상들이다. 그 속에서도 작은 즐거움을 찾고 잠시 현실과 동떨어질 시간을 자신에게 허락하는 것도 이 일상에 적응해 가는 한 가지의 방법 일 듯하다.

<지민in런던>은 박사 논문 준비로 잠시 휴재합니다. 내년 4월 이후 다시 만나요.

 

 

 

 

 

김지민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제주 4·3에 대해 연구 중인 김지민은 온 마을이 키운 박사 과정생이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제주와 런던을 잇는 [지민in런던]은 매월 둘째주 월요일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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