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의 실종과 혐오의 언어들

지금까지 이런 선거는 없었다. 정책은 사라지고 혐오의 언어만 난무한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말처럼 좋아서 찍는 게 아니라 싫어서 선택을 해야 하는 선거가 되어 버렸다. 유력 야당 후보의 입에서는 '미친 사람들', '같잖다'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상대를 '확정적 범죄자'로 바라보겠다는 고집 앞에서 민주적 토론이 이뤄질 리 없다. 집권 여당도 만만치 않다. 토론하자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페미니즘' 색채가 강하다면서 특정 매체와의 인터뷰는 거부했다. 여당 대통령 후보의 측근이라는 국회의원은 '페미니스트'를 마치 낙인의 언어처럼 구사한다.

촛불로 탄생한 정권이라고 말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했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적 열망을 사유화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지지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이라고 추앙한다. 내편과 네편으로 갈리는 싸움판에서 원칙은 이미 흙탕물에 처박혀 버린 지 오래다.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나'라는 시민들의 자괴감에 대한 최소한의 변명조차 없다. 기후위기의 시대라는 데, 성장주의 시대는 끝이 났다는 데, 정작 정치는 과거의 악다구니만 되풀이한다. 미래를 이야기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오늘에 대한 성찰은 있어야 한다.

'민주화'가 시대의 과제였던 때가 있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말이 저항을 의미하던 때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좌우로 나는 ‘새’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날개 하나를 떼어줘야 겨우 살아가는 존재들도 있었다. 87년 체제는 좌우가 등을 맞댄 대결의 시대였다.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버텨주는 근거였다. 미묘한 동거였다. 그들의 적대적 동거 안에서 정작 진보의 자리는 점점 작아졌다. 서로를 할퀴며 서로의 기득권을 지켜온 대결 속에서 날개조차 없는 사람들은 잊혀 갔다. 김용균이, 이민호가, 이선호가 세상을 떠났다. 지금 우리는 1970년 전태일의 죽음으로부터 얼마나 더 나아갔는가. 성장은 그들의 죽음을 먹고 커져갔다. 높은 빌딩과 반듯한 도로와, 매끈한 넥타이 사이에서 그들의 죽음은 부리조차 잘린 울음이었다. 울음조차 들리지 않는 비명이었다.

혐오의 언어가 난무하는 '여의도정치' 속에서 정작 지역은 외면당하고 있다.©제주투데이
혐오의 언어가 난무하는 '여의도정치' 속에서 정작 지역은 외면당하고 있다.©제주투데이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감염병 예방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버렸다.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알 수 없기에 불안하고, 불안하기에 위험하다. 이럴 때일수록 공공적 사회참여가 더 필요하다. 방역은 단순히 의학의 영역만이 아니다. 고도의 정치적 영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묻지 않는다. 건강이 민주와 인권에 우선하는지를, 민주와 인권이 폐허가 되어버린 땅에서 건강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정치적 이벤트 앞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불온한 감염원처럼 치부된다. 재난은 공평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가까운 지적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치는 불평등에 눈감고 있다.

누구를 찍어야 할 지 난망하다. 학교 시험도 최소한 사지 선다였다.(물론 이번 대선 후보 중에 정의당 심상정 후보도 있다. 하지만 집권 가능성만 따진다면 집권여당과 보수 야당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보수 정당의 적대적 동거 앞에서 정의당은 물론이고 새로운 정치적 실험이 싹틀 가능성은 희박하다.

글로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유럽 도시들의 실험

한국에서 보수정당의 적대적 동거가 계속되고 있는 사이에 세계는 이미 신자유주의와 성장주의에 저항하는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시험장이었던 칠레에서는 30대의 좌파 대통령이 탄생됐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는 시민들이 기후비상사태선언문을 채택했다. 신자유의적 국가 정책에 반기를 드는 ‘두려움을 모르는 도시’(fearless cites)들이 유럽을 바꾸고 있다. 암스테르담은 에어비앤비의 영업일수를 제한했고, 글로벌 기업의 제품을 학교 급식에서 제외하는 도시들도 생겨나고 있다. 약탈적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지역 공동체의 참여를 확대하는 ‘커먼(공공적 자산)’의 중요성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러한 유럽 도시들의 변화에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시민사회의 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실험이 가능한 정치 시스템이 있었다. 기후위기 비상 사태 시민 선언을 이뤄낸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경우는 바르셀로나를 기반으로 한 지역정당 출신이 시장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2015년의 일이었다. 신생 지역정당에서 후보를 내고 시민의 정치적 판단을 받은 것이다.

파산 선고를 받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찾기 위한 유럽의 사례들은 '지역'에 뿌리를 정치적 실험의 가능성이 '헛된 공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중앙-국가에 중심을 둔 기득권 정당들은 변화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지킬 것이 많기 때문이다. 여의도 정치로 상징되는 보수정당의 적대적 연대가 계속되는 한 정치적 실험을 위한 새로운 정치 세력의 출현은 불가능하다. 지난 총선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제 입맛대로 바꿔버린 더불어민주당의 사례는 기득권 정치의 전형을 보여줬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이미 파산선고를 받았다. 제주시 민오름에 바라본 드림타워©제주투데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이미 파산선고를 받았다. 사진은 제주시 민오름에 바라본 드림타©제주투데이

이제 국가-중앙을 기반으로한 정치는 '지역'정치로 바뀌어야 한다. 대선 정국에 쏟아지는 정치기사들도 따져보면 '여의도 정치'가 쏟아내는 낡은 언어들이다. 정치에서 희망을 보지 못하고 혐오와 냉소만 자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움을 위해, 혁신을 위해 '지역 정당'의 출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행 정당법의 개정이 우선이다. 지역이라는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함께 고민하고, 더불어 실천하는 사회참여의 확대만이 오늘을 바꾸는 무기가 될 것이다. 지역정당의 필요성이 제기된 지도 10여년이 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역 정당의 출현이 어려운 것은 여의도 정치의 기득권 지키기 때문이다. 기득권 앞에서는 여야가 따로 없다.

혐오의 언어만 난무하는 대선, 유권자들은 낡은 언어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 언어를 고대하고 있다. 그 새로움이 단 한번도 가보지 못한 '지역 정당'의 가능성을 여는 실험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렇다. 문제는 경제가 아니다. 문제는 '지역'이다. 그것은 '균형 발전'이라는 성장주의의 언어로 지역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새로운 지역의 편성, 더 많은 사회참여를 보장하는 진정한 '공동체의 민주주의'. 그렇다. 우리에게는 아직 가보지 못한 지역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영토가 있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