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박소희 기자)
하루나눔과 회의 등을 진행하는 볍씨학교 돌집 (사진=박소희 기자)

'이런 학교가 다 있나?'

굵직한 제주지역 사회 현장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학생들이 있다. 지역 현안에 대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학생들. 바로 볍씨학교 학생들이다. 줄여서 볍씨라고도 부른다. 볍씨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면 누구든 에너지와 삶의 태도에 놀라게 된다. 볍씨는 어떻게 자라나고 있을까. 28일 선흘 소재 학교를 찾아 그들을 만나보았다.

볍씨학교 제주학사 일과는 새벽 5시30분에 시작한다. 그날의 가마솥 밥지기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다른 밥지기는 볍씨 식구들이 먹을 찬을 만든다. 밥지기를 피한 친구들은 6시30분 일어나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을 20분간 달린다. 이들이 ‘제주자연체험파크 조성사업(구 사파리월드)’ 반대에 나선 이유도 자신들의 학습터리자 놀이터인 동백동산과 200m 인접한 거리에서 개발이 이뤄져서다. 

자연체험파크가 조성되는 사업부지 인근에 볍씨학교 친구들의 놀이터인 동백동산이 있다. 이들은 15일 사물놀이 공연을  도의회 앞에서 펼치며 자신들의 놀이터를 지켜달라고 요구했다. (사진=박소희 기자)
'자연체험파크'가 조성되는 사업부지 인근에 동백동산이 있다. 볍씨학교 친구들은 15일 도의회 앞에서 자신들의 놀이터이자 학습터인 동백동산을 지켜달라며 사물놀이 공연을 진행했다. (사진=박소희 기자)

신선한 새벽 바람을 몸에 가득 담고 돌아온 친구들은 요가로 몸을 풀어준다. 이후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5분간 읽는다. 이를 '책명상'이라고 하는데 책명상을 하다보면 평소 자신이 숨기거나 반복되는 문제를 지적하는 문장이 나와 뜨끔 할 때가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인생이 뭔지 알게 됐냐고 묻자 볍씨학교 친구들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중 제주학사를 졸업한 김은수(18) 학생이 "알 수 없어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고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한가람 학생은 인생은 단면이 아닌 장면이라며 "다방면으로 보기 위해서는 질문을 해야 하는 것 같다"고 거들었다. 김민찬 학생은 좀처럼 괜찮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저는 내년에 한 번 더 읽으면 그땐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인생이 뭔지 모르겠다."며 수줍게 웃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는 김민찬 학생(사진=박소희 기자)
인생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는 김민찬 학생(사진=박소희 기자)

책읽기 5분 명상이 끝나면 아침 식사가 되기를 기다리며 청소를 한다. 역할 분담은 그날 그날 손을 들어 정한다. 강새누 학생이 "추운지기도 있고, 힘든지기도 있고, 쉬운지기도 있는데 양심에 따라 돌아가면서 하게 된다"고 하자 다른 친구들이 새누 학생은 따뜻한 지기를 이틀 연속 했다고 나무랐다. '비양심지기'로 찍힌 새누 학생이 당황하며 “혹시 이 내용도 쓰실 건가요?”라고 묻자 돌집이 웃음으로 가득찼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그날의 일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르바이트, 밭일, 돌집 짓기, 오두막 짓기, 템페 만들기 등 각자의 영역으로 흩어져서 점심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일을 한다.

볍씨학교는 8살부터 16살까지 총 9년간의 교육과정으로 이뤄져 있다. 1학년부터 8학년까지는 경기도 광명시 소재 볍씨학교 본교에서 교육이 진행되며 마지막 9학년은 ‘제주학사'에서 보낸다. 이영이 교사와 김동희 교사가 담당하는 9학년 학생들은 그해 3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서 동거동락한다. 9학년을 마치고도 더러 머무는 친구들도 있다. 

이들은 생활에 필요한 요소들을 대부분 자급자족하며 살아간다. 재배하는 밭작물은 고구마, 호박, 밀, 귤, 파, 참깨, 콩 등 다양하다.

양사랑 학생은 "다른 작물은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는데 정성을 가장 많이 들인 콩이 폭삭 망했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콩이 여물어야 할 8~9월에 비가 많이 와서 그런 것 같다."며 안타까워 했다. 

볍씨학교 제주학사 생태화장실과 소변통 (사진=박소희 기자)
볍씨학교 제주학사 생태화장실과 그 앞에 놓인 소변통. (사진=박소희 기자)

대신 볍씨 친구들이 재배한 귤은 그 어떤 귤보다 맛있다고 했다. 

양사랑 학생 말을 빌리자면 "오줌을 많이 먹은 귤이 맛있다. 끝맛이 길고 귤 향이 짙다. 화학비료를 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곳은 생태화장실을 운영하는데, 소변을 통에 모아 발효시킨 뒤 이를 거름으로 쓴다. 편리가 아닌 자연과 더불어 살다보니,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절로 알아진다. 무엇보다 도심과 떨어진 곳에서 외부와 접촉하지 않으니 코로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한다. 

볶음밥을 만들고 있는 밥지기 (사진=박소희 기자)
볶음밥을 만들고 있는 밥지기 (사진=박소희 기자)

인터뷰가 있던 28일에는 오전 일과를 쉬었다. 오전 10시부터 진행된 인터뷰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밥지기가 점심시간임을 알렸다.

식사가 차려진 흙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볍씨 친구들은 '식묵상'을 하기 위해 서로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밥지기가 밥상 위에 있는 생명과 그것이 이곳에 오게 된 과정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면 각자 개인 묵상을 시작한다. 묵상이 끝나면 손을 놓고 밥가를 부르는데 내용은 이렇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못가지듯이 밥은 서로서로 나누어 먹는것♪"

밥가를 다 부르면 서로의 밥 위에 반찬을 놔준다. 이를 '선분식'이라고 하는데 밥 위에 올려진 반찬을 보니 이들은 타자에 대한 사랑을 체화하며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밥은 남김없이 싹싹 먹는 것이 '볍룰'이다. 음식물 쓰레기도, 플라스틱 쓰레기도 볍씨 학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점심 식사를 마친 친구들은 1시 30분까지 각자 휴식을 취한다. 새누 학생이 "저는 그 시간에 책과제를 한다"고 하자 친구들이 야유를 보냈다. 그는 "책과제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자기도 한다"고 정정했다. 

책과제 압박은 있지만 자꾸 딴짓을 하고 싶은 강새누 학생 (사진=박소희 기자)
책과제 압박은 있지만 자꾸 딴짓을 하고 싶은 강새누 학생 (사진=박소희 기자)

오후 5시 하루 일과를 마치면 학교로 돌아와 씻고 빨래를 한다. 새누 학생은 이때 또 책과제를 한단다. 다른 친구들이 '이제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책과제를 해야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빨래를 한다”고 말을 바꿨다. 

볍씨에서는 빨래는 손으로 하고 탈수만 기계의 힘을 빌린다. 귀찮으니 빨래를 건너띄는 학생도 있다. 땀에 찌든 옷을 사물함에 1~2주 넣어 두었다가 다시 입는 친구들도 있단다. 이를 볍씨 친구들은 '사물함 세탁기'라고 불렀다. 새누 학생은 "일광욕을 하면 빨래를 하지 않아도 옷이 깨끗해 진다”면서 일명 ‘일광 세탁법’을 소개하기도.

밥지기가 저녁식사 뒷정리까지 끝내면 7시부터 하루나눔을 시작한다. 시작 전 30분 간 ‘활기찬 노래’는 필수. 한 번 들려 달라는 요청에 주저 없이 연주 가능한 악기들을 꺼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를 연주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를 노래하는 볍씨학교 친구들. (사진=박소희 기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를 노래하는 볍씨학교 친구들. (사진=박소희 기자)

볍씨학교 백미인 하루나눔은 각자 글로 하루를 정리하고 함께 생활하며 발생한 부침들을 나누는 시간이다. 

피드백은 1시간 내 짧게 끝낼 때도 있고, 새벽 3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날은 다른 친구들의 피드백을 인정하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다. 다만 인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함께 기다리다보면 길게 이어진다고 한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과는 비슷하지만 일요일은 조금 특별하다. 먼저 목욕을 하고 미국에서 시작한 생태영성 공동체 운동이라 불리는 '에미서리'(Emissaries)'를 배운다. 에너지를 조율하고 영성을 채우며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라는데, 쉽게 표현하면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는 시간이란다. 이때 일주일을 살아갈 문장 하나를 가슴에 새기는데 이를 '만트라'라고 불렀다. 만트라는 매주 바꾼다고 했다. 

볍씨 친구들은 자연과 더불어 주체적으로 살다보니 인간과 자연이 연결돼 있다는 생태감수성이 저절로 길러졌다. 

어떻게 제주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냐고 묻자 “육지(본교)에서부터 사회문제에 관해 공부를 많이 했고, 무엇보다 제주에는 개발 현장이 많다. 교과서나 영상을 보는 것보다 직접 현장에 가서 보고 들으면 뭐라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자신들의 학습터이자 놀이터인 자연을 지키고 싶어 제2공항 건설, 비자림로 확장공사 등 각종 난개발 반대 현장에서 이들은 청소년 당사자로서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특히 양용찬 열사 30주기 추모식에서는 볍씨학교 학생들이 직접 쓴 '양용찬 열사 정신계승 볍씨 선언문'이 낭독되기도 했다. 

이들은 이날 "양용찬 열사 30주기 추모 시화전을 준비하면서 모든 개발은 법에 근거해 이뤄진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현행 제주특별법을 보존 방향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을 '제주를 지키는 이미 온 미래'라 부르는 이유다. 

제주투데이와 볍씨학교, 양용찬열사30주년행사위 공동으로 진행했던 온라인 시화전 작품을 양용찬 열사 묘역 행사장에 전시했다.
양용찬 30주기 추모식이 열린 열사 묘역에 전시됐던 볍씨학교 시화전. (사진=제주투데이 DB)

이념에 아직 물들지 않고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볍씨 친구들 눈에는 4·3 정명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새누 학생은 제주투데이 칼럼을 통해 4·3 성격을 '평화운동'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관련기사:내가 본 '제주4·3평화운동') 

4·3 발생 요인을 이승만 정부의 남한 단독 선거로 본 이제윤 학생은 이날 '통일항쟁'으로 명명하며 4·3평화공원에 누워있는 백비를 하루빨리 세워야 한다고 조근조근 주장하기도.

끝으로 하고싶은 말을 묻자 책과제 압박에 시달리는 강새누 학생이 "비양심지기 이야기는 빼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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