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진오 제공)
설문대할망 신상(사진=한진오 제공)

바다를 떠돌던 섬을 떠안은 파도 위에서

저 비췻빛에 물들면 짐작할 겨를도 없이 푸른 줄기가 몸을 뒤덮는다. 식물성 본능이 깨어나는 것이다. 광합성의 시간이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살강대는 갯바람에 취해 초록 삼매경에 한참을 빠졌다가 불현 듯 정신을 가다듬는다. 반복되는 자각의 혼잣말이 새어나온다. ‘저 섬 때문이었지.’ 그렇다. 비양도 때문에 예까지 온 것이 맞다. 행랑 가득 설문대를 향한 의문부호를 잔뜩 넣고 끝도 떠돌던 터라 광합성 휴식은 물음표를 쉼표로 만들어주는 이 바다의 은혜였다. 비양도에도 끊임없이 드나들었지만 이따금 도항선을 놓치면 금릉 바닷가에 나앉아 섬을 탐색하는 휴식은 꿀맛이었다.

물음표가 비양도를 탐문하게 된 이유는 이 섬이 살아있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놀랍게도 전설 속에 등장하는 비양도는 살아있는 섬이었다. 스스로 파도를 가르며 항해하던 섬이었는데 애초에는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섬은 남몰래 비밀스런 항해를 거듭하며 자신이 붙박일 바다를 찾아다니던 중에 물빛 고운 한림 바다를 지나던 중에 그만 빨래하던 아낙의 눈에 띠고 말았다. 커다란 섬이 마치 고래라도 되는 냥 파도를 헤쳐 나가는 믿기지 않는 광경과 맞닥뜨린다면 누구라고 놀라지 않았을까. 까무러치게 놀란 여인은 있는 힘을 다해 목청껏 소리쳤다. ‘섬이 움직인다!’

여인은 천지가 개벽할 이 사달을 온 세상에 알리려고 했건만 누구도 알아차리기 전에 섬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자리에 멈춰서버렸다. 여인은 움직이던 섬이 멈춰버리자 황당무계한 말을 지껄인 거짓말쟁이가 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뒤늦게 몰려나온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하는 섬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하루아침에 전에 없던 섬이 생겨난 것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하여 이 섬은 살아 움직이며 바다를 항해하다 한림 앞바다에 자리 잡았다고 날아다니던 섬이라는 뜻을 품은 비양도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람들은 신령한 섬이라며 두고두고 이 사연을 전하기에 이르렀으니 사연을 알게 된 물음표는 붙박인 섬의 자력에 빨려들어 이 바다까지 끌려온 것이다.

물음표는 비양도의 전설 또한 설문대의 창조설화와 같은 궤도를 도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이 전설을 두고 깊이 연구했던 학자들의 해석들이 물음표를 응원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섬 비양도와 그것을 최초로 발견했다는 여인의 이야기를 두고 여러 학자들은 빨래하는 여인은 설문대의 변형이라는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며 설문대의 신성은 사위기를 거듭해 후대에 이르러서는 이름조차 없는 빨래하는 여인으로 쇠락했다는 것이다. 비양도를 발견할 때 여인이 하던 ‘빨래’는 설문대가 제주섬을 빚어낼 때 흙을 퍼 담았던 ‘치마’와 통한다는 모티프 해석이다.

물음표는 정작 섬 속의 섬 비양도를 창조한 설문대의 사연이 움직이는 섬과 빨래하는 여인으로 변한 것이라는 해석이 온당한 것인지를 헤아리고 싶었다. 그렇게 금릉해변의 모래톱에 발 도장을 꾹꾹 찍어가며 생각에 골똘한 걸음을 옮기던 중 물음표는 생각지도 않은 풍경 앞에서 멈춰선 비양도 신세가 되었다.

(사진=한진오 제공)
잃어버린 마을 한산이왓과 설문대할망 신상(사진=한진오 제공)

먹돌 가슴 땀 든 의장으로 여미고

물음표가 맞닥뜨린 곳은 제주의 현무암으로 빚어낸 수많은 조각들이 즐비한 만물상이었다. 얼핏 관광지처럼 보이는 이곳에는 금릉석물원이라는 간판이 내걸려 있었다. 그곳에는 돌하르방으로 대표되는 제주의 석물들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석상들이 가득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경에 홀린 물음표는 갖가지 석상들이 펼쳐내는 세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제주사람들의 전통적인 생활문화부터 전설과 민속의 다양한 요소들을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빚어낸 놀라운 작품들을 하나씩 접하는 순간마다 전율이 일었다. 고색창연한 불교미술을 연상시키는 불상과 불교설화를 테마로 한 조각상들이며 지루할 만하면 아주 해학적이고 현대적인 작품까지 도대체 어떤 이의 손끝에서 이런 걸작들이 탄생했는지가 무척이나 궁금해졌지만 비밀 속의 주인공을 만나지 못한 채 한참을 머물다 되돌아왔다.

며칠 뒤 물음표는 걸작의 창조주를 만날 작정으로 다시 금릉석물원을 찾았다. 여장을 꾸리기 전에 그 주인공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갈무리한 터라 1993년에 나라에서 지정하는 명장의 반열에 오른 장공익 선생이 그 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만날 수 있겠거니 싶어서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그 뒤로 틈날 때마다 거푸 찾아가던 어느 날 드디어 장공익 명장을 만났다. 칠순을 넘긴 노인은 아이처럼 작은 체구였고 얼굴 또한 동심 어린 표정을 담뿍 지닌 모습이었다. 때마침 돌가루를 흠뻑 뒤집어 쓴 채 주먹만 한 돌하르방을 다듬고 있었는데 인사를 올리자 일손을 멈추고 대뜸 ‘나 이거 아침부터 지금까지 세 시간째 만들엄서. 이거 다 만들엉 토산품점에 납품허민 이천원. 이 불더위에.’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몇 달에 한 번 잊을 만하면 찾아들던 물음표는 여느 때처럼 석상들을 뜯어보며 명장어르신의 작업장 가까이 다가가다 처음 보는 거대한 석상을 발견하고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의 눈앞엔 10미터에 가까운 석상의 상반신이 우뚝 서 있었다. 젖가슴을 드러낸 어머니의 가슴을 파고들며 젖을 먹는 아이들과 어울린 석상은 분명히 설문대였다. 아니나 다를까. 물음표의 예측대로 여신 설문대와 그의 자식들을 빚어낸 신상(神像)이었다. 설문대의 신상은 높다란 제단 위에 자리했고, 그 밑에는 조그만 초가들이 옹기종기 붙어 앉은 마을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물음표는 이 마을은 제주도일 테고 제단은 한라산일 것이며 그 정상에 온 섬을 품에 안은 설문대가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그윽하게 살펴보는 것이라고 제 나름의 해석을 대입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장공익 명장은 4·3의 광풍에 휩쓸려 영영 잃어버린 마을이 된 자신의 고향 한림읍 상대리 한산이왓과 그들을 보살피는 설문대를 빚어낸 것이었다. 

물음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놀라운 걸작에 취해 여신의 제단 아래서 몇 시간을 눌러앉았다가 일어섰다. 다시 한 번 여신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또 하나의 의문과 마주쳤다. 여신의 젖가슴이 사람의 것과 달랐다. 아이들이 매달린 채 빨고 있는 양젖 가운데 하나가 더 있었던 것이다. 젖이 셋이라니? 명장은 무슨 꿍꿍이로 젖가슴이 저리 다듬었을까?

비성(非性), 혹은 범성(汎性)적 존재를 보다

물음표의 눈에 비친 여신은 어찌하여 젖가슴이 셋인가? 아마도 장공익 명장은 창조주의 진면목을 꿰뚫어본 것 같다. 일찍이 세계적인 신화학자 시노다 볼린은 ‘신성한 힘은 젠더 너머에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인간의 눈에 드러나는 신의 모습이 여성과 남성 중 어느 하나의 성일지라도 그것은 신성의 본질이 아닌 현상이라는 것이다. 남신의 몸으로 제우스가 아테나를 머리에서 출산한 이야기를 비롯해 여성과 남성의 양성을 모두 지닌 힌두의 시바며 수많은 신성들이 생물학적 성징을 뛰어넘는 권능을 발현하는 신화는 차고 넘친다. 신성은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전지전능한 존재이므로 변신 또한 자유롭다는 말이다.

어쩌면 장공익 명장은 시노다 볼린의 지적을 갈파한 것이다. 팔십 평생 돌을 제 몸처럼 매만지며 거룩한 신성의 이치를 깨닫는 경지에 오른 셈이다. 종교의 사제처럼 구도자의 삶을 걸은 것도 아니고 시노다 볼린처럼 학문에 매진하는 삶을 산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명이 없다고 여기는 돌 속에 영혼을 불어넣는 그이의 곡진한 삶이 이처럼 높은 경지로 이끈 것이다. 돌과 함께 살아온 그의 이력은 구도자의 것이었으며 빼어난 석학의 것이었다. 에오라지 돌 하나에서 신성과 만났고 진실한 눈으로 젠더를 뛰어넘는 창조주의 모습을 탄생시킨 것이다. 

제주섬 곳곳에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과 입말에 오르내리며 신화와 전설의 공간으로 거듭난 설문대 전설지들이 있지만 이곳은 다르다. 한 인간이 지극한 마음이 또 하나의 설문대 전설지를 탄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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