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박병섭 순천문화재단 이사가 전라남도 순천시 연향동 팔마종합운동장 주차장 안쪽 잔디밭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달 10일 박병섭 순천문화재단 이사가 전라남도 순천시 연향동 팔마종합운동장 주차장 안쪽 잔디밭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작년에 ‘여순사건위령탑’이란 이름을 빼내고 ‘여순항쟁탑’이라 새긴 돌로 바꿔 넣었습니다.”

전라남도 순천시 연향동 팔마종합운동장 주차장 안쪽 잔디밭, 볕이 잘 드는 곳에 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마치 다섯 개의 손가락을 양손으로 받히는 듯한 이 조형물은 순천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세운 ‘여순항쟁탑’이다.

지난달 10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2021 제주4·3 도외 유적지 탐방 및 과거사단체 교류사업’ 첫째 날 일정으로 순천을 방문했다. 박병섭 순천문화재단 이사가 여순항쟁탑을 시작으로 ‘여순10·19’와 관련된 유적지를 안내하며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생생한 사례로 풀어냈다.

지난달 10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2021 제주4·3 도외 유적지 탐방 및 과거사단체 교류사업’ 첫째 날 일정으로 순천 여순항쟁탑을 방문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달 10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2021 제주4·3 도외 유적지 탐방 및 과거사단체 교류사업’ 첫째 날 일정으로 순천 여순항쟁탑을 방문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948년 10월19일 ‘제주4·3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거부하며 여수지역에 주둔하던 국군이 무장봉기했다. 이 움직임은 전남, 전북, 경남 일부 지역으로 확산됐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직후라서 존립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이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군과 경찰에 의해 학살 당했다.

여수·순천(여순)지역의 비극적인 과거사를 바로 잡기 위해 지난해 7월 ‘여수·순천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반란’에서 ‘사건’을 거쳐 ‘항쟁’에 이르기까지

여수에서 “같은 민족을 해할 순 없다”며 들고 일어난 국군 14연대는 다음 날인 20일 순천을 점령한다. 그러자 이틀 뒤인 22일 이승만 정부는 군인들의 봉기를 ‘반란’으로 규정, 당시 계엄법이 존재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순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당시 ‘군인들의 항쟁’은 곧 ‘국가에 대한 반역’과 다를 바 없이 처리됐다. 순천에선 다음 날인 23일부터 국군 14연대가 해산한 27일까지 닷새 간 군경에 의한 대대적인 학살이 자행된다.

전라남도 순천시 연향동 팔마종합운동장 주차장 안쪽 잔디밭에 여순항쟁탑이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전라남도 순천시 연향동 팔마종합운동장 주차장 안쪽 잔디밭에 여순항쟁탑이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여기 어르신들에게 여순사건이라고 하면 그게 뭔지 못 알아들어요. ‘반란’이라 해야 알아들으시죠.”

‘반란’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기억되던 73년 전의 역사. 입 밖에 꺼내지 못할 만큼 두려운 단어였기에 진실에 다가가는 일이 더뎠던 걸까. ‘반란’에서 ‘사건’으로 바뀌기까지 70여년이 걸렸다.

더 나아가 ‘항쟁’이라 이름 붙인 곳, 여순항쟁탑. 순천시민들은 지난 2006년 4월 이 탑을 세우면서 이름을 새긴 돌을 두 개 만들었다. ‘여순사건위령탑’은 첫 이름돌이 되었고 지난해 5월 탑 주변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여순항쟁탑’이란 이름돌을 가지게 됐다.

“유족들에게 위안처가 됐죠. 그전엔 술 따를 공간도 없어서 참나무로 사람 형상 만들어서 제를 지내고 했거든요.”

같은 이름(여순10·19) 안에 묶이지만 여수와 순천 간 온도차는 존재한다. 박병섭 이사는 “1945년 한국민주당(민족주의 보수 세력이 집결해 창당한 정당)이 가장 먼저 깃발을 꽂은 곳이 순천”이라며 “좌익을 향한 ‘손가락총’이 가장 무섭게 작용한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우익 세력의 반발 등으로 인해 위령탑을 세우는 일이 처음부터 쉽진 않았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연대해 십시일반 기금을 모으고 모금 행사를 벌이며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순천시도 시유지(市有地)를 탑 건립 장소로 내놓았다. 여순항쟁과 크게 관련이 없는 팔마종합운동장에 탑이 세워진 이유다.

여순10·19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두 지역이 서로 달랐다. 박 이사는 “여수는 특정 단체가 중심이 됐다면 순천은 시민사회의 연대를 통해 꾸준히 운동을 이끌어왔다”며 “위령탑도 순천이 먼저 세우니까 여수도 세우려 했는데 비문 내용을 두고 여수시가 제동을 걸었다. ‘학살’이라는 표현 대신 ‘희생’으로 새기기로 시가 요구하니까 점 여섯 개만 찍은 것”이라고 설명했다(관련기사☞1948년 10월 19일 그리고 여섯 개의 점).

여순10·19 관련 지역인 구례에선 순천보다 더 빨리 위령탑이 건립됐다. 시민사회 단체가 군수를 설득해서 군 예산으로 세웠다. 박 이사는 “여수와 순천, 구례 모두 위령탑이 세워진 방식이 다 다르다”며 “지역마다 내부적으로 여순10·19를 극복하는 모습이 다른 걸 보면서 어떤 게 바람직한 방향인지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오늘따라 보고싶습니다”

1948년 10월20일 여수 봉기군이 가장 먼저 진출한 곳은 순천역이다. 통근 열차와 차량에 나눠 탄 1000여명의 봉기군은 이날 오전 9시30분~10시30분쯤 도착했다. 봉기군과 진압경찰 간 최초로 교전이 벌어진 곳은 여순10·19평화공원이 있는 장대공원 사거리다.

여순10·19평화공원 인근 장대공원 사거리. 순천에서 봉기군과 진압경찰 간 최초로 교전이 벌어진 곳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여순10·19평화공원 인근 장대공원 사거리. 순천에서 봉기군과 진압경찰 간 최초로 교전이 벌어진 곳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봉기군을 저지하기 위해 지원 나온 순천 경찰과 인근 응원 경찰, 우익 청년단원 등은 광양 삼거리(지금의 조곡삼거리)와 동천 제방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경찰의 상당수가 전투 중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고 일부는 피신함으로써 순천읍내를 봉기군이 장악했다.

이날 봉기군은 경찰과 우익 세력을 처형했다. 하지만 바로 사흘 뒤엔 상황이 뒤바뀐다. 23일 순천을 점령한 진압 군경은 봉기군과 이에 가담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색출하는 작업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들과 봉기군, 좌익 등이 죽임을 당했다.

봉기군을 도왔다고 지목을 받은 순천 주민들이 집단 학살을 당한 매곡중학교 인근 담장. (사진=조수진 기자)
봉기군을 도왔다고 지목을 받은 순천 주민들이 집단 학살을 당한 매곡중학교 인근 담장. (사진=조수진 기자)

“고개를 들라고 해서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3일 동안 같이 활동한 놈을 지목하라고 했어. 우물우물하면 개머리판으로 막 때렸어. 누가 누군지 모르니까 아무나 손가락질을 하는 거야. 지명 당하면 다 벗기고 끌고 가 죽였어. 2~3일 전 경찰관이 죽은 것에 대한 보복이었지.” (진화위 보고서 주민 증언. 참고인 장○○, 면담보고서, 2008년 7월9일)

기록에 따르면 23일 오전 진압군경은 순천읍민을 순천북국민학교로 집결시켰다. 수천명에서 많게는 수만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과 대동청년단, 우익인사 등은 봉기군 및 봉기군을 도운 사람들을 지목, 분류했다.

1948년 진압군이 시민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취조했던 순천농림중학교(지금의 순천대학교). 칼 마이던스 기자의 사진. (사진=조수진 기자)
1948년 진압군이 시민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취조했던 순천농림중학교(지금의 순천대학교). 칼 마이던스 기자의 사진. (사진=조수진 기자)
진압군이 순천시민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취조했던 순천농림중학교에는 지금 순천대학교가 들어서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진압군이 순천시민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취조했던 순천농림중학교에는 지금 순천대학교가 들어서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분류 기준은 40세 이하의 미군용 팬티를 입은 자, 머리가 짧은 자, 흰색 일본식 작업화를 신은 자 등이다. 그저 손가락질 한 번에 처형을 당했다고 해서 ‘손가락총’이란 끔찍한 표현도 생겨났다. 손가락총에 지목된 사람들은 북초등학교 인근과 봉화산 죽도봉 골짜기, 순천농림중학교(지금의 순천대학교), 매산중학교 등지에서 집단 사살이 이뤄졌다. 학살은 23일과 24일 이틀 간 집중됐다.

라이프지에 실린 칼 마이던스 기자의 사진. 동천변에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다. (사진=라이프지)
라이프지에 실린 칼 마이던스 기자의 사진. 동천변에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다. (사진=라이프지)
70년 전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던 동천변 서쪽 제방. (사진=조수진 기자)
70년 전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던 동천변 서쪽 제방. (사진=조수진 기자)

끔찍했던 역사의 순간은 사진으로도 남겨져 있다. 여순10·19 당시 호남신문사 사진부장이었던 고 이경모 기자와 미국 라이프지의 칼 마이던스 기자의 사진 속에 널부러진 시신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다. 박 이사는 “시내에 쌓인 시신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동천 서쪽 강둑에 갖다버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여순10·19평화공원 한 켠에 쌓여있는 돌탑. 박병섭 순천문화재단 이사가 설명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여순10·19평화공원 한 켠에 쌓여있는 돌탑. 박병섭 순천문화재단 이사(오른쪽)가 설명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여순10·19평화공원엔 나지막한 돌탑이 있다. 유족들이 동천 냇가에서 돌을 주어다 씻어 쌓아올린 것. 돌마다 피학살자를 기리는 말과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영문도 모른 채 가족을 잃은 이들의 그리움과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얼굴도 모르는 불쌍한 우리 아버지, 오늘따라 보고 싶어집니다. 억울하게 25세 청춘에 돌아가신 아버지. 국가는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상실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게 가능할까?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사를 철저하게 진상규명하고 적극적으로 피학살자의 명예회복을 지원하는 것. 그것이 시작점이다.

여순10·19평화공원에 쌓여 있는 돌탑. (사진=조수진 기자)
여순10·19평화공원에 쌓여 있는 돌탑. (사진=조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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