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에서 청년농업인들이 농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에서 청년농업인들이 양배추를 수확하고 있다.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새해 첫날이다. 바람이 그치고, 둥근 해가 오름 위로 올라와 검은 장막에 갇혔던 한라산을 드러낸다. 하얀 눈으로 덮인 한라산이 ‘어흥’하고 다가온다. 인내, 독립, 도전을 상징하는 ‘검은 호랑이’해가 시작된 것이다. 

호랑이 같은 강인함과 패기로 희망을 일구는 청년농업인 얼굴들이 떠오른다. 

“새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뒷마당은 버림받은 듯 씁쓸했다. 죽은 듯 조용한 봄이 온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비탄에 잠겼다. 그러나 이 땅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막은 것은 사악한 마술도 악독한 적의 공격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저지른 일이었다.”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중에서

<침묵의 봄>을 읽고 생명을 살리는 농업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은성’ 

칸막이로 둘러싸인 사무실에서 숫자와 씨름하는 회사생활을 더 하면 자신의 영혼마저 숫자에 팔릴 것 같아 정직한 땅을 찾아 내려왔다는 ‘미진’

양배추를 칼로 수확하여 톤백에 담는 공동 작업을 하다 보면 몸은 파김치가 되어도 머리는 맑아진다며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에서 ‘진정한 자기’를 찾고 싶다는 ‘은철’       

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에서 청년농업인들이 농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에서 청년농업인들이 농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하지만 희망의 풍경들 속에서 힘들고 아픈 소리들이 튀어나온다. 

“농지는 빌려준다면서 계약서는 쓰지 말자고 해요. 직불금만큼 임차료를 더 드리기로 하고 계약서를 쓰기로 했는데, 양도세 감면문제 때문에 계약서를 못 쓰니 양해해 달라는 전화가 온 거예요. 농지은행에서 나오는 땅은 거의 없고, 나온다고 해도 입지 여건이 안 좋아요. 계약한 땅이 없어서 농업경영체 등록을 못하니 농업인 자격을 취득하는 길이 막혔죠.”   

“유기포장을 제대로 만들 욕심에 작년 봄에 3,234㎡(978평)의 밭을 4억5000만원에 구입했어요, 3억원은 청년창업농 자금(연리 2%, 5년 거치 10년 분할상환)으로, 나머지는 농협에서 대출(연리 4.2%)을 받았어요. 그 밭에 단호박과 양배추를 심어서 1,860만원의 연매출을 올렸는데 농협 대출이자 630만원과 제 인건비를 제외한 영농비용 680만원 그리고 3년 후에 갚아야 할 청창농자금 1년치 이자 600만원을 떼고 나니 50만원이 빚으로 남았어요. 청창농자금 원금상환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요. 언제면 생활비를 벌기 위해 ‘n잡’을 그만둘 수 있는지도 막막하고요.”
           
“친환경농산물을 팔 곳이 없어요. 생산량이 워낙 적다보니 학교급식이나 친환경 매장에 낼 수가 없어요. 인터넷 판매에만 의존하다 보니 팔지 못해서 버리기도 했어요. 환경을 살리는 농업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돈의 논리를 언제까지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마다 괴로워요. 그러다 보니 생산보다 유통 쪽으로 자꾸 눈이 돌아가요.” 

“마을 근처의 밭이 4억원에 팔렸어요. 10년 동안 기를 쓰며 농사를 잘 지어도 4억을 벌기 힘든데 450평만 팔면 4억인 거예요. 부동산·주식·코인에 투자하는 도시 친구들이 과수원 하나만 팔아서 함께 투자하자고 해요. 그때마다 영농의욕이 싹 사라져요.”      

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에서 청년농업인들이 수확한 양배추.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에서 청년농업인들이 수확한 양배추.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농촌진흥청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공동으로 귀농인 1,000여명을 대상으로 ‘귀농·귀촌인 정착실태 장기추적조사’를 한 결과를 2019년에 발표했는데 역귀농 비율이 8.6%라고 한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귀농인들은 거의 없다. 한 귀농인은 “제주에 이주한 귀농인 가운데 30% 이상이 다시 돌아간다”며 “역귀농하는 비율과 이유도 정기적으로 파악을 하지 않는데 실효성 있는 귀농정책이 나올 수 있겠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역귀농하는 첫째 이유는 소득 문제이다. ‘2020년 귀농·귀촌 실태조사’에 따르면 1년차 귀농가구의 평균소득은 2,782만원으로 귀농 전 가구소득의 66.5%, 5년차 귀농가구의 평균소득은 3,660만원으로 귀농 전 소득의 87.5%에 그친다. 또한 귀농가구의 50.1%가 농업 외의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소득이 낮은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도 호전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서 돌아간다. 여기에는 농지 문제와 영농경험·기술 부족 문제 및 판로 문제가 기저에 깔려 있다. 

둘째는 생산·문화 활동 등을 같이 하는 사회적 관계 맺기의 부족이다. 2020년도에 귀농한 가구의 74.1%가 1인 가구이다. 마당에서 햇볕에 이불을 말리며 시를 읽고, 자급자족하는 고독한 철학자의 생활만으로 삶은 영위되지 않는다. 함께 일을 하거나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사회적 활동이 없는 고립된 귀농생활은 도시생활보다도 더 불행할 뿐이다.   

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에서 청년농업인들이 수확한 양배추를 톤백에 담고 있다.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에서 청년농업인들이 수확한 양배추를 톤백에 담고 있다. (사진=제주보타리친환경농업학교 제공)

 

필자는 정부가 청년들이 쉽게 농지를 임차하거나 구입할 수 있도록 하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정착할 수 있도록 상환기간을 늘려주는 등의 농지정책과, 계약재배 등으로 사전에 판로와 소득을 보장하는 유통정책 등을 혁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존의 농업인과 청년농부들이 농업현장에서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사는 생태적 가치와 자유와 개성을 발현하면서 이익을 서로 나누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공동체 경험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험들이 모이면 기후위기와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농업이 “우리와 나의 공존을 넘어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힐 것이다. 

부챗살 같이 퍼져나가는 햇빛이 반짝거리는 청년농부들 눈동자를 비춘다.

고기협.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꾼다. ‘말랑농업’은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글이다. 매주 화요일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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