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식 시민정치연대 제주가치 제주도지사 후보(사진=박소희 기자)
박찬식 시민정치연대 제주가치 제주도지사 후보(사진=박소희 기자)

제주도지사 선거 후보군에 새로운 이름이 등장했다. 박찬식 정치학 박사. 도민에게 낯선 얼굴은 아니다. 제2공항 반대운동 토론회 등에 자주 얼굴을 비쳤기 때문. 제주 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을 맡아 제2공항 건설에 대한 도민의견이 '반대'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가 시민정치연대 제주가치의 제주도지사 후보로 나서면서 현실 정치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올해 제주도지사 선거는 그가 처음 도전하는 선거는 아니다. 첫 선거는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제주교대 부속 국민학교의 전교어린이회장 선거에 나서서 선출됐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를 내려 전국 모든 학교의 학생회를 임명제로 바꿔버렸기 때문. 정권은 학교 내 민주주의도 용납하지 않았다. 학생회 자리를 ‘학도호국단’으로 바꿔놓았다. 학우들에 의해 선출된 학생회장직을 군사정권에 빼앗긴 그 어린 학생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후 10년이 지난 1985년. 박찬식은 서울대 법학과에 재학중이었다. 그해에 학생들이 민주적으로 선출하는 학생회가 부활했다. 그는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출마했다. 슬로건은 ‘역사의 여명을 향하여 마침내 민중이여’. 33%의 득표율, 2위로 낙선했다.

박찬식을 인터뷰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총학 선거에서 당선되었다면? 친구 원희룡처럼 사회운동을 내려놓고 사법고시에 응시했다면? 지금쯤 다른 서울대 법대-운동권 출신 586기득권처럼 자리를 잡고 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았는지 묻자, 불교적인 답을 내놓는다. "인(因)과 연(緣)이 닿지 않았던 거죠." 쉽게 말하면 '팔자'려니 한다는 말이다. 

소속 정당도 없이 시민후보를 기치로 내걸고 제주도지사 선거에 뛰어든 박찬식. 유력 정당에서 활동하지 않고서는 선거판에서 좀처럼 성과를 내기 어렵다. 무모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선거에 뛰어든 이유와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두 번의 구속

올해 만 58세인 박찬식은 원희룡과 함께 제주에서는 잘 알려졌던 수재다. 당시 수재 코스를 따라 198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원희룡과 대학 동기다. 대학에서 사회에 대한 눈을 떴다. 당시 많은 학생이 그랬듯 대학 입학 후 광주의 참상을 알게 됐다. 큰 충격을 받았다. “검사, 판사, 국회의원 출세의 길을 가야 하는지 고민하게 됐죠. 1년 동안 고민하다가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학생운동을 하게 됐어요. 지하운동조직에도 가담했고요. 동시에 제주도 문제연구회에서 공부하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뜨게 됐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던 그는 1985년에 처음 구속된다. 독재타도 시위를 주도해 집시법을 위반한 혐의다.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출소 후에는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대구시로 내려가서 오토바이 부품을 만드는 신성공업사에 취직했다. 효성과 대림에 납품하는 150명 규모의 회사였다. 공장 노동자로 약 1년 동안 프레스를 밟으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노동조합을 조직했다.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찬 바람이 불면서 해고됐다. 이후 노동자를 지원하는 단체로 들어갔다. 대구노동자협의회의 교육서클부장으로서 노조 상담 지원,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 1990년에는 다시 서울로 상경해 노동운동단체협의회에 들어갔다. 다양한 역할을 거쳤다. 교육선전부장, 조직부장, 정책실 차장으로 활동하며 ‘노동운동’이라는 격월간 잡지 발간에도 참여했다. 1994년 철도파업, 1995년 한국통신 노조 민주화 투쟁도 지원했다.

시민정치연대 제주가치 박찬식 후보 3대 핵심공약

 

1. 제주4.3평화국제공항

2. 환경보전기여금

3. 실질적 풀뿌리 정치를 실현시키는 주민자치회 도입

 

1995년, 노동운동을 정리하고 사법고시 공부를 하려 했지만, 또 한 번 발목이 잡혔다. 한국통신 노조 민주화 투쟁 지원 때문에 수배되었다. 검찰은 박찬식이 잡지 ‘노동운동’에 쓴 글을 이적표현물이라고 규정하고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면서 징역 4년 형을 구형했다. 김영삼 정부의 노사개혁 분위기 덕분에 6개월을 옥살이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정책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96년에는 서울대 행정대학원으로 들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박찬식 후보가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 당시 양윤경 전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왼쪽)과 함께 미 대사관에 4.3의 책임 규명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있다.(사진=제주투데이 DB)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 당시 양윤경 전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왼쪽)과 함께 미 대사관에 4.3의 책임 규명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있는 박찬식.(사진=제주투데이 DB) 

이듬해인 1997년. 제주 시민사회는 4.3 50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이슈화하기 위한 제주4.3 50주년 사업을 전개했다. 제주4.3연구소에서 50주년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제주4.3 50주년범국민위원회가 결성됐다. 1998년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4.3을 알리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집회가 파고다공원에서 개최됐다. 1999년에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3천명이 모여 4.3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서울 한복판을 가로질러 파고다 공원까지 거리행진도 했다, 박찬식은 제주4.3 50주년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을 맡아 이들 집회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2003년까지 사무처장을 맡았다. 이후 2005년에 해외유학 길에 오른다. 어느새 마흔 살이 넘었을 때였다. 늦깎이 유학이었다. 어떤 결심이었을까?

“4.3범국민위에서 활동하던 때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에 기획팀장으로 참여하고 있었어요. 사이버 교육을 노동진영에서 처음 도입했을 때죠. 전국 노조 간부와 시민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하는 3년짜리 교육 과정이었어요. 노동 교육이라는 것이 그전에는 1달이나 6개월짜리였는데... 제대로 된 3년 과정으로 역량 있는 정치활동가, 시민사회 활동가를 양성해보자는 취지였죠. 온라인으로 하고 오프라인으로도 하면서 지역 강의를 계속 쫓아다녀야 했어요. 3년 동안 거의 집에 못 들어갔어요. 집에 들어가도 새벽 3시, 4시였죠. 아이들이 아빠 얼굴 보지 못하는 생활을 3년간 하면서 너무 고갈됐어요. 재충전 시간이 필요하다 싶었죠. 그런데 국내에 있으면 인연 끊기가 쉽지 않겠더라고요. 고생하는 동료들이 있는데... 공부할 겸 유학을 가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충전도 하는 시간을 가지려 했죠.”

영국으로 건너가 요크대학에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국가주도 발전이 성공을 낳았다는 테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정희, 전두환의 개발독재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다뤘다.(군사정권이 전교어린이학생회장직을 빼앗아간 데 대해서 수십년 뒤 학문적으로 '응징'한 격이다.)

'다시 제주'...4.3, 강정해군기지, 제2공항으로 이어지는 연(緣)

2011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유학길에 오를 때는 돌아오면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서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부하고 책도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학 중 민주노동당이 분열, 분당했다. 제주에서는 강정해군기지 건설로 인한 갈등이 촉발됐다. 귀국하던 해에 강정 투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제주에 와서 올레길을 걷는데 강정의 현실을 봤어요. 외돌개에서 월평 집까지 가려는데, 직접 강정의 현실을 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박찬식을 비롯해 '육지'에 사는 제주민들은 ‘강정을 사랑하는 육지 사는 제주 사람들’을 만들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강정 주민들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후 2015년, 단체는 ‘육지 사는 제주 사람들’로 명칭을 변경했다. 그해 말무렵에 제2공항 입지가 발표됐다. ‘육지 사는 제주 사람들’은 서울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그러면서 제2공항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게 댔다.

박찬식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좋아하는 것보다 해야 하는 것을 하는 사람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들여다보지 못했어요. 4.3 70주년에는 50주년에 미뤄둔 과제들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배보상 문제, 수형인 문제, 정명 과제 제기, 미국책임 등 70주년을 계기로 하지 않으면 너무 늦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찬식은 제주4.3 70주년범국민위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았다. 70주년범국민위는 광화문 문화제, 전국 20여 개 도시 4.3희생자 추모 분향소 설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4.3전시,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4.3 70주년 사업이 마무리될 무렵인 2018년 가을 제2공항 용역의 타당성을 재검토하는 검토위원회에 주민대책위 추천으로 참여하여 부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제2공항 반대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제2공항 반대 운동 진영은 크게 두 갈래였다. 직접 행동을 통해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쪽과 구조 안에서 현실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쪽. 제2공항 반대 운동은 두 갈래로 나뉘고 합쳐지면서 전개됐다. 갈등도 없지 않았다. 제2공항에 대한 제주도민의 의견을 모으자는 데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다. 도민여론이 제2공항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우려하는 이들도 많았다.

제2공항 도민여론 묻고 ‘반대’ 확인하다

박찬식은 도민여론을 묻자는 쪽이었다. 현실적으로 제2공항을 막으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다고 봤던 것. 여론조사, 공론화에서 지면 반대 운동의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걱정과 고민이 없지는 않았다. 

박찬식(사진=제주투데이 DB)
박찬식(사진=제주투데이 DB)

"2017년 성산대책위가 장기농성하고 단식 농성했을 때, 도민 공론화로 가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를 꺼냈어요. 도민의 여론을 묻는 방안에 대해서는 반대가 많다는 판단으로 접었었어요. 사전타당성조사 검토위원회가 시작됐고, 불안정한 구조 안에서 싸웠죠. 2018년 사전타당성조사 검토위에서 활동을 하고, 비상도민회의를 결성하면서 고향에 가서 선후배를 만나보니 분위기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해볼 만하다 싶었죠. 검토위 과정을 통해 국토부의 제2공항 명분과 정당성이 무너졌잖아요. 이때 도민들은 환경수용력을 넘는 난개발에 대한 불안감, 반감으로 회의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고요. 제2공항 건설과 개발이 도민 이익으로 돌아오는 것 아니라는 걸 감지하면서 개발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가 철회되는 분위기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충분히 도민여론을 물어볼 만하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이런 투쟁에서의 선택은 변화하는 현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해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9년 여름 정도에는 제주 시민사회 활동가들도 도민여론이 제2공항 반대에 가깝다는 데 대한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도민의 뜻을 묻자는 방향으로 다수의 의견이 모였습니다.”

"피해지역 주민 두번 죽이는 원희룡의 언사...친구지만 인간적으로 용납 안 돼"

원희룡 제주지사(왼쪽)와 박찬식 상황실장(사진=KBS 영상 갈무리)
오랜 친구인 원희룡 전 제주지사와 1대1로 맞붙은 제2공항 토론회(사진=KBS 영상 갈무리)

그렇게 치러진 제2공항 건설에 대한 도민여론조사 결과 반대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2공항 입지 발표 직후 70%대였던 찬성 여론이 돌아선 것. 하지만 원희룡은 반대가 우세한 도민여론조사를 따르지 않았다. 국토부에 제2공항 건설 추진 의견을 냈다. 그전까지 박찬식은, 비록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오랜 친구였던 원희룡에 대한 안쓰러움을 갖고 있었다. 원희룡이 서 있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어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 한 켠으로는 측은했던 것.

“그런데 3월 10일 여론조사를 뒤집는 발언을 하는 걸 보고 정말 화가 났어요. 인간적으로도 분노하게 됐죠.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최소한 진보 보수를 떠나서, 도민의 뜻이 확인됐는데, 정면으로 짓밟아버린 거니까요. 오만이죠. 특히 화났던 것은... 성산 지역 별도 조사를 억지로, 배 째라 식으로 집어넣고, 성산 주민 여론조사 결과를 주민 수용성이 확보됐다는 취지로 거론한 데 대해서는 참기가 어려웠어요. 피해지역 주민을 제외하고는 찬성 많이 나올 게 뻔하잖아요. 같이 나고 자란 친척과 이웃이 성산읍에 살고 있는데, 피해지역 4개 마을 주민 입장에서는 ‘너희들 죽어라’라는 거죠. 억지로 끼워 넣은 그 결과를 두고 주민 수용성이 확보됐다고 말할 때 정말 분노스러웠어요. 피해주민을 두 번 죽이는 이런 언사, 아무리 정치라지만 인간적으로 용납이 안 된다, 싶었습니다.”

진보진영 후보단일화..."제주를 바꾸는 힘 만드는 것"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제주지역 진보진영이 선거를 어떻게 치르게 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제주지역의 진보 진영은 환경 문제 등 각 영역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정치 세력화의 성과는 올리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거대 양당 체제가 우선 지목된다. 박찬식 역시 이 문제를 돌파해야 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의미있는 성과를 올리려면 진보진영의 후보단일화라는 과제를 풀어야만 한다.

“제주도의 전체적인 상황이 임계점, 전환점 위에 서 있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고 있습니다. 도민사회에서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지금 개발일변도를 벗어나려는 제주도민의 마음과 생각을 결집시켜서 하나의 힘으로 전환해내지 못한다면, 진보세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진보진영이 어려움 겪어오다 보니, 힘을 만들어내는 데 대해 자신 없어 하고, 너무 고정화해서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변화하는 흐름을 타고 그 흐름을 제대로 결집해서 실제로 제주를 바꿀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과제입니다. 힘을 모으면 위력적인 힘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