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사진=이성홍 제공)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사진=이성홍 제공)

지난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의 전부개정이 이뤄지고 이를 근거로 4·3희생자에 대해 국가 보상안을 담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미군정과 공권력 등에 맞서는 과정에서 도민들의 피해가 있고 나서 70여년 만에, 4·3특별법이 만들어진 지 20여년 만에 ‘보상’이라는 단어가 법에 담기자 여기저기서 ‘해결’이란 말들이 너무나도 쉽게 쓰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4·3특별법 전부개정안을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오영훈 국회의원은 지난해 2월 해당 법안의 국회 본회의 심사를 앞두고 제주도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4·3의 완전한 해결이 시작됐다”고 대대적으로 알렸다. 

원상복구가 불가능한 피해(사망 또는 행방불명 등)를 두고 ‘완전’이라는 표현은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다. 물론 최근 두 차례에 걸친 개정을 통해 희생자의 명예회복에 큰 진전을 이뤄냈다는 데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앞서 언급했듯 법안에 국가가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에게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조항(16조)과 그 구체적인 금액과 지급 방식을 담겼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전후 일어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한 최초 입법적 보상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다 보니 4·3특별법이 국내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공권력에 의한 피해, 즉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정표’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섣부른 전망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21일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과 순천대학교 인문학술원이 공동 주최한 2022년 제1차 연합학술대회 ‘제주4·3과 여순10·19 저항의 기억과 연대’가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2호관 현석재에서 열렸다. 

이날 고성만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4·3 과거 청산은 다른 지역 과거사 문제 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을까?’ 주제로 발표에 나섰다. 

고 교수는 “제 질문(발표 주제)에 대한 사회적인 답변은 이미 나와있다. ‘단초가 된다’이다”라며 “4·3특별법 개정의 효과가 제주사회에 나타나기도 전에 이런 얘기가 벌써부터 나오는 이유는 뭘까. 이게 제 질문”이라고 운을 뗐다. 

5일 오전 제주 관덕정 앞에서 제주4·3특별법개정쟁취공동행동이 관덕정 앞마당에서 ‘제주4·3특별법 개정 도민 보고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지난해 3월 5일 오전 제주 관덕정 앞에서 제주4·3특별법개정쟁취공동행동이 관덕정 앞마당에서 ‘제주4·3특별법 개정 도민 보고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장밋빛 예견에 감춰진 질문

고 교수는 ‘과거사 해결의 단초’라는 장밋빛 예견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또는 병행되어야 할 질문들이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우려했다. 오히려 4·3사례로 인해 개별 사건들의 역사적 특수성이나 사회적 현실이 무시될 수도 있다. 또 선례가 생겨버리면 ‘밑으로부터의 과거 청산’이 진행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는 “4·3 사례를 완성형으로 포장해 선전하면서 (과거사 해결의) 유력한 선택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고유하고 독자적인 과거 청산의 사상과 문화, 전략과 방법론을 모색하는 가능성 역시 차단되지 않을까”라며 “오늘 발표는 단답형으로 결론 내릴 수 없는 물음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무장대’, 희생자도 가해자도 아닌 자

고 교수는 닫힌 결말, 불가역적 종결을 뜻하는 ‘완전한 해결’이 대중 언어로 정착될 수 있었던 배경에 선별된 ‘희생자’의 역할이 컸다고 피력했다. 한국 사회는 제주4·3 당시 발생한 다양한 죽음들을 ‘희생자’로 일원화하는 과정에서 ‘희생자 제외 대상’을 만들어 내며 여러 목소리들을 묵음화했다. 

제주4·3이라는 복잡한 시대 상황과 역학 구도를 단순화하는 데 ‘희생자’가 활용됐다. 고 교수는 “구체적인 가해와 피해 사실, 가해와 피해라는 극단적 구도로 수렴될 수 없는 관계들의 실체는 더욱 불명료해졌다”라고 지적했다. 

‘선별된 희생자’와 ‘희생자 제외 대상’이라는 구도에선 주민과 토벌대가 유일하게 공식화의 대상이 된다. 무장대가 상징하는 항쟁의 역사를 후퇴시키고 저항의 기억을 말소시키는 데에도 기여했다. 여기서 무장대는 ‘희생자 제외 대상’일 뿐, 가해자도 아니고 희생자도 아닌 애매모호한 영역에 서 있다. 

고 교수는 “개개인들의 다층적인 경험과 파편화된 기억에 대한 재평가는 보류된 채, 탈맥락화된 ‘희생’만이 강조됐다”며 “이는 4·3의 기억을 획일화하고 4·3이라는 유산에서 저항의 의미를 탈각시켰다”고 주장했다. 

4·3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白砒)
4·3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白砒). (사진=제주투데이DB)

#‘사건’과 ‘백비’ 간 긴장 관계

4·3특별법 정의 조항에선 1947년 3월1일부터 1948년 4월3일까지의 과정을 ‘소요사태’라고 규정하고 있다. ‘소요’란 ‘여러 사람이 모여 폭행이나 협박 또는 파괴 행위를 함으로써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를 뜻한다. 민중의 항쟁과 저항의 성격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4·3의 과제로 언급되는 ‘정명(正名)’과도 무관하지 않다. 

고 교수는 “‘사건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과 합의는 과거 청산을 둘러싼 다양한 알력의 상호작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며 “‘소요사태’라는 잔재는 지난 20여년간 이어져온 피해자들의 분투와 역사 인식의 변혁, 과거 청산의 사회화가 요원한 우리의 현실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소요사태’라는 단어를 정의 조항에서 빼려는 시도는 있었다. 지난 2020년 발의한 전부개정안에선 4·3의 정의를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발포에 의한 민간인 사망사고를 계기로 저항과 탄압, 1948년 4월3일의 봉기에서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령의 해제까지 무력 충돌과 공권력의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이 집단적으로 희생된 사건”으로 개정하려 했다. 

하지만 반영되지 못했다. 고 교수는 이에 대해 “유독 ‘정의’ 조항이 바뀌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물으며 “법 개정에 핵심적으로 참여한 인사들은 ‘야당과의 이견’이나 ‘국회 논의 과정에서 칼질’, ‘정부 쪽의 난색’ 등 외부 요인을 얘기하지만 과연 그것뿐일까”라고 말했다. 

이어 “오히려 법안을 발의할 때 제시했던 새로운 ‘정의’가 반영되지 못했을 때 자성과 성찰을 요청하는 어떠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무반응 현상이 이 물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며 “이번에 개정이 이뤄질 때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놀랐다”고 표현했다. 

이번 개정안에 반드시 ‘보상’ 규정을 넣기 위해 민감한 이슈인 ‘정의’ 조항을 굳이 문제 삼지 않은 것이라고도 봤다. 그는 “보상금 조항(16조)의 집행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라면 법이 제정된 이후 줄곧 1947년~1948년 상황을 규정해온 ‘소요사태’가 비록 구시대의 잔재라 하더라도 협상 테이블에 올라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희생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이 과거 청산 후속조치의 최우선 순위로 부상된 상태라서 ‘정의’를 개정하는 데 발생하는 갈등 혹은 지체는 감수할 수 없는 선택지였을 것”이라며 “‘저항’과 ‘보상’이 양립하기 어려운 현실을 인지하고 ‘정의’ 개정이 초래할지 모르는 불안정성은 제거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이 있었을 것”이라고 봤다. 

문재인 대통령이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2주년 제주4·3 추념식에 참석해 추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주투데이)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20년 4월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2주년 제주4·3 추념식에 참석해 추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주투데이DB)

#제주의 봄, 모두에게 평등할까

고 교수는 또 보상금 지급이 이뤄지게 되면 제주사회 내 균열이 생길 가능성을 우려했다. 보상금 집행 과정에서 ‘희생자’와 ‘비(非)희생자’ 간 ‘기울어진 운동장’은 더욱 고착화될 것이라고 보는 것. 

그는 “최근 법 개정 이전엔 ‘유족’이 갈등의 당사자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며 “그러나 보상이 시작되면 ‘유족’ 또는 ‘상속인’이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하게 되면서 ‘누가 상속인인가’, ‘누가 우선순위인가’를 두고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걱정했다. 

이어 “보상이 현실화되고 경제적 격차가 뚜렷해지면 마을 주민·친족·세대 간 사회적, 심리적인 불평등은 더욱 가중될 수 있다”며 “선별의 정치와 위계 질서가 격화되면서 잠재됐던 국적의 유무와 차이, 가족의 의무, 홀로 감내해 온 고통들을 소환할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말한 ‘제주의 봄’의 온기가 평등하지 않게 퍼질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4·3이 다른 과거사 해결을 표준화해선 안 돼

고 교수는 “4·3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분투해 온 제주사람들의 노력과 공과는 결코 부정할 수 없지만 이를 ‘기준’이나 ‘모델’, ‘모범’으로 서둘러 치장하고 ‘전국화’하려는 움직임엔 좀 더 긴 호흡을 통한 분석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4·3이 다른 과거사 문제 해결에 단초가 될 것이라는 희망은 과거사 해결을 표준화·규격화하려는 관료제의 효율성을 교묘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라며 “당장 4·3특별법 내 ‘정의 조항’의 한계가 여순10·19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주4·3은 지난 20여년 간 법 체제 아래 시도되어온 과거 청산의 내용에 대해 분석이 이뤄져야 하고 다른 지역은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해 (특수성에 맞게) 토착화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며 “‘유사한 민간인 희생 사건’이라는 발상은 결코 밑으로부터의 시선에서 나올 수 있는 관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발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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