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하면 떠오르는 것이 보리의 뿌리 개수로 풍흉을 점치던 기억이다. 샛절 드는 시간에 보리를 한 움큼 뽑아 온 아버지는 초등학교 1학년인 필자에게 뿌리의 개수를 세라고 했다. 누런 보리 씨에서 돋아난 흰 줄기가 점점 푸르러지면서 연녹색으로 끝을 맺는 잎과 실처럼 길게 뻗는 매끈한 하얀 뿌리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꼈었다.
아버지가 뿌리가 하나면 흉년이 들고, 둘이나 셋이면 풍년이 들며, 넷이 넘으면 흉년이 든다고 했다. 넷 이상이면 흉년이 든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보리가 어릴 때 웃자라면 쓰러진다고 했다. 때보다 빠르게 크는 것보다 때에 맞게 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샛절은 입춘(立春: 봄이 서는 날)의 제주어이고, ‘샛절 드는 날’은 새해의 새 절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그래서 신구간(新舊間)은 묵은해의 마지막 절기인 대한과 새해의 첫 절기인 입춘 사이다. 정확히는 대한 후 5일부터 입춘 전 3일까지이다.
이때 지상에서 인간사를 관장하던 신들은 임기를 마치고 옥황상제를 뵈러 하늘에 올라간다. 하지만 새로 발령장을 받은 신들은 지상에 내려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기는 신들이 부재하기 때문에 조왕(부엌), 통시(변소), 쇠막(외양간) 등을 고치거나 이사를 하더라도 ‘동티(제주어·자연이나 사물을 건드려서 신들을 노하게 하여 받는 재앙)’가 나지 않는 것이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에서는 집 안을 수리하거나 이사를 하는 일은 신구간이 아니면 날을 받아서 행해졌다. 그만큼 신이 관장하는 사물에 손을 댈 때는 신중을 기했단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쉽게 밀어제치고 세워 올린다. 후대들에게는 동티나는 일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입춘에 여자가 남의 집에 방문하는 것도 금기였다. 제주는 밭농사가 대부분이고 남자는 센 일만 해서 ‘검질(제주어·잡초)’ 매는 일은 여자의 몫이었다. 땡볕 아래에서 매어도 매어도 올라오는 김을 매는 일은 고단한 일이었다. 그러니 새해 첫날에 검질이 덜 나도록 비는 일은 당연했다.
이런 이유가 집 밖으로 여자가 나다니는 것을 싫어했던 남자들의 고약한 인식과 맞물려 “샛절 드는 날 여자가 놈의 집에 가지 말라”는 속언이 생겨 난 것 같다. 지금은 제초제나 비닐멀칭이 여성 노동을 대신하면서 잡초방제는 남성의 몫이 되었다. 정의롭다고 여기면서도 환경에 동티를 낸다는 생각에 씁쓸하다.
샛절 드는 날의 으뜸 행사는 입춘굿이다. ‘춘경(春耕)’이라고도 하는 입춘굿은 탐라국 시절 왕이 백성들 앞에서 몸소 밭을 가는 전통에서 유래하였고, 호장(고을바치)이 낭쉐(나무소)를 끌며 농경의 모의의식을 실연하며, 심방의 주재 아래 관과 민이 참여하여 풍농을 비는 여민락(與民樂) 축제였다.
이원조(1841.3.2.~1843.7.6. 제주목사로 근무)의 탐라록(耽羅錄)은 입춘굿을 “관복을 갖추어 입은 호장이 나무로 만든 소가 이끄는 쟁기를 잡고 나가면 어린 기생들이 부채를 흔들며 뒷 따른다. 이를 ‘쇠몰이’라고 한다. 심방들은 신명나게 북을 치며 앞에서 인도한다. 객사에서 시작하여 관덕정 마당에서 밭을 가는 의식을 연출한다. 관아에서는 음식을 차려 모두에게 대접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14년 일제는 제주인들의 문화적 결속력을 해체하기 위해 입춘굿을 중단시켰다. 그러다가 1999년 제주민예총이 ‘탐라국입춘굿’ 축제로 복원하여 제주시의 축제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축제가 왕(호장)이 직접 쟁기를 잡고, 민초들에게 술을 직접 권하며, 한데 어울려 놀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입춘굿의 고갱이를 잇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노동이 먼저다’라는 상징과 국가적으로는 부의 양극화, 공정과 정의의 의미에 대한 갈등,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의 대립, 지역적으로는 제2공항 설치,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를 위한 특별법’ 개정 등에서의 보전과 개발의 대립, 관 주도의 해결방식에 따른 주민 갈등, 현실이 되어가는 농어촌의 몰락 등의 문제를 민과 관이 함께 풀어가는 상징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영어 봄(spring)은 ‘솟아나다’에서 유래했고, 한자 춘(春)은 햇살을 받은 새순이 힘차게 돋는 모습을 의미하는 회의(會意)문자(둘 이상의 한자를 합해 만든 한자;옮긴이)라고 한다. 우리말 봄은 ‘보다’의 명사형으로 갇혀 지내다 자연의 변화를 보는 때가 바로 봄이라고 한다.
‘봄놀다’에서 ‘뛰놀다’가 되었다고 하며 봄은 생동감이 넘치는 계절이라고도 있다. 아무튼 죽음의 계절 뒤에 오는 봄에서 생명력과 희망을 느끼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인지상정인 것 같다.
독자들도 묵은해의 액운은 멀리 보내고, 희망을 농사짓는 생명력 넘치는 새해가 되길 빈다.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정월령(正月令)으로 ‘샛절 드는 날’ 인사를 대신한다.
"일 년 농사는 봄에 달렸으니 모든 일 미리 하라. 만약 봄에 때를 놓치면 일 년 일이 낭패되네. 농기구는 정비하고 일할 소는 잘 먹이며, 재워 놓은 재거름 한쪽으로 실어내고, 보리밭에 오줌 주기 작년보다 힘써 해라."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꾼다. ‘말랑농업’은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글이다. 매주 화요일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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