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박소희 기자
사진=김수오

6학년 형, 누나들은 거의 다 모여 있었다. 옷가지들을 넣은 가방들 사이로 용설란이나 문주란 따위의 뿌리에 묻은 흙덩이가 비닐로 잘 감싸인 채 놓여 있었다. 서울 사람들에게 줄 선물이라고 했다. 그 흔한 문주란이 서울 사람들에게는 귀한 선물이라는 것이 신기하게만 생각되었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는 전복이나 옥돔 같은 귀한 해산물을 선물로 준비했을 터였다.

오늘은 6학년들이 서울 구경 가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몇 명이 모이기만 하면 으레 서울 구경이 화제로 떠올랐다. 남대문도 구경하고 남산에 올라 빌딩이 숲을 이룬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창경원에 가서 호랑이와 사자도 볼 것이다. 서울 리라초등학교에 다니는 부잣집 아이들 침대에서 잠을 자며, 생전 처음 보는 진기한 음식도 실컷 먹을 것이다. 게다가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간다는 것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들 관심이 온통 서울 구경에 모인 까닭은 이 모든 것이 공짜라는 것이었다. 우리도 6학년이 되면 공짜로 서울 구경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먼 이야기였고, 오늘 당장 떠나는 6학년 형들을 마냥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6학년 형 중에 오촌 아저씨도 있었다. 형처럼 따르며 그냥 삼촌이라고 불렀다. 한 학년에 한 학급밖에 없는 조그만 학교, 내가 성산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던 때의 일이다. 바람이 살랑거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일출봉 자락 잔디밭에서 처음 썰매를 타던 기억이 떠오른다. 부산에서 성산포로 옮겨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섯 살 무렵이었다. 바람에 유채꽃 노란색이 실려올 것 같은 화창한 날이었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일출봉 초입에는 마치 치마폭을 드리운 듯이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일출봉을 바라볼 때 왼쪽 치맛자락은 우뭇개였다. 오정개 바닷가 쪽으로 뻗어 내려가며 바다 쪽으로 가파른 벼랑을 이루었다. 바다 반대쪽으로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도 제법 경사가 있는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썰매를 타면서 짜릿함을 맛보기에 딱 알맞은 기울기였다. 우뭇개 언덕 아래에서는 치맛자락을 접어올리듯 무슨 호텔을 짓는다며 공사가 한창이었다. 썰매를 타고 내려온 평지에는 베니어합판 따위의 폐자재가 잔뜩 쌓여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몇 번 썰매를 타고 있으면 공사장 쪽에서 누군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줄행랑을 쳤다. 도망쳐야 할 아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까만 바지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한 청년이 서울말을 쓰며 때릴 듯 달려들었다. “와 그라는데요. 여도 아저씨 땅이라예?” 하며 나는 대들 듯 말했다.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게 아니고 여기 널빤지 같은 것, 훔쳐가니까 그렇지. 앞으론 여기서 썰매 타지 마.” 하며 순순히 넘어가 주었다. 걱정 반 호기심 반, 도망가다 말고 잡힌 나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형들 중에 한 명은 그 뒤에도 나만 보면 몇 번이나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와 그라는데요.” 하며 흉내를 내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떤 날엔가는 공사장 폐자재가 쌓여 있는 곳을 뛰어다니며 놀다가, 위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못을 밟은 적도 있었다. 까만 고무신을 뚫고 발바닥 깊숙이 못이 파고들며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눈물을 흘리며 집에 갔더니 할머니가 “아이고, 큰일났져. 망치 좀 가져와 보라.” 하며 말했다. 잔뜩 혼나겠거니 생각하며 왔는데 망치라니 너무 뜻밖의 반응이었다. 녹슨 못 가루를 그냥 놔두면 파상풍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릴 수 있다고 했다. 그 뒤로 나는 하루에 두세 번씩 상처 난 자리에 망치를 통통 두드렸다. 무슨 약을 바른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1~2주일가량 뒤에는 상처가 감쪽같이 아물었다.

서울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형들 주위로 몰려들어 진기한 얘기들을 들었다. 어떤 형은 잔디밭 깔린 정원이 있는 2층 양옥집에서 지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서울 집에는 화장실이라는 데가 이서.”

“화장하는 데?”

“그게 아니고 변소간이 집 안에 있는 거라. 물 내리민 싹 내려가 부러.”

재래식 화장실과 돼지를 기르는 통시밖에 모르던 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얘기였다. 같이 모여들어 형 이야기를 듣던 다른 아이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온갖 학용품이나 장난감을 잔뜩 선물로 받아온 형도 있었고, 연필 몇 자루만 달랑 받아온 형들도 있었다. 삼촌이라고 부르며 내가 따르던 오촌 아저씨가 어떤 선물을 받아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공책 몇 권 받아오지 않았을까 싶다. 삼촌이 어떤 선물을 가지고 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가 네 형제를 키워야 해서 집안 사정이 넉넉할 리 없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전기를 가설한 후에도 한동안 호롱불을 켜고 지냈다. 그런 처지라 변변한 선물을 챙겨갔을 것 같지는 않다. 삼촌은 서울 구경한 얘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된 뒤에 물어보아도 쓴웃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한테는 책받침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리라초등학교 마크가 찍힌 노란색 교복을 입은 뽀얀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이 잔디밭에서 뛰어오는 사진이 실린 책받침이었다. 여자아이들은 단발머리에 베래모를 썼던 것 같고 남자아이들은 나비넥타이를 맸던 것 같다. 우리와는 너무도 먼 세계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누군가 책받침을 오므리면 평지인 잔디밭이 마치 언덕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하여, 몇 번이나 책받침을 오므리며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마침내 호텔이 완성되었다. 일출봉 자락을 압도하며 큰 건물이 들어섰다. 사층인가 오층짜리 육중한 건물이라 굳이 큰 간판 같은 것이 필요 없었다. 처음 건물이 들어섰을 때는 옥상 아래쪽이 ‘일출봉관광호텔’이라고 한자로 된 간판이 걸렸던 것 같다. 내 기억에 깊이 남아 있는 간판은 ‘日出峰 호텔’이라는 큼직한 간판이다. 호텔 건물 이마에 한 글자씩 큼직하게 나붙었다. 시간이 지나고 호텔이 조금씩 쇠락해갈 때 안간힘을 쓰듯 세워진 간판이다.

그렇게 호텔이 모습을 드러낼 때,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호텔 한켠에 풀장이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호텔 바로 뒤에 우뭇개 바닷가가 있는데 왜 굳이 풀장을 지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새파란 물이 가득 들어찬 수영장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새파란 수영장에서 꼭 한번 수영을 하고 싶었다. 끝내 해보지는 못했지만.

호텔을 세운 사람은 리라초등학교 이사장이라고 했다. 동네 어른들 말로는, 호텔을 지으려면 동네 사람들의 땅을 사들여야 했다. 그때는 관광객들도 별로 많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도 땅의 가치를 제대로 몰라 그냥 헐값에 넘겼다. 뒤늦게 헐값에 넘긴 동네 사람들이 불만을 터트리자 마지못해 6학년들 수학여행도 시켜주고 그랬다고 한다.

그렇게 호텔은 들어섰고, 호텔이 생기면서 관광객들도 늘어났다. 큰어머니와 작은어머니도 해삼이나 전복 따위를 접시에 썰어 파는 일을 시작하셨다.

일출봉 입구 언덕에서 왼쪽으로 가면 우뭇개 바닷가가 있다. 호텔 바로 뒤편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다. 우뭇개 바닷가까지는 긴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뭇개로 내려가는 중간에 자리를 잡고 갓 잡은 해산물을 접시에 담아 팔았다.

“야야, 오분작이는 팔지 말라.”

“게메마씀. 경헌디 물건이 어시난 어떵헐 수 이수꽈?(그러게요. 하지만 물건이 없으니 어쩔 수 있나요?)” 하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대화를 흔히 듣곤 했다. 오분작이는 전복처럼 생겼는데, 전복보다 크기가 작았다. 게다가 눈에 안 좋다고 해서 날것으로는 먹지 않는 해산물이었다. 귀한 전복회를 찾는 외지인들이 많아 전복을 댈 수 없어서 오분작이를 내놓기도 했던 것이다. 외지인들은 오분작이가 있다는 것도 몰랐으니 전복과 오분작이를 구별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진=김수오
사진=김수오

일출봉 진입로 오른편에 있는 잔디밭은 골프장으로 바뀌었다. 어쩌다 눈이 쌓인 날,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이 모여 꿩이며 참새를 잡는다고 부산을 떨던 곳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마음껏 뛰어다니다가 심심해지면 이리저리 괜히 뒹굴어 보기도 하던 곳이었다. 그렇게 뒹굴어도 잔디가 잘 자라 있어 다칠 염려도 없었다. 사방에 높은 철망이 쳐졌다. 철망을 넘어 주변에 떨어진 골프공을 주워다 주면 돈으로 바꿔준다고도 했다. 방과 후에 해가 질 때까지 골프공을 주우러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우연히 골프공을 몇 개 주운 적은 있지만, 돈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호텔이 들어섰다고 해도 일출봉에 오르는 기쁨이 줄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산안을 누비고 다니는 기쁨은 더 커졌는지도 모르겠다. “성산안”이라고 부른 일출봉 분화구는 또 하나의 성산포였다. 둥그런 모습의 성산안은 뾰족뾰족 봉우리가 솟아 있어서 마치 커다란 왕관 모습 같았다. 할머니는 “성산안 봉우리가 백 개가 되시민 호랭이가 살아실 건디, 하나 모자란 아흔아홉 개밖에 안 되어 부렀져.” 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일출봉에 호랑이가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일출봉 꼭대기에 올라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힌 뒤 가파른 길을 미끄러지듯 성산안으로 내려갔다. 실제로 여러 번 미끄러지기도 했다. 반대편 끝까지 간 다음 시계 방향으로 돌며 혹시 새알 같은 게 있지나 않은지 살펴보기도 하면서 봉우리들을 하나하나 순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당시 유행하던 “아부지, 돌 굴러가유.” 하는 소리를 목청껏 지르며 봉우리들 사이의 낭떠러지 아래로 괜히 돌을 굴려 보기도 했다. 절벽 아래로 파란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일출봉 꼭대기에서 바람을 맞으며 성산안을 내려다보는 일이 좋았다. 한참을 바라보아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촐베기가 끝난 가을이면 이발을 한 듯 산뜻한 모습이 너무도 시원해 보였다. 반대편 끝까지 뱀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고, 그 길 3분의 1쯤 되는 곳에서 왼쪽으로 뻗어나간 길도 또렷이 보였다. 그 두 길 중간에 소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었다. 소나무를 바라보다 보면 어디 아득히 먼 옛날, 아니면 아득히 먼 어떤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때 일출봉에 불어오는 바람에는 풀 냄새가 섞인 듯했다.

일출봉 꼭대기 바람이 유난히 시원하게 느껴지던 날, 하산 길에 땀을 뻘뻘 흘리며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배낭을 메고 일출봉을 오르던 젊은 서양 사람을 만났다. 뒤에는 큼직한 물통을 짊어진 아저씨가 따라오고 있었다. 나중에 소문을 들으니 어떤 미국 사람이 성산안에 무슨 우주기지를 세운다고 했다. ‘우주기지’라는 말에 어린 가슴이 설레었다. 일출봉 분위기와 너무나도 딱 떨어지는 말처럼 들렸다. 일출봉 뒤편으로 펼쳐진 망망대해와 우주기지. 하지만 그런 기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성산안에 지었던 건물이 벼락에 맞아 망가지고 미국 사람도 떠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설마 하며 성산안에 올라가보니 반대쪽 끄트머리에 작은 오두막집을 지었던 자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진짜로 벼락을 맞았는지 자세히 흔적을 확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호텔이 들어서며 불길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호텔에 묵었던 젊은 여자가 호텔 옆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자살을 했다는 얘기가 퍼졌다. 우뭇개와 오정개 바닷가 사이, 소섬과 바로 마주보는 곳이었다. 너무 가파르고 외진 곳이라 낚시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드나들던 곳이었다. 급히 뛰어가 보니 어른들과 아이들이 바위투성이 바닷가 이곳저곳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시체는 이미 치워간 것 같았다. “너, 시체 본 적 이시냐? 절대 보지 마라. 난 삼 일 동안 밥도 한 숟갈 못 먹었져.” 하는 동네 형 말을 이미 들은 적이 있어, 시체를 보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도 이런 일은 몇 번 더 있었다. 그리고 3학년이 되었을 때 즈음엔 공짜로 서울 구경 가는 행사는 없어져 버렸다.

호텔에는 한 번 정도 들어가 본 것 같다. 큰아버지를 따라 2층에 있는 커피숍을 가보았다. 호텔 복도에는 빨간 천이 깔려 있었는데, 숨이 약간 막힐 듯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2층 커피숍 넓은 창으로 일출봉이 훤히 보였다.

그 뒤 한참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 때였던가, 일출봉 호텔 대신 일출봉 여관 간판이 내걸려 있었다. 2층 커피숍 자리에는 마을 해녀 아주머니들이 운영하는 식당인 ‘해녀의 집’이 들어서 있었다. 예전의 당당한 모습은 간 데 없고 페인트칠도 색이 바래 있었다. 수영장은 진작부터 폐쇄되었다고 했다. 그날따라 불어오는 바람의 소금기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그 뒤로 일출봉에 거의 가지 못했다.

결혼할 즈음 아내와 함께 성산포에 인사차 갔을 때, 해녀의 집에 들렀다. 낯익은 동네 아주머니가 “영애 아들 아니냐?” 하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게웃(전복 내장)과 전복을 잔뜩 넣은 전복죽을 실컷 얻어먹었다. 해초의 맛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게웃으로 끓여낸 초록색 진짜배기 제주도 전복죽이었다.

이번 달 하순에 제주도로 가는 일정이 잡혔다. 이번에는 일출봉에 꼭 들러 보리라. 삼촌에게 서울에 여행 갔을 때 있었던 일도 다시 한 번 여쭤보고 싶다. 일출봉 호텔, 아니 일출봉 여관은 진작 철거되었다는데, 온전히 되돌아온 치맛자락의 모습이 너무도 보고 싶다. 이번 방문에 일출봉은 어떤 바람으로 맞아 줄는지.

글_임영근

부산에서 태어나 여섯 살쯤에 부모님 고향인 성산포로 옮겨가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주시로 이사가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육지’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학생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고, 졸업한 뒤에는 출판 편집자로 일했다. 현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고양시 인문학 모임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시사 월간지, <시대> ‘서양철학산책’, ‘이 책 저 책 읽으며’ 코너에 에세이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 산문집 '일출봉에서 부는 바람'을 출간했다. 이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의사이자 사진작가인 김수오 선생 작품과 함께 격주 목요일 제주투데이에서 게재한다. 어렸을 때 성산포와 제주시에서 자란 일이 글쓰기에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제주다움을 담기 위해 산야를 누비는 김수오 한의사

사진_김수오

제주 노형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수오 씨는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한의학에 매료된 늦깍이 한의사다. 연어처럼 고향으로 회귀해 점차 사라져가는 제주의 풍광을 사진에 담고 있다. 낮에는 환자들을 진맥(診脈)하고 출퇴근 전후 이슬을 적시며 산야를 누빈다. 그대로가 아름다운 제주다움을 진맥(眞脈)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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