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궂은 비날씨에도 제주4·3평화공원 행불인 묘역에는 그리운 이름을 찾아나선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사진=김재훈 기자)
지난해 4월 3일, 궂은 비날씨에도 제주4·3평화공원 행불인 묘역에는 그리운 이름을 찾아나선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사진=김재훈 기자)

최근 4·3 특별법 개정의 성과로 4·3유족들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닐지라도 보상을 받게 되었다. 올해 편성된 예산이 대강 1800억원이라 하니 1800여 명은 올해 보상금을 받게 될 것이다. 고령자 유족이 우선될 것이라 본다. 친정어머니는 올해부터 진행될 보상을 앞두고 고민이 많다.

어머니는 4·3 때 고아가 되었다. 외할머니는 경찰서 유치장 창살 빗물에 고문에 허갈난 목 축이며 “우리 족은년(작은딸) 어떵허코(어떡하냐)…” 하다가 돌아가셨다. 당시 12살이던 ‘족은년’ 어머니는 지금 스물네 명으로 늘어난 자손의 안위를 걱정하며 산다. 

어머니의 오빠, 나의 외삼촌은 대구형무소에서 돌아가셨다. 당시 외삼촌에게는 두살배기 아들이 있었지만 4·3 후 외숙모가 재가하며 같이 호적을 벗어났고 청년이 된 외삼촌 아들은 일본으로 밀항을 갔다. 

일본여성과 결혼하여 귀화했다는 소문을 들은 어머니가 수소문해보았지만 이제는 생사를 모른다. 평생 안 외가 제사. 명절을 나누어 하던 유일한 혈육 이모도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유일하게 남은 형제인 어머니가 보상을 받게 된다. 어머니는 해마다 4월 3일이 되면 빙떡과 제주 한 병을 들고 제주4·3평화공원을 찾는다.  

“목숨 걸고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 덕에 우리 오빠가 의젓하게 비석하고 눕게 되었져, 벌초 걱정도 안하고…”
 
지금 어머니는 오빠 목숨값을 자신이 받기를 원치 않는다. 모진 세월 참고 감수해 온 친정집 아들 노릇이 보상금의 출현으로 자칫 외가 쪽 남은 친지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건 사람이라 믿으며 살았던 70여 년의 삶. 그런 마음으로 유지된 외사촌 조카들과의 관계를 혹여라도 흠집 내고 싶지 않다는 속내도 내비치신다. 

살면서 돈 앞에서는 여러 이해관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들고 결국은 돈도 잃고 사람도 잃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기부를 하고 싶어 하신다. 

4·3이 배·보상으로 끝날 일은 아니므로 외삼촌 보상금만큼은 아직 해결되지 못한 4·3에 씨앗 돈이 될 수 있으면 하신다. 이왕이면 유족들의 기부금으로 만들어지는 공적 단체나 기구가 있으면 더 좋겠다는 것이다.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미리 약 먹고 죽어사주(죽어야지). 4·3은 아직 반도 해결 안 됐져, 이제 시작일거여.”
 
최근 한 학술대회에서 고성만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4·3의 남은 과제를 우리 모두에게 조심스럽게 묻고 있다. 

“2021년 개정법을 토대로 추진하게 될 보상금 지급은 그 가운데서도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 만을 대상으로 한다. ‘보상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희생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그 점에서 법 개정 이후의 과거청산의 시야가 편협해질 가능성이 더 커졌다. 희생자’와 비-희생자 간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고착화될 것으로 보이며, 대통령이 예고한 ‘제주의 봄’의 온기는 평등하지 않게, 다르게 전파될 가능성이 커졌다.” 
 -2022년 1월21일 제주대 70주년 학술세미나 발표문에서 인용

보상이 시작되면 긴 세월 묵은 감정과 얽힌 관계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서울 등지에 흩어져 사는 4·3유족 증언 인터뷰를 하면서 4·3의 고통은 유전되어 2세, 3세까지도 잠재적 피해자로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만난 유족들 중에는 70여 년의 한을 위로하는 보상금이 4·3을 화해와 상생을 통한 평화 인권의 길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음을 걱정하는 분도 있었다. 

4·3은 정명을 갖지 못한 채 아직 백비로 누워있고, 많은 4·3 유족들은 아직도 ‘무자년 난리’ 또는 ‘4·3 사건’이라고 부른다. 4·3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것은 제주사회가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사정이 있다. 

4·3 70주년을 기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겨우 ‘사건’이라는 이름을 떼고 그냥 ‘4·3’으로 부르고 있다. 7년이 넘는, 항쟁의 정신을 덮고도 남을 군경 학살의 시기에 나의 외가도 몰살되다시피 했다. 유족들의 4·3 기억 속에는 무장대에 의한 제주도민의 고통이 아로새겨 있다. 

친정어머니는 묏자리를 아직 정하지 못한 상주의 심정으로 있다. 하늘 같던 당신 오빠의 목숨값을 편안한 마음으로 맡길 수 있는 곳을 찾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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