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2-07-05 12:36 (화)
어머니의 사랑, 목화솜이불
상태바
어머니의 사랑, 목화솜이불
  • 강나루
  • 승인 2022.02.16 14:01
  • 댓글 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병출 할머니(한경면 저지리·87세)에게 듣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주도연합에서 제주농업기술원의 후원으로 제주도 토종종자 실태조사와 심층인터뷰를 통해 《삼춘들의 씨앗 주머니속 이야기》를 발간했다. 인터뷰에 참여한 강나루 작가가 책자에 다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칼럼으로 전한다. 강나루 작가는 '일상의 씨앗들' 저자로 설치미술을 비롯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강 작가는 자신을 '씨앗매개자'라고 소개한다.<편집자 주>

(사진=강나루 제공)
목화솜(사진=강나루 제공)

“우리 큰 똘은 이제 하나 줄여도 육십, 그 담은 오십여덟, 막내가 이제 마흔넷인데 스물여섯에 시집갈 때 똘들 다 목화 이불해줜. 이불집에서 껍데기영 사다강 거기당 맡기면 비싸니까 집에서 만들엄쩌.”

토종 씨앗을 심고 가꾼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씨앗을 이어온 세월의 역사와 문화가 어르신들의 삶과 그 씨앗에 함께 담겨 이어졌음을 느낀다.

미리 약속되었던 한림읍 금악의 씨앗 할머니께서 치과 치료로 말씀 나누기 어려워지게 된 상황이라 그 아래 한경면 저지리에 살고 계신 조병출 어르신을 만났다. 말끔하게 정돈된 잔디 조경이 멋진 양옥집 한 켠 아스팔트 마당에서 널따랗게 펼쳐 말려둔 깨를 털고 계시던 할머니께 씨를 받아 지은 농사를 여쭙다가 딸 시집보낼 때 이불 만들었던 목화솜 농사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개방농정 아래 토종목화 농업도 쇠퇴했고 수입 목화가 대거 들어온 상황에 우리의 토종목화 이불은 집 안방 장농에 대를 이어 내려온 게 아니고서야 요즘 시장에서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토종목화가 사라지면서 옛날 솜틀집들도 문을 닫았다. 

“면네도 하영 우리 딸네 시집갈 때 다 이불해주고, 면네 농사할 땐 베어당 물레영 호꼬만 거 하나씩 태워강 마대자리로 고산 가서 태우고 한림 강 태우고 옹포도 강 태우고 그랬는데 이제 한림은 어서” 

제주도는 고유의 독특한 문화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결혼 풍습이다. 이젠 달라진 모습도 많지만 가문잔치라 하여 결혼 하루 전날에 결혼식보다 더 성대한 마을 잔치를 연다. 이틀 전에는 도새기 잡는 날이라 해서 잔치에 쓸 돼지를 잡아 그 날부터 돼지고기에 술 한 잔씩 하고 윷판을 벌려 놀다 가기도 했고, 도감이라고 고기 써는 사람도 있었는데 집에서 직접 도축이 금지된 이제는 외부에서 주문해 오기 때문에 그런 모습은 보기 힘들다.

더 오래된 그 옛날 제주에는 결혼식 날까지 도새기를 잡는 날, 남자들이 바다에서 간수를 떠오고 여자들은 집에서 콩을 삶아 두부 만드는 날, 마을 사람들 다 모이는 가문잔칫날, 그리고 마지막 결혼식 날까지 모두 닷새 동안 잔치가 열렸는데 그 중 첫 번째 날이 바로 이불 만드는 날이라 했다.

제주에서 정확히 언제쯤부터 어떤 계기로 집마다 목화 농사를 짓고 딸들 시집보낼 때 솜틀집에서 목화솜을 태워와 이불을 만들어 보냈는지 이제는 단편적 기록들에서 찾아보기도 쉽지는 않지만 아직 만날 수 있는 어르신들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에서 그 시절의 목화 농사짓는 일상과 생활 문화를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목화씨 산파할 땐 재 담아강 오줌 싼 거 썩은 오줌 막 부벼 버무려 뿌려. 그러고 검질 멜 때 두 개 붙은 거 하나 띠고, 좀 커가민 음력 7월쯤에 우 막고 음력 10월에서 11월에 솜 피면 타오고 하얗게 피면 또 타오고 말리고 물레에 발르고 푸대에 담아 나눴다가 태우러 갔지.”

(사진=강나루 제공)
제주도립미술관 <우리 시대에>전 중 '씨앗감각'. 토종 목화에서 씨앗을 관람객이 직접 분리해 보는 경험을 제공하는 설치 작품. 강나루 作(사진=강나루 제공)

목화 꽃이 피고 솜들이 빵빵해 져서 그 안에 여물은 씨들을 골라내면 씨 겉에 솜들이 붙어 있는데 이것이 씨앗의 발아를 방해한다고 한다. 목화 씨앗에 황산을 문질러 씨에 붙은 털을 녹여내고 물로 씻어 포트에 심어 싹을 틔운 후 땅으로 옮겨 심어 키웠다는 스님을 보았는데, 조병출 할머니의 썩은 오줌이라는 게 목화씨의 발아를 도우려 묵혀 둔 소변을 사용했다는 말이다. 오줌은 받아 두었다가 한동안 시간이 지나 발효되면 밭에 훌륭한 액비가 되어 주기 때문에 아무래도 화학적인 황산처리보다야 자연스러운 방법이지 않을까 어르신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우리 농업 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에 처음 들여온 목화가 임진왜란 전까지 융성기를 이루고 조선 말기에는 쇠퇴의 길을 걷다가 일본에 의해 강력한 면화 재배 정책이 이루어졌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농업에 관심을 가졌던 주요 분야 중 하나가 일본방적공업의 원료획득을 목표로 한 목화재배였다고 한다. 

“아이고 그 지긋지긋한 거. 그 안에 영 버렝이도 기어 나오고 밤에 아기들 귀에 기어들면 죽기도 하영 그거. 목화씨 그냥 벳겨 불쥬게. 버려불켄. 다 버려써.”

할머니는 연신 지긋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직접 농사지은 목화로 이불을 지으려면 웬만큼의 정성으로는 부족했을 텐데. 그때 대충 어느 정도였나 양을 여쭤보니 못 해도 열두 근씩은 필요했다고 한다.

“그때 일 년이나 밭 갈아도 이불 못해영. 이슬쯤에강 마다리 가져강 따오당 밤에 까고 막 마니 하지 못해영. 글케 헌 2, 3년 메어다강 했쥬게.” 

이제야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지만 그렇게 씨앗을 심고 가꿔서 겨울마다 씨 갈무리하고 다음 해 봄부터 또 일 년을 반복하고 이렇게 적어도 2년에서 3년은 꼬박 농사를 지어야 이불 한 채가 나왔다는 이야기니까 그 정성이 정말 대단하다. 그 정성에 감탄을 반복하며 잔디 벤치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멀리 보이는 언덕에 하우스와 그 너머까지 함께 집 뒤로 밭 구경을 나섰다. 

끝이 안 보일만큼 넓은 땅에 언덕을 오르니 귤나무들과 천혜향 하우스가 있고 조금씩 나무 없는 땅에는 고구마도 심어 있고, 아직 베지 않은 깨들도 많이 보였다. 이렇게 넓은데 오르막길 걸어 다니기 힘들지 않으시냐 여쭤보니 이제 다리도 아프고 힘들다 말씀하시는데 작물들이 잘 자라고 있는 걸 보면 할머니는 어제도 그제도 매일이 넓은 땅을 돌보며 사시는 것 같았다. 

“인제 중국 아니민 몬살아. 녹비 들여 검질 메고 미깡 털어내고 다 해. 이젠 막 아들이 힘든 거 못하게 하지. 우리 땅이 삼만 평인데 다 팔아 불고 자식 다 줘 불고 여기는 8천평이야.”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농촌 인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국인 근로자가 급감했고, 인건비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지만 그마저 원하는 만큼의 인력을 구하기도 어렵다는 최근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렇게 일정 규모를 넘어가는 자급 이상의 농사를 이어간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어르신은 이 땅에서 시어머니, 시아버지 모시고 살다가 이제 땅은 자식들도 많이 나눠주고 건물 지어 팔기도 하고 지금은 족은 아들네와 함께 살고 계셨다. 

“미깡낭이랑 유채, 조, 보리, 콩 그거만 했쥬게. 유채도 결혼할 때부터 60년이 됬었지. 유채하영 불려놩 차때기로 보내 몇마다리 팔고 벌이하려 농협에다강 팔고. 미깡낭 과수로 바뀌면서 보리도 30년 전 수매할 때까지 짓다가 조 같은 거랑 같이 이젠 다 치워부렀지.”

이 동네도 제주의 다른 곳처럼 한 50년 전부터 주 농사가 과수로 바뀌면서 나머지 주업으로 하던 보리 같은 것들은 부업이 되었고, 농협의 수매가 어려워질 때 그 농사도 끊어진 셈이다. 그나마 꼭 담가 먹는 된장이나 많이 쓰이는 깨 같은 씨는 식구들이 계속 찾고 집에서 날마다 먹으니 안 끊기고 이어질 수 있었다. 

“깨도 호꼼 갈아. 이거 나 어릴 때 친정어머니 때부터 심은 그 깨라. 기름 짜 먹고, 볶아도 먹고 경 햇쥬. 콩도 하고 유도 하고 기름 짜고 뼈 달인 때도 넣고 유죽은 어릴 때부터 해 먹었지. 고구마도 오일장 사당 호꼼 심궈. 검은콩도 호꼼 심그고, 퍼런 거 메주콩도 심그고, 폿도 호꼼 하고 다 여러 가지 해. 나 장 담으면 우리 조근 딸네가 어머니 담은 장 먹으면 사온 장 못 먹겐, 막 하영 담아 놔둡써. 배워서 할 껀데. 배워야지. 사온 장은 못 먹켄. 간장도 3년 묵은 거야.”

조병출할머니의 토종 음식, 유죽(들깨죽) 만드는 법 

후라이팬에 유 쪼꼼 올려 그네 너무 볶아 불면 써 못 먹어.
믹서기에 골아 채로 껍데기 걸러서 곱게 나온 그 물에 죽 써. 
쌀 씨쳐놩 아무 쌀 놔도 맛조아. 옛날엔 산디 하영 오꼼 하영 카락카락 했쥬게. 

이제 뭐든 다 호꼼(조금)만 심는다는 어르신의 오래된 팥 씨앗도 그나마 작년 제주도의 기록적으로 최장 폭우였던 여름 장마에 다 잃어버리셨단다.

지구 평균 기온이 1℃ 상승할 때마다 장마 강수량은 약 2~4% 정도 증가할 수 있다는 연구를 보면서 이렇게 이 땅에 토착화되어 자랐다는 씨앗도 못 이겨내는 걸 보면 기후 위기와 사라지는 토종 씨를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동안에 꺼 폿들은 작년 비에 다 썩어부런. 붉은폿 오일장 가서 한 되에 3만원 주고 사와당 심었지.” 그렇게 할머니네 집의 오래된 붉은 팥은 사라졌다. 

집을 떠나기 전 할머니는 목화이불을 보고 싶다는 말을 지나치지 않고 기억해 안방 장롱에 보관중이던 빳빳하게 풀을 먹인 양단 목화 솜이불을 꺼내어 보여 주셨다. 

“막 오래됐어. 나 시집 올 때니 막 60년도 넘었지.” 

1956년, 스물한 살 때 월림에서 저지리로 시집 온 조병출 어르신은 이제 팔십 일곱의 할머니가 되었다. 딸들 시집 보낼 때 이불 만들려 심어 가꾸던 목화 씨는 십몇 년 전에 막내딸 혼수를 마지막으로 끊어졌고, 오래전부터 심어 먹던 붉은 팥 씨도 작년 여름폭우에 다 썩었다. 이제는 그렇게 하나씩 다 사라져 버렸지만 장롱 속 고이 넣어둔 목화솜 이불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 세월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강나루 작가(사진=강나루 제공)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5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2-02-17 12:18:10
토종씨앗의 귀함
돈보다 귀한, 돈과 삶을 창조하고 사랑을 덮어주는
어머니가 지은 목화솜 이불은 글을 읽는 제게도 뜨끈한
사랑과 희망을 전해줍니다.
제주여성농민회, 삼춘들~ 고맙습니다.! 화이팅

목화솜 2022-02-17 11:01:48
친구가 목화씨앗을 줘서 씨앗에 하얀부분을 제거 했는데도ㅠ 발아가 되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조병출 할머니께서 썩은 오줌으로 씨앗 발아를 하셨다는 내용을 보고 그런걸 어떻게 아셨는지 어르신의 경험과 지혜를 알게 된 것 같아요
제주도의 결혼 전통을 알 게 되어 좋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주신 목화솜이불을 받은 딸은 기쁘면서 어머니를 생각할 것 같아요
점점 토종씨앗이 사라지고 있다고하는데 강나루 작가님의 작업이 지금 시대에 큰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보리 2022-02-17 00:32:49
2014년에 제주에 계시는 친구 할머니께서 ‘너 장가갈때 주려고 했는데..’하시면서 친구에게 주신 이불이 목화이불이었어요. 친구 자취방에서 그 목화 이불을 덮어 자면서 부드럽고 포근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농촌에는 점점 사람이 줄고, 대부분 해외에서 수입해오고, 농사를 짓기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목화솜의 포근함을 우리는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요. 도시에 살면서 목화이불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떠한 순간에도 씨앗을 지키며 일했을 농부들을 떠올린 적이 없었어요. 쌀이나 다른 작물들을 보면서도 말이죠. 제주로 이주해 살면서 땅이 보이고 농부들이 보였어요. 자주는 아니어도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를 상상 하기도 해요. 저는 오래도록 목화이불의 포근함을 기억하고 싶어졌어요.

Kim 2022-02-16 18:35:50
목화솜에서 씨앗을 분리하는 거였군요. 모르고 예전에 목화이불을 덮어왔네요.

토종 2022-02-16 17:54:42
오늘 날이 추운데.. 목화솜 같은 느낌을 주는 글이네요. 비에 잃어버린 팥 씨앗이 너무 아깝지만 이렇게 기록으로 이야기들을 볼 수 있으니 아예 잃어버린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요.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