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白砒)
4·3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白砒). (사진=제주투데이DB)

“4·3이 뭔데?”

갑작스런 친구의 질문에 “제주도에서 예전에 엄청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은 건데…”라고 답했다. 수년 동안 4·3과 관련된 취재를 하고 책을 읽고 강연을 들었던 일이 무색해지던 순간이었다. 

너무나 처절하고 참혹했기에 제주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제주4·3. 70년이 넘게 지났지만 이 역사는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갖지 못했다. 백비는 여전히 침묵한 채 누워있다. 

이름을 가진다는 것. 단순히 몇 글자를 새겨넣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나아가서 미래 세대가 이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정하는 일이다. 역사를 대하는 태도를 정하는 일이다. 

이름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이에겐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웠던 역사이고, 또 어떤 이에겐 동포와 갈라지지 않길 원했던 염원이고, 어떤 이에겐 3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군경에 무참히 살해당했던 역사다. 또 어떤 이에겐 무장을 한 무리들이 경찰서를 습격한 역사이고, 어떤 이에겐 시대적 상황에 의해 일어난 사회 문제일 뿐이다. 

4·3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고 있느냐에 따라 불리는 이름은 제각각이다. 민중항쟁, 통일운동, 학살, 사건, 폭동….

백비에 적힌 ‘4·3민중항쟁’은 오랜 시간 제 이름을 못 찾고 4·3‘사건’이라 축소돼 불려온 역사에 바른 이름을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지난 2018년 3월31일 백비에 적힌 ‘4·3민중항쟁’은 오랜 시간 제 이름을 못 찾고 4·3‘사건’이라 축소돼 불려온 역사에 바른 이름을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사진=제주투데이DB)

법률상에선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덧붙여진 말들을 빼면 ‘희생당한 사건’이 남는다. 주체가 배제되고 맥락이 제거됐다. 

당시 시간과 공간이 부여하는 입체성이 사라지니 4·3이라는 역사가 가진 본질도 묻힌다. 특히 해방 이후 한반도처럼 혼란스러웠던 정세에서 맥락이 잘려나간 역사는 수많은 진실을 숨긴다. 4·3은 그저 “제주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은 안타까운 사건”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정부의 기준에 따라 결정한 ‘희생자’에 대한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것만으로 정치인들이 “완전한 해결”이라는 무책임한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4월3일 무장봉기를 일으킨 이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 이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과 제주라는 공간의 상황은 어땠는가. 이를 바라보는 민심은 어땠는가. 제주도민은 그저 무고하게 희생당한 수동적인 주체였는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당시 군경은 왜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는가. 

4·3이 발발하게 된 계기가 됐던 3·1절 발포사건 당시 기마경찰이 시위 현장에 있었던 이유가 단순한 시위 통제 목적이 아닌 당시 미 군정장관이 이동하기 위한 길을 트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림=강요배作)
4·3이 발발하게 된 계기가 됐던 3·1절 발포사건 당시 기마경찰이 시위 현장에 있었던 이유가 단순한 시위 통제 목적이 아닌 당시 미 군정장관이 이동하기 위한 길을 트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림=강요배作)

#가려진 역사, 3·10총파업

4·3이란 역사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기 위해선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4·3특별법상 ‘4·3사건’의 정의에서 “1947년 3월1일”과 무장봉기가 일어난 “1948년 4월3일” 사이에 가려진 역사적 사건, ‘3·10총파업’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3월1일 경찰이 총격을 가해 민간인 6명이 목숨을 잃는 발포사건이 일어났다. 3·1절 기념집회가 열렸던 제주북국민학교 인근 관덕정 앞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있었는데 경관이 아무 조치 없이 가버리자 이를 지켜보던 관중들이 돌을 던지는 등 야유를 하며 따라갔다. 이를 경찰서를 공격하는 것이라 오인한 보초 경관들이 군중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이 사태에 대해 경찰이 공개사과를 한다거나 피해에 대해 책임지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제주사회 여론은 악화됐다. 이 상황에서 좌익세력을 중심으로 사상자 구호금 모금 활동과 발포사건에 대해 항의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독립신보 1947년 3월16일자 지면에 '제주총파업 확대'라는 제목의 기사(붉은 상자)가 실려있다. (사진=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독립신보 1947년 3월16일자 지면에 '제주총파업 확대'라는 제목의 기사(붉은 상자)가 실려있다. (사진=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이는 아흐레 뒤 한국에서 전무후무한 총파업으로 이어진다. 3월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각 직장마다 3·1사건 투쟁위원회가 결성돼 파업에 돌입했다. 각급 학교 교사와 학생, 은행,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의 관리자와 노동자, 미군정청 통역까지 참여하는 민관 합동의 대파업이었다. (<4·3은 말한다 1권> 299쪽)

1990년에 발간된 <제주경찰사>에선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모든 기관 단체가 총파업을 실시, 그 숫자는 166개 기관 단체에 4만1211명이 참여했다고 밝히고 있다.(<4.3은 말한다 1권> 301쪽)

파업에 나선 민중과 노동자들은 미군과 경찰을 상대로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이 흐름을 심상치 않게 여겼던 미군은 미군조사단을 꾸려 현지 조사까지 벌였지만 조사 결과는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미군조사단이 떠난 뒤 당시 경찰 총수였던 조병옥 미군정청 경무부장이 제주에 왔다. 직후 제주엔 육지로부터 응원경찰 400여명이 급파됐다. 또 3·1절 행사를 주도했던 민전본부 간부 구속 및 파업 중이던 직장 간부들을 연행하는 등 무더기 검거 열풍이 일었다. 검거 명령 사흘 만에 검거된 사람 수가 200명이 넘을 정도였다. 

이 같은 강경 대응에 같은 달 16일부터 일부 관공서들이 파업을 풀고 근무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4·3은 말한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이에 대해 “불씨를 안은 채 파업 사태가 해제”됐으며 “꿰매진 ‘봉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3·1발포사건에서 3·10총파업까지 미군정이 이에 대응하는 일련의 과정은 억지로 꿰맨 봉합인 셈이었다. 제주 사람들이 가졌던 외부세력의 권력 남용에 대한 ‘반감’과 해방 이후 민족·민중자치적인 새로운 체제에 대한 ‘열망’(박찬식, 1947년 3·1사건의 역사적 성격)이 물리력에 제압당한 사건이었다. 

꺼지지 않은 불씨는 그렇게 다음 해 4월3일 무장봉기로 이어진다. 또 3·10총파업을 거치며 미군정이 제주를 “빨갱이 섬”으로 낙인을 찍어 4·3 당시 자행된 무차별 학살을 야기하는 계기가 됐다. 

10일 오후 제주시청 앞에서 열린 3·10총파업 대회. (사진=박성인 발행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제주지역본부, 전국공무원노조제주본부, 전국교직원노조제주지부, 제주민예총,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제주본부, 노동자역사한내제주위원회, 제주민중연대 등이 10일 오후 7시 제주시청 민원실 앞에서 ‘제주3·10 총파업 75주년 기념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박성인 발행인)

#왜 3·10총파업인가

제주투데이는 올해 ‘가려진 역사’인 ‘3·10총파업’을 중심으로 4·3의 역사를 재구성하려 한다. 

‘파업’이란 건 노동자들이 주체로 나섰다는 걸 의미한다. ‘주체의 관점에서 바라본 4·3’은 지금까지 ‘희생자 중심의 4·3’을 입체적인 역사로 구성해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또 노동자들이 투쟁 방식으로 ‘파업’을 선택했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아울러 민과 관이, 노동자와 민중이, 연대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3·10총파업을 전통 시대 제주도 민란과 항일운동의 전통을 이은 민중운동의 계승으로 바라보고 4·3과 대학살 이후 제주사회의 민중운동과 사회운동이 단절된 데 대한 성찰도 이뤄질 것이다. 또 외부 침략에 저항하는 자치·자율운동과 분단을 거부한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도 짚어볼 예정이다. 

조사 연구 기간은 이달부터 올해까지며 3·10총파업과 관련한 문헌자료를 수집·분석하고 도내 12개 읍면별(조천·구좌·성산·표선·남원·서귀·중문·안덕·대정·한림·애월·제주) 현지 조사 방식으로 진행한다. 관련 생존자와 유족, 지인 등을 만나 구술을 채록하고 영상으로 기록하는 작업도 병행한다. 

제주투데이는 조사 결과를 1개 면당 1~2회, 제주읍 3~4회 등 매달 두 차례씩 모두 20여차례  연재할 예정이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오는 10월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내년 보고서 또는 단행본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조사·연구팀은 박찬식 제주문화진흥재단 이사장이 팀장을 맡고 조사·집필 담당 연구원에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 박성인 제주투데이 대표,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장, 조수진 제주투데이 기자(가나다순), 영상·삽화 등 기록 담당 연구원에 양동규 작가(영상), 김영화 작가(삽화)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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