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공기. (사진=한국민속대백과사전)
밥 한 공기. (사진=한국민속대백과사전)

“선생님! 햇살을 받고 자라는 햇양파, 햇사과는 ‘햇-’이라고 쓰는데 햅쌀은 왜 ‘햅-’이에요?” 학생 시절 국어와 수학을 가르쳤던 선생님이 ‘햇-’은 ‘당해에 난’의 뜻을 가진 접두사인데 쌀과 결합할 땐 햅쌀이 된다며, 말에는 공식이 없으니 무조건 외우라고 했다. 

그 의문은 송나라 사신 손목이 지은 ≪계림유사≫에서 풀렸다. 손목은 353개의 고려 말 발음을 한자로 적으면서 동시에 소리 나는 ‘ㅂㅅ’을 두 음절로 나누어 ‘보살(菩薩)’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쌀’은 ㅆ+ㅏ+ㄹ이 아니라 ㅄ+ㅏ+ㄹ’이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메+쌀→멥쌀’, ‘조+쌀→ 좁쌀’ 에서도 ‘ㅂ’음이 살아나는 것이다.

쌀과 밥은 순우리말이고, 시공간적으로 변이를 겪지 않아 방언조차 없다. 그만큼 우리 민족에게는 보편적이며, 늘 함께 해서 다른 말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는 뜻이다. 백의민족이라 불리는 우리민족은 더 이상 흰옷을 입지 않지만 여전히 쌀로 지은 밥이 주식이다. 쌀은 발음상으로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우리민족에게는 보살과 같은 존재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하루 삼시세끼가 당연해 보이지만 18세기말까지는 아침과 저녁 두 끼가 일반적이었다. 점심을 뜻하는 우리말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참고로 점심(點心)은 마음에 점을 찍듯 적게 먹는 간식을 의미하는 한자어다. 

정조 때의 검서관 이덕무의 ≪양엽기≫도 ‘보통 사람은 조석 이식으로 한 끼 5홉씩 하루 한 되를 먹는데 큰 남자는 7홉을 먹고 아이는 3홉을 먹는다.’고 전한다. 하루 두 끼를 먹으니 당연히 대식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프랑스 엽서에 실린 조선인의 밥상 사진만 봐도 밥그릇의 크기는 왜소한 남자의 얼굴만 하다. 조선시대에 한 홉은 약 60㎖이므로 한 끼에 쌀 300㎖을 먹었다는 말이다. 밥으로 환산하면 660㎖나 되는 양으로 밥그릇도 클 수밖에 없었다. 

논 자료사진. (사진=제주투데이DB)
논 자료사진. (사진=제주투데이DB)

도자기 제조업체인 ‘젠한국’에 따르면 1960년대 560㎖이였던 밥공기는 1976년 390㎖로 줄었고, 2013년부터는 190㎖로 굳어졌다고 한다. 어떤 요술이 있었기에 최근 40여 년 동안 밥그릇이 370㎖나 줄어들었을까? 

산업화·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1970년대부터 외식이 일반화되었고, 식당들은 공짜로 퍼주는 밥으로 경쟁을 하였다.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 개발·보급과 혼·분식 장려로 식량자급에 매진하며 ‘이밥에 고깃국’을 먹게 해준다는 북한과 체제경쟁을 벌이던 박정희 정권에게 밥 양이 늘어나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서울시는 1974년 음식점에서의 솥 밥 판매를 금지하고 공깃밥만을 팔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하였고, 1976년에는 공기의 규격을 지름 10.5cm, 높이 6cm로 정하고, 밥은 4/5만 담도록 하여 이를 어기면 영업정지 등의 행정처분을 하였다. 

1980년에는 행정명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고, 밥을 반 공기 이상 줄때는 밥값을 별도로 받도록 하였다. 그 때부터 ‘빈 그릇’이란 뜻을 지닌 공기(空器)는 스테인리스강 밥그릇을 의미하게 되었고, 식당에서 밥값을 별도로 받는 관행이 생겨났다.     

한편 식생활의 서구화로 1인당 육류소비량이 1979년 11.3kg에서 2021년 54.3kg으로 증가하고, 쌀 소비량은 1979년 135kg에서 2021년 56.9kg까지 떨어져 ‘밥 힘으로 산다.’는 말은 유물이 되었다. 

예전엔 밥이 원래 집에서 식구가 함께 먹는 식사이기에 ‘집밥’이란 단어가 없었다. 그런데 식구가 줄어들고, 식구가 모여서 밥을 먹지 못하면서 ‘혼밥’이 일상화되었고, 그 반대말로 집밥이란 단어가 소환되었다. 부모세대는 혼밥하는 자식들을 짠하게 바라본다. 

그들에게 혼밥은 식구의 해체이자 밥상머리교육의 실종을 상징한다. 하지만 자식세대는 혼밥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즐기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혼밥은 자기가 메뉴를 선택하여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여유롭게 즐기는 식사를 의미한다.  

MBC 예능 프로그램 '나혼자산다'에선 1인가구가 '혼밥'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사진=MBC 화면 갈무리)
MBC 예능 프로그램 '나혼자산다'에선 1인가구가 '혼밥'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사진=MBC 화면 갈무리)

구차해 보일지 모르지만 밥은 곧 삶이다. 그래서 밥값을 하기 위해 밥벌이를 하고, 밥줄을 잃을까봐 밥그릇싸움을 한다. “밥은 드셨습니까?”란 인사로 안부를 묻고, “밥이나 한 번 먹자.”는 말로 관계를 튼다. 남은 찬밥을 따로 드시는 어머니에게 딸은 애정이 묻은 타박을 하고,  “밥은 먹고 다니나?”는 어머니의 전화 소리에 집 나온 아들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어릴 적 입맛은 나이가 들어도 몸에 각인되어 있다. 어른이 되면 어릴 때 그렇게 싫었던 콩잎과 콩국이 그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아이들의 입맛이 밥과 김치보다 햄버거와 피자에 길들여지고 있다. 그럴수록 육류와 밀가루 수입은 더 늘어날 것이고, 쌀과 채소 등의 소비는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농업은 더 쪼그라들 것이고, 기후위기가 닥치면 그래도 세계 최악의 식량자급률을 지닌 우리나라에서는 요소수와 같이 식량품귀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식문화가 바뀌고 있다. 거리두기로 가정 내 식사 횟수는 증가했지만 직접 장을 보고 식재료를 조리하여 차린 ‘집밥’은 사라지고 있다. 대신 가정간편식(HMR), 밀키트, 건강기능식, 배달음식이 식탁을 점령하고 있다. 집밥의 쇠퇴는 맞벌이, 1인가구, MZ세대의 증가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집밥을 차리는 비용도 재료비와 가사노동시간을 고려하면 외식비용보다 비싸다. 그래서 필수 혼수품에 밥통은 제외되고 에어프라이어가 추가되었다. 

밥은 사유재로 취급된다. 그러나 사실은 있을 때는 모르지만 없으면 살 수 없는 공기처럼 부족하게 되면 국가 구성원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공공재이다.

밥의 위상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고기협.
고기협.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꾼다. ‘말랑농업’은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글이다. 격주 화요일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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