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후 31일 오후 제주4·3연구소는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제주4·3 74주년 증언본풀이 마당 스물한 번째로 ‘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를 열었다. (사진=조수진 기자)
31일 오후 제주4·3연구소는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제주4·3 74주년 증언본풀이 마당 스물한 번째로 ‘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를 열었다. 사진은 함복순 할머니(왼쪽). (사진=조수진 기자)

“누군지도 모르는 유골함에 손을 넣으니까 손이 뜨뜻해져. 그때 ‘아, 오라방이구나’했지. 살아서도, 죽어서도, 갇혀 지내느라 답답했을 건데 이제 넓은 바다에서 훨훨 다니십서 했지요.”

함복순 할머니(1943년생·제주시 구좌읍 종달리)가 여섯 살이던 해. 어느 날부턴가 밤이면 집에 낯선 사람들이 자꾸 찾아왔다. 그러자 어머니는 오빠에게 집 천장 위 지붕 아래 좁은 공간에 숨어지내라고 이른다. 그리고 자신에겐 ‘오빠가 여기 숨어있다는 걸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한다. 

어느 날엔가 창고에서도, 지붕 아래서도 오빠를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세화지서에 가서 아들을 찾아달라고 했다가 죽도록 매를 맞은 채 마당에 버려졌다. 어머니는 밥 하는 것도 잊고 아들을 찾으러 다니다 “도피자 가족”이라며 세화지서에 끌려갔다. 그리고 1948년 12월4일 상도리 연두망에서 학살을 당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오빠의 아들은 이름도 갖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31일 오후 제주4·3연구소는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제주4·3 74주년 증언본풀이 마당 스물한 번째로 ‘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를 열었다. 

이날 본풀이에선 함 할머니와 같이 다랑쉬굴에서 학살 당한 피해자의 가족들이 저마다의 비극을 풀어냈다. 

“나무 허래도 가고 또 고사리도 꺽으래 가고 그렇게 해도 오빠 시체가 그디 신(거기 있는) 줄도 모르고 생각도 안 헌거라예. 아이고, 우리 오빠가 그디 이서난(거기 있던) 걸 나가 몰라졌구나(몰랐구나).” 

함 할머니는 지난 1992년 다랑쉬굴에서 오빠 유해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믿기지 않았다. 오빠가 수십 년 묻혀있던 그곳은 함 할머니가 자주 다녔던 곳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살았다. 

굴 속에서 발견된 유골들이 칠성판 앞에 놓인 걸 보고 함 할머니는 그렇게 서럽게 울었다. “오빠는 나를 알아볼 텐데, 나는 누가 오빠인지 몰라서”였다. 다음 달인 5월 함 할머니는 화장한 유골을 김녕 앞바다에 뿌리려 뼛가루에 손을 쑥 넣었는데 손이 따뜻해졌다고 한다. 함 할머니는 ‘오빠가 나를 알아보는구나. 이게 오빠가 맞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 할머니는 이제 “폭도”가 아닌 “희생자”라 불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어진다고 말한다. 그 생각에 누우면 눈물밖에 안 난다. 그의 남은 바람은 위령비가 세워져 오빠의 영을 기리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함 할머니는 “돈 이제 필요없젠. 명예만 바꿔주켄하면 죽어도 한이 없져.”라고 답했다. 

31일 오후 31일 오후 제주4·3연구소는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제주4·3 74주년 증언본풀이 마당 스물한 번째로 ‘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를 열었다. (사진=조수진 기자)
31일 오후 31일 오후 제주4·3연구소는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제주4·3 74주년 증언본풀이 마당 스물한 번째로 ‘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를 열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금 제일 후회 해지는 게 화장을 한 거…. 지금 같으면 우리가 화장을 안하지요. 어림없지요. 그때는 우리 유가족이 힘이 없었어요.”

고관선 할아버지(1947년생·경남 양산)는 다랑쉬굴 희생자 고태원(당시 26세)씨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산으로 도망가자 할아버지 고봉규(당시 48세), 할머니 김두천(당시 51세), 삼촌 고태정(당시 15세)이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1948년 12월21일 종달리 공회당에서 학살을 당했다. 증조할아버지 고계돌(당시 66세)씨도 세화지서에 갇혔다가 1949년 2월10일 지서 인근 밭에서 총살 당했다. 어머니와 고 할아버지는 완도에서 살고 있을 때라 목숨을 건졌다. 

고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작은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어디 가서 싸우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처음엔 그 이유를 잘 몰랐다. 그런데 중학생 때 다른 아이와 싸운 일이 있었는데 상대방 아버지가 오더니 동네 사람들한테 자신을 “이 산폭도 빨갱이 새끼”라 부르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때 서야 싸우지 말라던 잔소리를 이해하게 됐다. 책 잡힐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이 ‘폭도의 자식’이라며 손가락질을 했기 때문이다. 이후 고 할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고 결국 제주를 떠나 부산에서 터를 잡고 생활했다. 하지만 제주를 떠나도 연좌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본인은 해군 시험에 합격하고도 취소 처리가 돼 입대하지 못했다. 

사관학교 시험을 보겠다는 큰아들을 공업 고등학교에 가서 기술을 배우라고 만류해야 했다. 큰아들은 말리는 이유를 듣고 본인 앞에서 펑펑 울었다. 축구 선수였던 둘째 아들은 프로구단에 입단하고 올림픽 대표까지 했지만 중국으로 진출하려고 하자 연좌제에 걸려 발이 묶였다. 

“다랑쉬굴에서 유해가 발굴됐다고 신문에 터져 나오고... 아버지가 거기 같이 있다니까 그거 알고 얼마나 울었던지, 밤새 울어수다.”

고 할아버지는 지난 1992년 다랑쉬굴 유해에서 아버지를 찾았으나 땅에 묻을 뼛가루 한 줌을 남기지 못하고 바다에 뿌렸다. 결국 아버지 묘는 헛봉분했고 화장할 때 썼던 항아리를 어머니 묘 옆에 같이 모셨다. 

31일 오후 제주4·3연구소는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제주4·3 74주년 증언본풀이 마당 스물한 번째로 ‘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를 열었다. 사진은 이공수 할아버지. (사진=조수진 기자)
31일 오후 제주4·3연구소는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제주4·3 74주년 증언본풀이 마당 스물한 번째로 ‘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를 열었다. 사진은 이공수 할아버지. (사진=조수진 기자)

이공수 할아버지(1937년생·제주시 구좌읍 하도리)는 4·3희생자인 이재돈(당시 19세)씨와 8촌간이다. 이재돈씨 가족은 모두 절멸했으며 이중 일부는 다랑쉬굴에서 학살 당했다. 이 할아버지는 이제라도 다랑쉬굴 부근에 희생자를 위로하는 비석이라도 세워주길 바라고 있다. 

이날 증언본풀이엔 허영선 제주4·3연구소 소장과 오화선 자료실장, 김은희 연구실장 등이 대담자로 참여해 증언을 도왔다. 

한편 다랑쉬굴은 지난 1948년 12월18일 토벌대가 굴 속에 숨어지내던 사람들을 연기로 질식시켜 집단학살한 곳이다. 희생자 중엔 열 살짜리 어린아이도 포함됐다. 

지난 1991년 제주4·3연구소는 종달리 다랑쉬굴에 유해가 묻혀있는 걸 발견, 이듬해인 1992년 유해 발굴 작업이 이뤄져 시신 11구가 수습됐다.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유해는 모두 13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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