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오후 제주시 조천읍 조천초등학교. 운동장 한켠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달 29일 오후 제주시 조천읍 조천초등학교. 운동장 한켠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나한테 패스해!” “오른쪽 막아!”

지난달 29일 오후 얇은 바람막이 점퍼가 덥게 느껴질 정도로 봄 햇볕이 따뜻한 날이었다. 제주시 조천읍 조천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선 편을 갈라 연두 조끼와 주황 조끼를 입은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공을 따라 뛰어가며 서로 자기에게 공을 달라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경쾌했다. 

100년도 더 전에 세워진 이 학교는 제주에서 가장 뜨거웠던 곳 중 하나다. 조천면(지금의 조천읍)은 일제강점기 제주 항일운동의 요람이며 해방 이후 미군정을 비롯한 공권력에 저항하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던 지역이다. 조천 주민들이 모여 독립과 자주를 외쳤던 곳이 바로 이곳 조천초등학교다. 

지난달 제주투데이가 3·10총파업을 중심으로 4·3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꾸린 조사·연구팀(팀장 박찬식)은 첫 조사 대상지로 조천면을 선정했다. 이 지역은 해방 이후 제주 정치사회를 주도한 인물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조천국민학교 운동장 5000여명 모여

1947년 전국적으로 ‘3·1기념 준비위원회’가 결성됐고 제주에도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가 조직됐다. 각 읍·면별로 인민위원회·민주청년동맹·부녀동맹과 각종 단체 및 직장 대표자로 꾸려졌다. 준비위원회는 각 면 단위로 기념식을 열되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지역은 제주북국민학교(지금의 북초등학교·이하 북교)에 모여 대대적으로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조천초등학교에 전시된 1946년 조천국민학교 졸업사진. (사진=조수진 기자)
조천초등학교에 전시된 1946년 조천국민학교 졸업사진. (사진=조수진 기자)

관련 판결문 등에 따르면 조천지역엔 1947년 2월 초순 김시탁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조천면위원장과 김민식 남로당 선전부장 등이 3·1기념행사 개최와 관련해 논의했다. 같은 달 26일 조천중학원에서 김시범 조천면장을 비롯한 면내 관공서와 주민, 유지 등이 모여 3·1기념투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조천면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에는 김시범, 부위원장 김유환, 총무부장 김시택, 조직부장 홍순협, 선전부장 이좌구 등이 선임됐다(제주4·3평화재단 주최 ‘제주4·3아카이브 특별전’에 전시된 ‘3·1사건 체계도’. 2021년). 

3월1일. 조천면의 동쪽 끝 마을 북촌리에선 오전 7시쯤부터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200여명이 모였다. 함덕국민학교에선 함덕리 학생·청년과 선흘리 주민 50여명이 합류해 조천국민학교로 향했다. 신흥리에서도 민주청년동맹 40여명이 3·1기념식을 준비하고 참가했다. 와산·와흘·교래·대흘리에서도 산발적으로 조천국민학교로 모여들었다(제주4·3연구소 '3·1의 길을 걷다, 조천읍' 자료집. 2017년). 

오전 10시. 조천면민 약 5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조천국민학교 운동장에서 기념식이 열렸다(위와 같은 자료집). 체계도에 따르면 김유환 부위원장이 사회를 맡고 김시범 위원장과 김시택 총무부장의 연설, 김유환 부위원장의 독립선언문 낭독, 김시범 위원장의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됐다. 

#“나라를 위해서 집회에 간 거지”

기념식이 끝나고 조천면 주민 2000여명은 북교에서 열리는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제주읍내로 향했다. 이들은 오후 2시쯤 북교에 도착해 대회에 참가했다(위와 같은 자료집). 이날 제주도대회는 “3·1 정신을 계승해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취지로 진행됐다(안세훈 3·1기념 투쟁 제주도위원회 위원장 개회사).

4일 오전 제주투데이 18주년 창간 기획 《제투, 길을 걷다》의 첫 번째 답사 프로그램 ‘제주시 원도심, 어디까지 알고 있니?’가 진행되고 있다. 제주북초등학교. (사진=박소희 기자)
 제주북초등학교. (사진=박소희 기자)

이날 집회에 대비하기 위해 군정경찰은 비상경계에 돌입했다. 무장한 경관들은 동문교와 한천교, 서문교 등 성안으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배치돼 출입자들을 일일이 검문했다. 조천·신촌·화북 등 동쪽 마을에서 올라간 주민들은 경찰의 경계선을 뚫고 동문통으로 들어갔다(<4·3은 말한다> 1권).   

일부 청년과 학생들은 행사 전날 밤에 미리 모여 북교로 가기도 했다. 조천중학원 1학년생 20여명은 2월28일 조천중학원 앞에서 모여 다른 청년들과 함께 대흘국민학교로 갔다. 이들은 이곳에 모인 함덕리 청년들과 함께 밤을 새운 뒤 다음 날 새벽 와흘리와 삼양리를 거쳐 오전 10시쯤 북교에 도착했다(양희순 생전 증언).

당시 조천중학원을 다녔던 강두봉씨는 생전 증언을 통해 “중학원 학생들 전부 짐차 한 대를 불러서 타고 갔다”며 “올 때는 자기대로 걸어서 왔다. 갈 때만 차를 타고 갔다”고 기억했다. 

강씨의 증언에서 당시 청년들이 기념집회에 참석하려 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나라를 위해서 한 거지, 폭동을 일으키려는 생각은 없었다”며 “경찰에서 잡아가면 고문당하고 하니까”라고 말했다. 30여 년 만에 되찾은 우리나라의 ‘진정한 자주 독립’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날 오후 2시50분쯤. 관덕정 광장에선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사전 김태호 주사 김사호 창교 기념비. (사진=박찬식)
사전 김태호 주사 김사호 창교 기념비. (사진=박찬식)

전문가와 한뼘 더 들어가기

※조천초등학교 역사

조천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옛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그 중에 눈길이 가는 비석은 <사전(舍田) 김태호 주사 김사호 창교(創校) 기념비>이다. 1928년에 세운 이 비석을 보면, 1910년 망국 때 조천에 개량서당인 신명(新明)사숙을 세워서 운영하던 김태호와 김사호가 1920년에 조천공립보통학교 설립운동을 주도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김사호와 김태호는 인척 사이다. 김태호는 조천초등학교의 산실인 신명사숙의 숙장을 지냈으며, 1924년 조천면장을 역임했다. 독립운동가 김시용의 부친이다. 김사호는 1921년 8월에 신명사숙이 조천공립보통학교로 전환 인가될 때 자신의 소유 토지(당시 지가 2천원)를 기부했다(『매일신보』 1921. 8. 13). 독립운동가 김시황의 부친이다.

신명사숙 생도들은 1919년 3월 조천만세운동이 전개될 때 만세시위에 대거 참여했다. 이러한 민족적 열기를 담아서 조천면 주민들은 보통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했고, 결국 1921년 6월 설립 인가를 받아 1922년 11월 조천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다. 1931년과 1932년에 연이어 재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전개되었고, 졸업생들은 제주도내 항일운동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는 조천 비석거리, 오일장터, 미밋동산 등이었다. 조천보통학교가 신작로에 들어선 이후 학교 운동장은 주민들이 모이는 광장이 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대회, 3월 11일부터 14일까지 발포사건에 항의하는 면민대회 및 집회 또한 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조천국민학교 교장인 강경준(서귀면 보목리 출신), 교사 김문숙, 문노석, 김석환(1949년 군법회의 사형) 등이 구속되어 미군정 재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은 것도 조천초등학교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대목이다.

 

박찬식 제주문화진흥재단 이사장 

 

 

제주투데이는 올해 3·1발포사건 및 3·10총파업과 관련한 문헌자료를 수집·분석하고 도내 12개 읍면별 현지 조사를 진행, 결과를 20여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공동 기획했으며 조사·연구팀은 박찬식 제주문화진흥재단 이사장이 팀장을 맡고 조사·집필 담당 연구원에 강호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 박성인 제주투데이 대표,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장, 조수진 제주투데이 기자, 영상·삽화 등 기록 담당 연구원에 김영화 작가, 양동규 작가가 참여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