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수오)
(사진=김수오)

곤밥이 먹고 싶었다. 배불리 먹고 싶었다. 쌀이 귀한 제주도에서 흰 쌀로 지은 곤밥을 먹는 일은 흔치 않았다. 엉겨붙어 떡이 되어버린 조팝을 한 끼라도 먹어본 사람이라면 곤밥이 얼마나 간절해지는지 알 수 있다. 곤밥이라면 간장 한 종지만 있어도 한 끼 뚝딱 먹을 수 있겠다고 할머니도 가끔 말씀하셨다. 사과도 먹고 싶었다. 반쪽이나 반에 반쪽이 아니라, 나 혼자서, 마음껏, 사과 하나를 온전히 먹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도새기 고기 한 점. 그 한 점이 먹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잔칫날이었다. 잔치 집에 가는 것을 “잔치 먹으러 간다”고 했다.

잔치는 도새기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마당에 천막이 쳐지고 멍석이 깔렸다. 저마다 한 짐씩 그릇과 쟁반 따위를 싸들고 모여든 동네 아주머니들로 부엌이 부산해졌다. 그 즈음에 마당 한켠에 시커먼 도새기 한 마리가 네 발이 꽁꽁 묶인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평소의 표정 없는 모습과 달리 어린애처럼 웃고 떠드는 동네 아저씨들이 낯설어 보였다. 도새기 잡기를 놀이처럼 즐기는 듯했다. 어린 마음에 끔찍한 그 모습을 외면해 보지만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무엇인지 그때 알았다.

큰 다라이에 피를 받고, 내장을 꺼내고, 제주식 순대인 수애를 만든다. 돼지 피에 별다른 재료 없이 쌀만 듬성듬성 박혀 있다. 구수하고 진한 돼지 피 맛이 얇은 돼지 내장의 쫄깃한 식감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돼지 피의 진한 맛 때문에 많이 먹지는 못했다. 

몸뚱이는 털을 그슬린 뒤 가마솥에 삶기 시작한다. 거기에다 중간에 뼈도 넣고 수애와 내장도 넣으며 국물을 우려낸다. 이렇게 여러 재료를 차례로 넣으며 우려낸 국물에 마지막으로 넣는 것이 몸이다. 육지에서는 모자반이라고 부르는 몸을 넣어 끓이면서 비로소 몸국이 완성된다. 돼지 뼈 우려낸 국물 맛에 돼지기름 맛이 섞이고 여기에다 내장과 수애에서 나온 작은 알갱이들도 가득 들어 있다. 여기에 넣은 몸은 느끼한 맛을 빨아들인다. 몸을 씹을수록 시원한 맛이 우러났다. 하지만 수애처럼 몸국도 외지인이 먹기에는 진입장벽이 높은 음식이다. 나도 한참 큰 뒤에야 참맛을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된 뒤에 서울 친구들과 함께 몸국을 먹은 적이 있는데, 맛있다며 두 그릇을 비운 친구가 있는가 하면, 한 입 떠먹고 입도 대지 못하는 친구도 있었다.
삶아낸 도새기 고기 편육은 간장에 찍어 먹었다. 잔칫상마다 간장을 넣은 잔이 놓였다. 대폿잔을 절반으로 축소해 놓은 듯한 투박한 잔이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써온 물건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잔이었다. 어른들은 소주도 이 잔으로 마셨다. 기름진 삼겹살이나 흐물거리고 한약 냄새나는 육지의 보쌈고기와 달리, 도새기 고기는 담백하고 살이 단단하다. 소금에 찍어도 소금이 잘 묻지 않는다. 간장에 살짝 찍어 먹어야 제 맛이다.

둘째 날이 가문 잔칫날이다. 셋째 날에 진행되는 결혼 예식은 다들 요식적인 행사로 여겼다. 가문 잔치가 열리는 날이 진짜 잔칫날이다. 곳곳에서 잔치 먹으러 왔다. 저마다 역할을 맡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다. 아침 먹고 나가 놀고, 점심 먹고 나가 놀고……. 그렇게 실컷 놀고 들어와 또 곤밥에 도새기 고기를 먹었다. 

몇 년 전 동남아시아의 원시 부족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며 제주도를 떠올렸다. 돼지 사냥과 돼지고기로 축제를 벌이는 원시 부족의 모습은 제주도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축제에도 일상에도 도새기가 늘 있었다. 성산포에는 도새기를 기르는 집이 많았다. 마당 뒤켠에 돌담을 쌓고 바닥에는 보릿짚을 깔았다. 비를 피하고 잠을 잘 수 있도록 한쪽 구석에 지붕이 있는 침실도 마련해 주었다. 대부분 한 집에 한 마리만 키웠기 때문에 요즘의 공장식 축사에 비하면 모텔 급은 될 정도였다. 

다른 한 쪽에 돌담으로 꽤 높은 단을 세우고, 거기서 사람들이 일을 본다. 이곳이 통시이다. 출입문은 따로 없다. 제주도 집 마당에서 올레까지 나가는 길이 바람을 끌어안아 안온한 곳이 되도록 만들어졌듯이, 통시도 바람을 끌어안되 폐쇄되어 답답한 공간이 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현기영 선생님은 바람 솔솔 통하는 통시에 앉아 일을 보던 순간을 대자연을 느끼는 시간이라고 썼다. 

도새기는 사람이 오는 낌새를 눈치 채고 미리 와서 기다린다. 그런 다음 깨끗이 처리해 준다. 그래서 통시에서는 냄새가 그리 심하게 나지 않았다.
도새기는 뒤처리만 잘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잘 먹었다. 집안의 남은 음식은 다 도새기가 먹어치웠다. 특히 수박껍질을 잘 먹었다. 온 식구가 모여 먹고 남긴 수박껍질을 가져다주면 그 딱딱한 것을 무른 양갱을 먹듯이 야무지게 먹어치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나도 수박껍질을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당에 걸어놓은 가마솥에서 몸국이 끓고 있는 잔칫집에는 특별한 공간이 하나 있었다. 임시로 지은 작은 방이었다. 

잔칫집에 온 동네 사람들 중에는 “게난 오늘 도감이 누게라? 고기 참 잘 썰어신게.” 하고 묻는 사람이 흔히 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잔치집의 도감이 누구냐, 고기 맛이 참 좋은 걸 보니 예사 분이 아닌 듯하다.” 이런 화제를 던지는 것이다. 잡은 돼지를 삶는 일에서부터 고기를 부위별로 나누어 써는 일까지 모두 도감 아저씨가 도맡아 했다. 살코기와 비계가 적당히 섞여 고기 맛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자잘한 찌끄레기가 남지 않도록 요령껏 고기를 다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고기가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여러 조각이 나오도록 바트게 썰고 넉넉하다 싶으면 조금 후하게 써는 기술쯤은 기본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아늑한 작은 방을 훔쳐보면, 잔칫집이 떠들썩해질수록 고기 써는 속도도 빨라졌다. 도감 아저씨는 이따금 이마와 콧등에 맺힌 땀을 훔칠 뿐 짬 없이 고기를 썰었다. 고기를 썰고 양은 접시에 담고 또 고기를 썰고 양은 접시에 담고……. 연필을 깎아내듯 썰기도 하고 저며내듯 썰기도 하는데, 한 점 한 점 모양이 달라 보이기도 하고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잔칫집 아주머니가 간간히 도감 방에 들어가 의논을 한다. “손님들 하영 올 거 담수다. 도새기 한 마리 더 잡아사쿠다.” 도감 아저씨는 어떤 사람들이 다녀갔고 앞으로 올 사람이 누구인지 그 작은 방에서도 훤히 꿰고 있다. 손님들이 들고나는 속도와 고기가 나가는 속도를 가늠하여 언제 얼마의 고기를 마련해야 할지 가늠했다.

어느 잔칫집에선가, 빼꼼 열린 문으로 훔쳐보던 나를 부르던 큰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날 도감을 맡은 큰아버지는 썰던 고깃덩이를 밀쳐두고 고기 더미를 뒤지더니 새 덩이 하나를 꺼내들고 한입에 먹을 만큼 몇 점 썰어 내민다. “고기 맛이 다 같은 건 아니여. 이거 한 번 먹어보라.” 그때까지 먹어보지 못한 고기 맛이었다. 단단한 살코기도 아니고 무른 비계 맛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가 섞인 맛이라고나 할까? 고기를 맛있게 먹는 나를 바라보던 큰아버지의 그윽한 눈길을 잊을 수 없다.

어느 날인가, 성산포항으로 가는 길에 익숙한 비린내를 압도하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노린내가 섞인 데다 썩은 내까지 나서 여간 역겨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맡아보지 못한 냄새였다. 희멀건 서양 돼지, 배가 땅에 끌릴 정도로 살찐 서양 백돼지를 기르는 축사가 한둘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전부터 제주도에서는 토종 도새기의 종자를 되살리려는 힘겨운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제주시로 옮겨간 우리 집에서는 1970년대 말까지도 도새기를 길렀다. 물론 그때 우리가 살던 제주시 무근성 근처에 돼지 기르는 집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제주시에 돼지를 기르는 집이 있을 정도였으니, 시골에는 돼지 기르는 집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1980년대 중반까지 몇 년 사이에 도새기 기르던 집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 많은 토종 도새기들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금 치르는 힘겨운 노력은 그때 종자를 보존하지 못한 대가이다.  

그래도 가문잔치는 살아남았다. 마당에 천막도 멍석도 없고 식당이나 호텔에서 치르지만, 하루 내내 손님을 맞으며 음식을 대접한다. 도새기 고기를 직접 잡지는 않고 전문업체에서 공급해 주지만, 수애도 몸국도 먹을 수 있다. 온종일 손님들로 북적이는 호텔 식당의 가문잔치에서 도새기 고기 한 점 간장에 찍어 먹어보면 어릴 적 그 맛이 과연 되살아날까.

(사진=김수오)

 

글_임영근

부산에서 태어나 여섯 살쯤에 부모님 고향인 성산포로 옮겨가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주시로 이사가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육지’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학생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고, 졸업한 뒤에는 출판 편집자로 일했다. 현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고양시 인문학 모임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시사 월간지, <시대> ‘서양철학산책’, ‘이 책 저 책 읽으며’ 코너에 에세이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 산문집 '일출봉에서 부는 바람'을 출간했다. 이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의사이자 사진작가인 김수오 선생 작품과 함께 격주 목요일 제주투데이에서 게재한다. 어렸을 때 성산포와 제주시에서 자란 일이 글쓰기에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제주다움을 담기 위해 산야를 누비는 김수오 한의사

사진_김수오

제주 노형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수오 씨는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한의학에 매료된 늦깍이 한의사다. 연어처럼 고향으로 회귀해 점차 사라져가는 제주의 풍광을 사진에 담고 있다. 낮에는 환자들을 진맥(診脈)하고 출퇴근 전후 이슬을 적시며 산야를 누빈다. 그대로가 아름다운 제주다움을 진맥(眞脈)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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