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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난 사람들, 그리고 열두 그루의 벚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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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난 사람들, 그리고 열두 그루의 벚나무
  • 조수진 기자
  • 승인 2022.04.12 09: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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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제성마을 주민들은 잘려나간 벚나무에서 잔가지들을 화분에 심었다. (사진=낭싱그레가게2 제공)
지난 5일 제성마을 주민들은 잘려나간 벚나무에서 잔가지들을 화분에 심었다. (사진=낭싱그레가게2 제공)

“제일 돈 없는 사람들이 여기 왔대니까…. 그때는 여기 허허벌판에 아무것도 없어신게 신광부락에서 여기까지 수도관을 하려고 며칠을 땅을 팠어. 여자들은 목괭이로 돌을 파냈는데 어찌나 돌이 많아서 힘들었던지…. 괭이가 콱콱 박힐 때마다 울었어.”
-김병생 할머니(87)

최근 제주시 제성마을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40년이 된 벚나무 열두 그루를 제주시가 주민과 합의 없이 베어낸 것이다. 일주도로를 넓혀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주민들이 제주시청 앞까지 가서 거세게 항의하고 나섰다. 

연동에서 오일장으로 이어지는 일주도로 가로수로 있던 벚나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겐 매년 봄이면 짧게는 열흘에서 길게는 보름 정도 이어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 그뿐이다. 하지만 제성마을 주민들에겐 40년 전 터전에서 밀려나 새로운 터전을 일궈낸 역사였다. 

 

사라진 마을, 몰래물

무분별한 난개발, 차량 중심의 교통정책, 마을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한 행정…. 이번 벚나무 벌목을 통해 여러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벚나무가 심어진 배경, 제성마을이 생긴 배경에 대해선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제성마을 열두 그루의 벚나무는 ‘밀려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1941년 일제는 대륙침략과 태평양 전쟁을 획책하며 다끄네에서 몰래물에 이르는 곳에 육군 항공대 비행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비행장 부지에 포함된 마을사람들은 토지를 강제수용 당하며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정드르 마을의 경우는 120호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는데 비행장 부지의 한가운데에 자리했던 곳이라 모조리 쫓겨나며 완전히 사라졌다.”
-한진오 극작가, 제주작가 74호 <소개령은 끝나지 않았다> 중에서-

제성마을 주민들은 80년 전 사수동(몰레물)에서 신사수동(새몰레물)으로, 40년 전 다시 제성마을 자리로 쫓겨났다. 몰레물은 공항 활주로 때문에 사라졌고 신사수동은 인근에 도두 하수처리장이 생겨나며 많은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사진=낭싱그레가게2 제공)
제성마을 주민들은 80년 전 사수동(몰레물)에서 신사수동(새몰레물)으로, 40년 전 다시 제성마을 자리로 쫓겨났다. 몰레물은 공항 활주로 때문에 사라졌고 신사수동은 인근에 도두 하수처리장이 생겨나며 많은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사진=낭싱그레가게2 제공)

지금의 제주국제공항이 들어선 곳은 예전 ‘정드르’란 마을이 있던 곳이다. 한가운데 있는 넓은 들판이란 뜻의 이 마을은 120가구가 살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군사시설인 정드르 비행장이 들어서며 몰래물(구사수동)에 살던 주민들은 당시 커피 석 잔에서 여섯 잔 값(30전에서 60전)만 받고 쫓겨나야 했다(한진오, 위와 같은 글).

80년 전 하루아침에 말도 안 되는 보상을 받고 집과 밭을 빼앗긴 몰래물 주민들은 옆 마을로 밀려났다. 이곳이 지금의 신사수동이다. 하지만 이들은 40년 뒤 다시 쫓겨났다. 1961년 정드르 비행장에 제주공항이 들어섰고 1968년 제주국제공항으로 승격하며 세 차례에 걸친 확장공사가 진행됐다.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공항 부지에 속한 마을들은 완전히 사라지거나 남아있어도 마을이 토막 나서 옛 모습을 잃고 말았다. 고향을 잃고 흩어진 사람들이 1970년대에 ‘제성마을’, ‘신성마을’, ‘명신마을’, ‘동성마을’ 등을 만들어 공항 가까운 곳에 정착했으니 이들은 오늘날까지 비행기 이착륙 굉음에 파묻혀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망향가를 부르고 있다.”
-한진오 극작가, 위와 같은 글에서

제성마을 입구에 세워진 설촌 기념비. (사진=조수진 기자)
제성마을 입구에 세워진 설촌 기념비. (사진=조수진 기자)

 

"제일 돈 없는 사람들이 여기로 왔어."

지난 7일 낮 최고 기온이 영상 20도까지 올랐던 날 오후. 제성마을 김병생 할머니집을 찾았다. 마침 “우리 마을 기사가 신문에 나와서 읽어드리려고 왔다”는 오면신 전 제성마을회장(66)과 “오일장에 갔다가 찹쌀도너츠를 사왔다”며 들른 권재섭 할머니(88)도 함께 만날 수 있었다.

다들 도너츠 하나씩 손에 들고 40년 전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서로가 서로의 산 증인이었다. 때론 같이 웃다가, 때론 같이 눈물 지었다. 제성마을에서 김 할머니의, 권 할머니의, 오 전 회장의 이야기는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마을 공동체의, 그들의 이야기였다.  

1981년 신사수동에 살던 일부 주민들은 다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이중 16가구는 지금의 제성마을로 옮겨왔다. 당시 행정은 토지에 대한 보상만 지급했다. 밭을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그나마 ‘좋은 동네’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땅이 없거나 가진 밭이 몇 평도 채 되지 않던 사람들은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제일 돈 없는 사람”들이 이곳 제성마을로 모였다. 지금이야 제성마을이 있는 연동은 제주시에서도 가장 번화한 지역 중 하나지만 당시엔 수도관이나 하수관도 없는, 자갈만 많은 ‘못 쓰는’ 땅이었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하수관 벽을 만든다고 나 키만 한 땅 구덩이에 들어가서 시멘트를 발랐지요. 그때 장갑이나 있었나. 맨손으로 다 발랐지.” 

16가구 주민들은 직접 지금의 신광로터리 부근에서 마을까지 이어지는 수도관과 흘천으로 이어지는 하수관을 팠다. 돌과 자갈을 캐 집터를 쌓아 올렸다. 당시 마흔여섯이었던 김병생 할머니는 다섯 아이를 데리고 왔다. 남편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 7일 김병생 할머니가 "우리 동네가 최고야"를 외치며 엄지를 세우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7일 김병생 할머니가 "우리 동네가 최고야"를 외치며 엄지를 세우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김 할머니는 “남편이 있고 돈이 좀 있던 집들은 트럭으로 돌을 옮겨다 실었지만 나는 못그랬다”며 “어린 큰아들이 리어카 끌고 하면서 돌 주워 옮기고 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한 번은 태풍이 와 많은 비가 내렸다. 그날도 밤새 자갈과 돌을 주웠다. 빈손에 다섯 아이를 돌보며 집을 지었던 때를 떠올리니 “아이고, 말도 맙서”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지은 집에서 40년이 넘도록 살고 있다. 지금은 태풍이 와도 끄떡 없이 김 할머니를 지켜주는 공간이 됐다. 

 

"맨손으로 방수약품 바르다가 손껍질이 다 벗겨졌어."

“세멘(시멘트)이 묻은 손은 몇 달 지나면 지워지고 손이 다시 고와지는데. 방수약품은 어찌나 독하던지. 손껍질이 다 벗겨졌어.”

1981년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이 마을로 온 권재섭 할머니. 다른 가족들처럼 새몰레물(신사수동)에서 살다가 쫓겨났다. 권 할머니는 특히 수도관과 하수관을 설치할 때 방수처리가 가장 고생이었다고 한다. 당시 돌을 깨거나 상대적으로 힘을 많이 쓰는 작업은 남자들이 하고, 시멘트를 바르거나 방수약품을 바르는 작업은 보통 여자들이 했다. 

권 할머니는 방수약품이 독성이 강한 화학약품이라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고 한다. 물로 씻어내도 독이 오래 가서 피부가 다 벗겨질 정도였다. 그렇게 집들이 지어지고 마을이 제법 모습을 갖췄다. 동네 사람들은 직접 손으로 마을을 일군 기념으로 벚나무를 심었다. 권 할머니의 남편이 식목일 즈음해서 묘목을 구해왔다. 

지난 7일 만난 권재섭 할머니는 벚나무가 잘려 나간 뒤로 가슴팍이 칼에 베인 듯 아프다고 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7일 만난 권재섭 할머니는 벚나무가 잘려 나간 뒤로 가슴팍이 칼에 베인 듯 아프다고 했다. (사진=조수진 기자)

“저가 꽃을 좋아해요. 우리 남편이 생전에 자상해서 저가 좋아하는 걸 다 해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가 돌아가도(죽어도) 꽃 보면서 자기 생각하라고 심은 거 닮아(같아).”

어느 날 집밖에서 “와자작 와자작” 소리가 나길래 나가보니 커다란 포크레인이 벚나무를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권 할머니는 마치 자기 목이 잘려 나간 거 같았다고 말한다. 그 벚나무는 남편이 남기고 간 '유산'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그리울 때마다 찾았던 나무였다. 

나무가 뎅강 잘려 나가고 권 할머니는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다. 원통한 마음에 마을 주민과 협의 없이 나무 벌목을 동의해준 통장에게 “당신 집에 가서 내 목을 매겠다”고 울부짖기도 했다. 권 할머니는 지금도 가슴팍이 칼에 베인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그나마 권 할머니를 위로해주는 건 잘려나간 나무 밑동 옆으로 삐져나온 작은 가지에 핀 꽃이다. 그는 매일 이 가지를 바라보며 “에미는 죽어도 새끼는 사는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지난 7일 권재섭 할머니는 잘려 나간 벚나무 밑동 옆으로 삐져 나온 작은 가지에 핀 꽃을 보고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고 말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7일 권재섭 할머니는 잘려 나간 벚나무 밑동 옆으로 삐져 나온 작은 가지에 핀 꽃을 보고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고 말했다. (사진=조수진 기자)

 

"하천에 똥물이 내려오는데 어떻게 살겠어."

“하천에 똥물이 막 내려와. 동남풍이 불면 수박씨, 참외씨 이런 게, 찌꺼기가 참 많이 떠내려왔어. 그러니 살 수가 있나. 그 기억 때문에 지금도 수박이나 참외를 못 먹어.”

지난 5일 제성마을 노인회관에서 만난 이순실(95) 할머니는 도두 앞바다에서 물질을 하던 해녀였다. 흘캐(사수동 포구)에서 살다가 비행장이 들어선다고 해서 신사수동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도 물질을 하며 사는데 어느 날부턴가 음식물 찌꺼기가 떠내려오기 시작했다. 도두에 하수처리장이 들어선 것. 

이 할머니는 더 이상 '똥물'을 먹고 살 수 없어 가족들과 1985년 제성마을로 이주했다. 하지만 제성마을이 연동 행정구역으로 들어가자 도두리에서 물질을 못 하게 했다. 평생을 물질만 하면 살았던 이 할머니는 할 수 없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여기 와서 마음이 어땠겠어. 맨날 울면서 살았지.”

이 할머니는 밥도 많이 굶었다. 그 시절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었는데 그게 습관이 돼 지금도 점심을 안 먹고 산다. 고된 세월을 버텨온 이 할머니를 지켜봐 준 건 동네 사람들, 그리고 벚나무였다. 그 생각 때문에 잘려 나간 나무를 보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90이 훌쩍 넘은 고령을 걱정해 아들이 나서지 말라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다. 

지난 15일 포크레인이 벚나무를 내려찍는 모습. (사진=오면신 전 제성마을 회장 제공)
지난달 15일 포크레인이 벚나무를 내려찍는 모습. (사진=오면신 전 제성마을 회장 제공)

오면신 전 제성마을회장은 몰레물에서 나고 자랐다. 젊어선 서울에서 살다가 지난 2008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릴 때 숨바꼭질하고 물놀이를 했던 동네는 온 데 간 데 없고 그곳엔 끝이 어딘지도 모르게 길게 뻗은 활주로가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성마을에 터를 잡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여기 주민들과 함께 제성마을을 만든 거에 대해서 굉장히 뿌듯해했어요. 특히 요 앞 동네 길을 다른 동네하고 다르게 반듯하게 낸 걸 두고두고 자랑했지요.”

오 전 회장의 아버지는 40년 전 마을회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나서서 16가구가 살만한 곳을 찾아다니다 여기 제성마을을 선택한 것도 오 전 회장의 아버지였다. 아무런 기반 시설 없이 자갈만 많았던 이 동네를 번듯한 마을로 꾸린 데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벚나무를 함께 심었던 5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제성마을엔 설촌 기념으로 심은 벚나무 중 단 두 그루만 남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제성마을엔 설촌 기념으로 심은 벚나무 중 단 두 그루만 남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옆에서 듣던 김병생 할머니는 “이디(여기) 아버지가 터를 정말 잘 잡았마씸. 이 근방 마을 중에 우리 마을이 1등 아니우꽈”라고 엄지를 추켜세웠다. 오 전 회장은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벚나무를 볼 때마다 ‘너 아버지가 심은 거다’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황망하게 잘려 나간 벚나무는 주민들에겐 쫓겨난 설움과 고됨을 버텨낸 세월, 새로운 터전을 만든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40년 전 터전을 빼앗기고 변두리로 밀려난 주민들이 직접 손으로 일궈낸 제성마을. 이 마을은 몇 년 전에도 사라질 뻔한 위기가 있었다. 지난 2018년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공항 주변 지역 개발구상 및 기본계획 수립 용역’에 따라 개발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명 ‘웰컴시티’라 불렸던 이 개발사업은 공항 앞에 광역복합환승센터를 짓고 주변 지역에 주거·상업·문화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었다. 20~33층 주거 건물을 포함해 5000세대 규모의 주거 단지를 개발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제주공항주변 웰컴시티 및 광역복합환승센터 개발 반대대책위원회가 14일 오전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웰컴시티 전면 백지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사진 김관모 기자
지난 2018년 8월14일 제주공항주변 웰컴시티 및 광역복합환승센터 개발 반대대책위원회가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웰컴시티 전면 백지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제주투데이DB)

당시 오 전 회장은 환경단체와 함께 앞장서서 이 계획을 철회할 것을 촉구했었다. 웰컴시티 개발 계획에 반대하던 주민들과 도민들은 도의회에 전면 백지화 청원을 냈고 이 안건은 통과됐다. 지역사회의 반발이 거세게 일자 제주도는 결국 사실상 사업 포기를 결정했다. 

오 전 회장은 “그때 원희룡 (전) 지사가 여기를 벽촌이라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좋은 동네를…”이라며 말끝을 흐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한 번 와보지도 않은 이가 이 마을을 무시한 게 영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이야기를 끝내고 김병생 할머니집을 나서는데 나지막한 담장에 옹기종기 붙어있는 집들이 더욱 정겹게 보였다. 이날 유난히 눈부셨던 햇볕은 서로 다른 모양의 마당 모두를 골고루 비추고 있었다.  

40년 전 황무지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늑하고 포근했다. 이 풍경을 본다면 누가 감히 이 동네를 밀어버릴 생각을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밀려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면 누가 감히 벚나무를 베어버릴 생각을 했을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도저한 광풍을 피해 납작 엎드려 살아남은 마을들도 언제든 몰래물의 신세가 될 벼랑 끝에 서 있다. 강정마을이 제2의 몰래물이 되었고 소개령은 성산읍으로 번지고 있다. 70여년 전 피바람을 몰고 왔던 소개령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해 여전히 태풍의 눈이 살아있는 일기도를 그리며 어디에든 불어닥칠 기세다.”
-한진오 극작가, 위와 같은 글에서

이 봄,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잘려 나간 열두 그루의 벚나무 이야기는 제성마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제성마을 노인회관 마당 한켠에 작은 벚나무 가지들이 화분에 심겨있다. (사진=낭싱그레가게2 제공)
제성마을 노인회관 마당 한켠에 작은 벚나무 가지들이 화분에 심겨있다. (사진=낭싱그레가게2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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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물사연 2022-04-14 01:23:10
제성마을에 정착한 삼춘들의 애환의 세월,
글을 읽는 내내 울컥하고 눈물이 나네요.
반면 마을의 자부심이자 희망의 상징이었던 왕벚나무들을 베어버린 행정당국의 무책임한 일방적인 처사에 화가 치밀어옵니다.

부디
할머니 삼춘들 힘내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