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거문오름용암동굴계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지 15주년을 맞이한다. 제주도는 당시 세계자연보존연맹(IUCN)의 권고에 따라 세계자연유산 보존 및 활용을 위한 주민참여 방안을 마련하겠노라고 약속하며 ‘제주특별자치도 유네스코 등록유산 관리에 관한 조례’에도 명시했다. 하지만 정작 15년이 지난 지금, 지역주민들은 참여 주체로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할까? 선뜻 ‘예’라고 답하기 어렵다.

올해 들어 선흘2리 주민들과 마을에 위치한 세계자연유산본부의 관계는 시작부터 어긋나고 있다. 마을 주민의 대표인 이장으로서의 문제 제기가, 세계자연유산본부가 지역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나가야 할지 고민해보는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세계자연유산에 초대형 빔프로젝터와 버스킹까지?

수많은 별들이 빼곡한 한라산 중산간의 여름밤, 여러 대의 초대형 빔프로젝터가 거문오름에 직접 용암이 흘러넘치는 영상을 비춘다. 유산센터의 둥근 광장 벽면에는 10개의 빔프로젝와 고출력 3D 입체음향을 이용한 공연이 보는 이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15년간 철저하게 예약제로 통제해 오던 거문오름을 야간에도 탐방할 수 있고, 반딧불을 형상화한 홀로그램으로 장식한 탐방로 중간에 버스킹 공연까지 한다니. 

(사진=이상영 제공)
2022년 2월 24일. 미디어아트 사업을 위해 거문오름 숲에 야간에 초대형 프로젝터를 비춰보는 시연회 장면 (사진=이상영 제공)

#유산본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한 미디어아트 사업계획

그러나 사실 이 멋진(?) 계획은 지난해 제주세계자연유산본부가 성산일출봉에서 추진하다, 세계자연유산 및 멸종위기조류인 매의 서식처 파괴, 주민 피해 등이 우려되어 언론, 환경단체, 지역주민의 반대로 포기한 사업이다. 그런데 제주세계자연유산본부는 성산일출봉에서 추진하다 호된 비판을 받아 포기한 사업에 더해 야간탐방과 버스킹 계획까지 추가해서 올해 8월~10월 주말 30일 동안 거문오름에서 ‘세계자연유산 미디어아트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진=이상영 제공)
세계자연유산 미디어아트 사업계획(사진=이상영 제공)

유산본부가 계획한 사업 기간인 8월~10월은 세계자연보존연맹(IUCN)이 지정한 국제보호종 멸종위기 조류인 팔색조와 긴꼬리딱새 등이 거문오름을 찾아와 산란, 포란, 육추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 낮 동안에는 이미 거문오름국제트래킹, 세계자연유산축전도 진행된다. 여기에 더해 야간에 미디어아트 사업까지 진행된다면, 거문오름은 매일 밤낮으로 600명 이상의 관광객이 북적이게 되는 셈이다. 국제보호종 동·식물을 보호해야 할 세계자연유산본부가 세계자연유산 홍보를 이유로 밤낮으로 이들을 괴롭히다니... 게다가 유산본부 코앞에는 민가가 즐비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행사인지 묻고 싶을 뿐이다.

(사진=이상영 제공)
미디어아트 사업 관련 세계유산본부장과 마을 주민들의 간담회(사진=이상영 제공)

#2022년 3월, 미디어아트 사업 관련 세계유산본부장과 마을주민들의 면담

곧바로 마을 운영위원들과 주민들에게 이 행사계획을 알리고, 3월 4일 선흘2리 마을회는 유산본부장과의 면담에서 사업의 취소를 요구했다. 이미 배정된 예산(14억)을 어떻게 반납하냐며 행사취소는 어림없다던 유산본부는 행사 내내 센터 입구에서 피켓이라도 들겠다는 어르신들의 기세에 눌려 빛공해와 소음이 예상되는 야외 미디어행사는 취소하겠다고 알려왔다. 앞으로 추진될 계획이 결정되면 마을회에 알려달라고 요구하자, 담당 주무관은 야외 계획이 취소되었으니 알려 줄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공무원들에게 지역주민이란 겨우 이런 존재라는 것이 참 씁쓸하다. 

#세계자연유산본부와 세게자연유산마을협의회

그간 세계자연유산본부는 지역주민과의 소통을 위해 7개 세계자연유산마을 이장들로 구성된 협의회와 회의를 열어, 유산본부가 추진하는 사업에 대한 소개와 평가, 그리고 여러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해 왔다. 다행히 지난해에는 협의회가 수시로 열려 세계자연유산축전 추진상황과 평가, 유산마을과 협력 방안 등을 지속적으로 논의한 편이었다.

하지만 4월이 지나가고 있는 올해는 한 번도 협의회가 열리지 않았다. 형식적인 이 협의회라도 제대로 작동했다면 거문오름에다가 빛을 직접 쏴서 관광객에게 문화유산을 알리겠다는 어의 없는 행사 계획은 없었을 것이다. 세계자연유산본부장은 길게는 1년, 짧게는 6개월이면 자리를 옮긴다. 짧은 기간 참 많은 본부장들을 만났다. 공무원들에게 때깔 좋은 자리만 만들어주느라 정작 세계자연유산본부는 장기적인 비전도 없이 그때그때 이벤트성 행사에만 골몰한다.

#세계자연유산마을 신음에도 입 닫은 세계자연유산본부

세계자연유산 홈페이지에는 “세계유산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국제적으로 보호해야 유산”이라고 홍보한다. 그런데 인류에게 물려주어야 할 위대한 자연유산도 난개발로 결국파헤쳐지고 있다.

선흘2리는 거문오름 정상에 오르면 바로 보이는 곶자왈에 ㈜제주동물테마파크가 대규모 열대 맹수사파리를 추진해 3년이 넘도록 큰 갈등을 겪고 있고, 선흘1리도 동백동산 인근 자연체험파크 문제로 큰 논란이 일었다. 월정리도 하수처리장 문제로 지난해 연말부터 해녀들과 주민들이 시위를 이어가고 있으며 덕천리 곶자왈에는 국가위성통합센터 건설계획이 진행중이다.

선흘2리 주민들은 곶자왈 인근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개발과 숙박시설 등으로 지하수가 오염되면 하류 지역에 위치한 거문오름용암동굴계에 미치는 영향이 우려된다고 유산본부의 입장을 밝혀달라고 요구했었다. 물론 마을의 요구는 가볍게 무시당했고 국회의원실을 통한 질의에도 유산본부나 그 안에서 월급을 받는 전문가들은 어떤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관리 영역이 아니라는 입장만 영혼 없이 반복할 뿐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명색이 세계자연 유산을 지키고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세계자연유산 본부의 존재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도민으로서 정말 궁금해진다.

#난개발에 입 닫은 유산본부가 국립공원화에 입장을 분명히 한 이유

제주특별자치도와 환경부는 잘 보존된 제주의 자연을 지키기 위해 국립공원 확대 지정방안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었다. 오랫동안의 논란 끝에 지난해 거문오름용암동굴계 지역을 국립공원에 포함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거문오름세계자연유산 인근은 이미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고 사유지 매입이 거의 완료된 상태로 반발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사진=이상영 제공)
국립공원 확대 지정 관련 문서(사진=이상영 제공)

2021년 9월, 제주국립공원 확대지정 관련해 유산본부는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세계자연유산본부는 거문오름용암동굴계를 국립공원화 하는 것에 대해 제주특별자치도 환경정책과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가 국립공원화될 경우 관리 주체가 제주도에서 국가의 직접 관리로 넘어가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의견을 전달한 것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자기 조직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간 자연유산을 위협하는 인근 지역의 난개발에도 어떤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던 전례에 비춰보면 유산본부의 행태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세계자연유산본부가 자신들의 일자리와 근무 조건과 관련된 일에만 적극적으로 입장을 표명했으니, 세계자연유산 보호는 뒷전이라는 오해는 나만 생기는 것인지 묻고 싶다.

#시스템의 변화가 절실하다

해안을 중심으로 했던 제주의 개발바람이 이제는 세계자연유산을 턱밑까지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 유산본부는 전문가들과 함께 자연유산을 위협하는 난개발과 기후변화가 자연유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오랜기간 대대적인 정밀조사를 진행하여 구체적인 자료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산을 보존해야 하는 책임자로서 유산 보전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진=이상영 제공)
선흘2리에 위치한 세계자연유산본부 전경 (사진=이상영 제공)

또한 세계자연유산 보존과 활용과 관련해서 7개 세계자연유산마을과 지역주민들이 실질적인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현재의 유산본부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을 마을별 또는 권역별로 나누고, 인력지원을 포함한 실질적인 유산마을 지원책을 마련하는 노력은 어떨까 한다. 해마다 일회성 이벤트를 위해 뿌리는 수십억의 세금 중 일부만 투자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세계자연유산본부와 지역주민과의 협력이 지금에 이르게 된 원인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통해 시스템(조직)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세계자연유산과 지역주민은 사라지고 오직 철옹성 같은 공무원 조직과 화려한 건물만 덩그러니 남게 될 것이다. 이미 그러한 지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영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이상영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선흘2리 마을회장 이상영 씨는 '20년간 학교에서 지리와 사회를 가르치다 제주로 이주한 지 3년째인 초보 제주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2년 전에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이 된 후, 최근 이장으로 선출·임명되었다. 1973년생인 이상영 이장의 고군분투 마을공동체회복기를 매달 1회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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