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포에서 반딧불이를 보았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해는 지고 어둑어둑해진 어느 여름날, 나보다 한 살 위의 오촌 아저씨와 동네 친구들 몇 명이서 동쪽 바닷가 언덕으로 갔다. 언덕에서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노란색인지 옅은 연두색인지 초롱초롱 작은 불들이 온통 언덕을 뒤덮으며 날고 있었다. 같이 간 친구들이 “반딧불이다!” 하면서 소리쳤다. 세상에나 이렇게 예쁜 불빛이 있다니!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밤하늘에 노란 빛이 끝없이 춤을 췄다. 

그때는 성산포에 전기가 막 들어오기 시작한 때여서 해가 지면 금새 깜깜해졌다. 같이 간 오촌 아저씨네는 호롱불을 피우고 있었다. 표현이 좀 우습긴 하지만, 불빛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깜깜한 바닷가의 밤이라 반딧불이 더 환해 보였을 것이다.

성산포에 오기 전에도 이렇게 많은 불빛을 본 적이 있었다. 부산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자 아버지는 부산 시내를 구경시켜 주신다며 자갈치 시장 같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한창 시장 구경을 하다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이 끝날 것 같지 않게 끝없이 이어졌다. 용두산 공원이었다. 날은 벌써 어두워졌다. 공원에 오르니 수많은 빨간 불빛이 반짝거렸다. 불빛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야경, 참 멋있지?” 하며 몇 번이고 물으셨다. 

계단을 한참 오를 때도 멋있는 야경 보여주마 하며 조금만 참고 올라가자고 다독였던 것도 같다. 아예 시내 구경을 나설 때부터, “오늘은 용두산 공원 가서 부산 야경 꼭 구경시켜 줄게.” 이렇게 말씀하신 듯도 하다. 아버지는 용두산 공원 벤치에 앉아 제주도로 떠나면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열심히 봐 두라고 당부하며 한참 동안 부산 시내 불빛을 바라보셨다.

바닷가 언덕을 뒤덮은 불빛은 용두산 공원에서 바라본 불빛과 너무 달랐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내 앞으로 내려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옅은 연두색 불빛이 너무 곱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반딧불이를 잡으려고 불빛을 쫓아다녔다. 

용케 한 마리 잡아 살펴보니 꼬리 쪽에서 불이 나오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전등 불빛이 빛나듯이 더 선명하고 초롱하게 빛나리라 기대했는데 그런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영롱하게 빛난다기보다 환한 연두색 물감이 칠해진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냄새는 더 실망스러웠다. 만질수록 냄새가 심해져서 오래 붙잡아둘 수 없었다. 그렇게 날아간 녀석은 무리 속에 섞여 어느덧 사라졌다. 

반딧불이 무리는 여전히 노란 연두빛을 밝히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친구들과 함께 반딧불을 쫓으며 이리저리 달려도 힘든 줄 몰랐다. 언덕 아래 바닷가에서는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그날 오정개 바닷가 언덕은 반딧불이의 천국이었다.

사진=김수오

성산포에서 일출봉을 마주보고 서면, 오른쪽 바닷가가 수매밑이다. 일출봉의 깍아지른 절벽으로 만들어진 왼편 바닷가는 우뭇개라 불렀다. 우뭇개가 내려다보이는 일출봉 입구에서 멀리 소섬과 나란히 바다를 따라 마을 쪽으로 언덕이 쭉 이어져 흘러내려왔다. 그 언덕이 끝나는 곳에 오정개 바닷가가 있다. 오정개 바닷가에서는 누워 있는 소를 닮았다는 소섬이 바로 앞에 보인다. 지금은 주로 우도로 불리는 곳이다.

부산에 살던 우리 가족은 아버지 사업이 기울면서 부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형편이 안 좋아 함께 살 수도 없었다. 나와 바로 밑에 남동생은 할머니를 따라 성산포로 왔다. 어머니 아버지의 고향이자 할머니가 시집와서 오랫동안 살던 곳이다.

우리는 당장 살 집이 없어 이모집 밧거리(바깥채)에 살게 되었다. 이모는 어머니 바로 밑에 동생이었다. 어머니보다 큰 키에 조금 마른 편이었는데 물질 잘하는 해녀로 인정받고 있었다. 물질 잘하는 해녀에겐 “머정이 좋다”고 하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이모를 두고 “머정 좋다”고 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전복 같은 귀한 해산물이 어디에 있는지 잘 찾아내는 사람에게 머정 좋다고 말한다. 그날의 날씨와 물때에 따라 어떤 곳에 어떤 해산물이 많은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잘 알아내는 능력이다. 

이모는 ‘머정’이 좋을 뿐 아니라 숨도 길어 오랫동안 잠수를 할 수 있었다. 제주시에서 잠수 오래하는 대회가 열린 적이 있다는데, 이모는 성산포 대표로 뽑혀 대회에 참석해 입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모네 식구와 가끔 밥을 같이 먹을 때면 이모는 우리 아버지를 탓하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이모부가 아버지 친구였다. 아버지가 이모와 이모부 사이에 다리를 놓아 두 분이 결혼하게 되었다. 이모는 이모부에게 늘상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은지 우리 앞에서도 이모부 험담을 하기 일쑤였고, 이게 모두 너네 아버지 때문이라며 화살을 아버지에게 돌리며 말을 맺고는 했다. 물론 우리를 탓하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에 비하면 이모네는 큰 부자였다. 이모부 집안이 좀 사는 집이라 농사짓는 밭도 여러 군데 있었다. 그런 이모부가 왜 그리 탐탁지 않은지 이모의 불평은 끝이 없었다. 자식들한테도 잔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지켜보는 사람이 무서울 정도로 혼을 내기도 했다. 

그런 이모지만 사는 내내 우리에게는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언니에 대한 측은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맏딸인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이모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생들이나 그 누구에게든 싫은 소리 한번 한 적 없는 어머니의 성품도 잘 알고 있고,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이 보기 딱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모가 우리 형제에게 마음을 베푸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음 애틋한 이모 집에 살게 된 것도, 이모 집이 오정개 근처인 것도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이모 집은 우뭇개 위 언덕이 흘러내려와 마을과 만나는 끝자락에 언덕을 니은 자로 잘라낸 자리에 들어서 있었다. 집 뒤켠에 가면 시루떡을 켜켜이 쌓아 놓은 듯한 언덕의 속살이 훤히 드러나 신비한 기운이 돌았다. 마당에 서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집 뒤 언덕은 오정개 바닷가 언덕으로 바로 이어져 있었다. 언덕을 통해서 오정개로 가도 되고 올레를 지나 곧장 갈 수도 있었다. 오정개는 이모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였다.

사진=김수오
사진=김수오

그때부터 뒷마당처럼 뻔질나게 오정개 바닷가에 드나들며 노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오정개 바닷가 언덕에서 반딧불을 본 것도 바로 이때, 부산에서 성산포로 막 옮겨온 무렵의 일이었다.

1학년이 되어 봄이 무르익을 무렵 소풍을 간다고 했다. 하지만 소풍가는 곳이 오정개 바닷가 동산이라고 했다. 매일 뛰놀던 곳으로 소풍을 간다니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하기야 지금 돌이켜보면, 1학년에 갓 입학한 꼬맹이들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겠는가? 우뭇개 동산만 해도 아래로 절벽이 펼쳐져 있어서 선생님들이 보기에는 아주 위험한 곳이었을 것이다. 1학년 2학기 때는 성산포에서 저 멀리 식산봉까지, 2학년 때는 광치기 해변을 지나 섭지코지까지 멀고먼 길을 가야 하는 소풍 생활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오정개로 간 소풍에서 점심 먹을 때 즈음, 한 아이가 울상을 짓고 울먹이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육지에서 아버지와 함께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였다. 부모님이 이혼해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었다. 큰 키에 뽀얀 살결인데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금방 산 듯한 새 옷을 입고 다녔다. 그날도 자주 입던 하얀색 새 점퍼를 입었는데 몸집에 비해 좀 커 보였다. 큰 하얀 점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집이 더 우람해 보였다. 아마 우리 반에서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갈 듯했다. 제주도 말이 서툴러서 그런지 붙임성이 없어서 그런지 친구들 하고 잘 어울리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우리와 조금 떨어져 있던 이 덩치 큰 친구가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아버지와 둘이서 객지에서 살면서 과자며 음료수며 잔뜩 싸왔지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것 같았다. 엄마 없는 설움에다 도시락도 없고 친구들하고 어울리지도 못해 끝내 울음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부모님의 이혼 때문에 힘들어한 친구는 더 있었다. 지서 근처 반듯한 양옥집에 사는 친구였다. 형편이 괜찮은 만큼 늘 용돈을 얼마간 가지고 있었다. 친구는 껌을 좋아해서 방과 후에는 껌을 한 통 사들고 함께 오정개 동산으로 가곤 했다. 껌 하나 크기의 초소형 만화책이 들어 있던 ‘왔다껌’은 아직 없던 때였다. 친구는 커피껌을 특히 좋아했다. 껌 한 통 챙겨온 친구와 오정개 동산에 올라 바다가 잘 바라다 보이는 곳에 앉았다. 껌 포장지를 뜯고 나에게도 껌을 하나 건네준다. 달콤한 커피맛 껌은 처음 씹을 때가 가장 좋았다. 이때 씹은 커피껌 맛은 어른이 되어 커피믹스를 마실 때 되살아났다. 같이 껌을 씹으며 한참을 바다만 바라보기도 했다. 이제 몇 달 있으면 친구는 제주시로 가야 했다. 아버지를 따라가는지 어머니를 따라가는지 말이 없다. 아니면 그때까지도 다툼이 계속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소풍에서 울음을 터뜨린 아이도, 내게 커피껌을 사주던 친구도 얼마 뒤 성산포를 떠났다. 두 친구가 떠난 뒤에도 오정개에서 모여 노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이혼 때문에 괴로워하던 친구들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나는 어머니 아버지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듯 부모님의 큰 간섭 없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었다.

성산포에 자주 다녀본 사람이라도 오정개 바닷가를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뭇개나 수매밑처럼 외지인에게 드러난 바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동네 아이들끼리 간섭받지 않고 놀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오정개 바닷가에서는 헤엄을 치며 놀 수는 없었다. 모래밭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온통 바위투성이라 맨발로 헤엄치며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대신 보말(작은 고둥)을 잡기에는 좋았다. 먹을거리가 귀한 시절에 요긴한 간식거리가 되어 주었다. 잡아온 보말을 삶아 옷핀이나 바늘로 찔러 쏙 빼내 먹으면 고소하니 맛이 좋았다. 욕심 부려 너무 많이 먹은 날에는 속이 안 좋아 고생 좀 해야 하긴 하지만.

보말을 잡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썰물이 되어 크고 작은 바위가 드러나면 그저 가서 작은 돌멩이들을 들추며 줍기만 하면 되었다. 쌀쌀한 바람을 견딜 수 있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부산에서 성산포로 옮겨와 처음 보말 잡으러 오정개 바닷가에 갔던 일이 떠오른다. 큰아버지 댁은 1남 7녀로 식구가 많았다. 나중에 막내가 태어나 1남 8녀가 되었다. 식구가 많아서 사촌누나들은 늘 집안일을 해야 했다. 그런 큰댁에 가면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누나들에겐 보말을 잡는 일도 집안일 가운데 하나였다. 누나들을 따라나서긴 했지만 처음 해보는 일이라 내가 무슨 큰 도움이 될 수는 없을 터였다. 

물이 빠져나간 오정개 바닷가에서 작은 돌멩이들을 들추며 보말을 주웠다. 어느 순간 돌멩이를 뒤집었더니 뭔가 뭉툭한 것이 나타났다. 문어였다. 깜짝 놀라 나는 뒤로 물러섰다. 옆에서 보고 있던 누나가 소리쳤다. “뭉게, 확 잡으라!” 뭉게는 문어를 부르는 제주도 말이다. 누나의 말에 다시 정신을 차려 문어를 잡아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문어는 유유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데, 사촌누나는 그 귀한 문어를 놓쳤다며 나를 두고 한탄하였다. “분시 몰랑, 분시 몰랑, 뭉게 놓쳐부러시녜.” 분수 몰라 문어를 놓치고 말았다는 한탄이었다. “제 분수 모른다” 할 때 쓰는 그 “분수”이지만 자기 앞가림에 더 가까운 뜻으로 쓰인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뒤로도 사촌누나는 그때 일을 되새기며 분시 모르는 나를 놀려대곤 했다.

돌이켜보면 처음 오정개 바닷가에 갔을 때 문어를 본 것은 정말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영리한 문어가 썰물에 바다로 나가지 않고 돌멩이 밑에 남아 있었다니!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문어가 여섯 살짜리 꼬맹이에게 잡히는 두 번째 실수를 할 리도 없었을 테고.

아무튼 오정개 바닷가에 처음 갔을 때,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행운이 왔지만 움켜잡지 못했다. 그 뒤로 바다에 수없이 갔지만 그런 행운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오정개의 여름밤을 수놓던 반딧불이 또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글_임영근

부산에서 태어나 여섯 살쯤에 부모님 고향인 성산포로 옮겨가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주시로 이사가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육지’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학생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고, 졸업한 뒤에는 출판 편집자로 일했다. 현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고양시 인문학 모임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시사 월간지, <시대> ‘서양철학산책’, ‘이 책 저 책 읽으며’ 코너에 에세이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 산문집 '일출봉에서 부는 바람'을 출간했다. 이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의사이자 사진작가인 김수오 선생 작품과 함께 격주 목요일 제주투데이에서 게재한다. 어렸을 때 성산포와 제주시에서 자란 일이 글쓰기에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제주다움을 담기 위해 산야를 누비는 김수오 한의사

사진_김수오

제주 노형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수오 씨는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한의학에 매료된 늦깍이 한의사다. 연어처럼 고향으로 회귀해 점차 사라져가는 제주의 풍광을 사진에 담고 있다. 낮에는 환자들을 진맥(診脈)하고 출퇴근 전후 이슬을 적시며 산야를 누빈다. 그대로가 아름다운 제주다움을 진맥(眞脈)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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