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 툭,》(김미희 글, 정인성 천복주 그림, 토끼섬 펴냄)
《동백꽃이 툭,》(김미희 글, 정인성 천복주 그림, 토끼섬 펴냄)

이 책의 마지막에 ‘동백꽃이 피었습니다’로 끝을 맺는다. 글쓴이는 동백꽃이 제 목숨대로 피었다 지기를 바란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는 3만 명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때 제주도 사람이 30만 명쯤 되니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목숨을 달리했다.

그들은 고사리 마중을 갔던 택이 아버지요, 잡초를 뽑으러 간다던 식이 큰형님이요, 소 먹일 꼴을 베러 갔던 찬이 할아버지요, 보리 베러 갔던 철이 어머니요, 조를 수확하던 숙이 할머니다. 그리고 치마폭에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 장독대를 밝히고, 빈 돌확을 채웠던 섭이 누나다.

이 책 첫 장을 보라.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 괭가리와 징을 치며 놀고 춤을 춘다. 흑돼지를 쫓으며 잡으려고 애를 쓴다. 동네에 혼례 잔치가 있는 날이다. 마을 곳곳에는 동백꽃이 빨갛게 활짝 피었다. 마을 사람들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이 책 마지막 장을 보자. 동백꽃은 다 져서 잿빛 마을이다. 집들은 불에 타서 무너지고 창문은 총탄으로 깨졌다. 춤을 추며 뛰놀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그 자리에 빨간 동백꽃이 뚝뚝 떨어졌다. 동네 사람들이 있던 곳 마다 동백꽃이 하나 둘, 무더기로 쓰러졌다. ‘나 여기 살고 싶다’고 ‘나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피맺힌 소리가 들린다.

내가 살고 있는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는 다랑쉬오름이 있다. 그 오름에 있던 마을은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항쟁으로 사라졌다. 마을 사람 모두가 죽거나 다른 곳으로 삶터를 옮겼다. 제주도에는 그런 마을이 여럿이다. 어쩌나 이런 일이 일어난다.

아직도 1948년 4월 3일에 일어난 일을 사태냐, 항쟁이냐, 사건이냐. 아니면 그냥 4.3으로만 불러야 하나 망설인다.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분명히 ‘항쟁’이라 부른다. 하루하루 농사를 지으며 살던 사람들에게 총칼로 죽이는데 어떻게 맞서서 싸우지 않을 수 있는가. 그렇게 맞서 싸운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주고 재워주었다고 죽여야 하나. 목숨을 이으려고 한라산에 올랐다고 마을에 남아있는 식구들을 모두 죽여야 하나.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제주도 사람 30만 명 모두를 죽여도 좋다고 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본 군국주의자들로부터 풀려난 자리에는 미국 군사정부가 들어섰다. 그들도 이승만과 같은 생각이었다. 제주도에 있는 사람들이 외치는 한반도 남녘에서만 치러지는 선거를 반대하고, 남녘 정부만 꾸리는 일에 반대하는 모든 제주도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 조선을 독립시키려고 목숨을 바쳐 싸웠던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로 몰아 죽였다. 1945년 8월 15일은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자들 손에서 미국 제국주의자 손으로 넘어갔을 뿐이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년, 미군정이 조선을 다스리는 동안 조선 사람들은 더 배가 고팠다. 한반도 북녘 땅이 지주들 땅을 강제로 빼앗아 백성들에게 공짜로 나눠준 것과는 다르게 한반도 남녘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를 죽였던 일본 앞잡이인 경찰, 군인, 검사, 판사, 정치인들이 다시 미국 군사정부를 도와서 조선 백성들을 죽이는 일에 나섰다. 제주도는 그런 역사 한 복판에 있었다. 저항하거나 한라산으로 도망가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제주도 민중들이었다. 4·3은 ‘항쟁’이다.

이 그림책에서는 동백꽃이 ‘툭’ 떨어진다. ‘툭’자가 비스듬하게 쓰였다. 제 목숨대로 살지 못했던 한이 서려있다. 제주도에서 1948년 4월 3일에 있었던 일은 다시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

내가 사는 제주 구좌읍 세화리 구좌파출소 앞에는 비석이 하나 있다. 제주 4.3때 무장폭도들이 파출소를 쳐들어와서 경찰들을 죽였다는 내용이 실렸다. 그들은 무장폭도가 아니라 제주도 사람들을 지키려는 ‘유격대’다. 그렇게 불리는 날은 언제쯤 올까. 그날이 진정한 해방이다.

은종복

글쓴이 은종복 씨는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위치한 인문사회과학 책방 '제주풀무질'의 일꾼이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책과 사회를 또박또박 읽어내려가는 [또밖또북] 코너로 매달 마지막 목요일에 독자들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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