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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 중심에 선 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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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 중심에 선 교사들
  • 조수진 기자
  • 승인 2022.04.30 1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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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4·3을 찾다:3·10총파업에서 4·3으로②조천면-2
3·1발포사건 이후 조천지역 직장·학교 총파업 상황

1947년 3월1일 오후 2시50분쯤. 관덕정 광장에선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경찰들이 쏜 총에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는 소식이 제주도 전역에 퍼졌다. 경찰은 발포사건을 수습하기보다는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끝나고 이어진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일에 더 주력했다. (<4·3은 말한다>1권)

경찰이 쏜 총에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들 대부분은 집회를 구경하던 관중이었다. 관덕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립병원 앞에서도 병원에 입원 중이던 경찰이 쏜 총에 지나가던 행인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발포사건으로 숨진 이들 중엔 열다섯 살 학생과 갓난아기를 안고 있던 젊은 여성도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민심은 크게 격앙됐다. 

강요배 작가의 피살, 1991년.
강요배 작가의 피살, 1991년.

공권력의 과잉 진압이 초래한 죽음. 이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생소한 비극이 아니다. 지난 2015년 70세 농민 백남기씨는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쏜 직사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두고 한국 사회가 느낀 공분을 떠올리면 75년 전 제주도민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할 수 있을까.

30여 년 만에 되찾은 나라의 진정한 자주독립을 외치던 현장에서 학생이, 젖먹이 어머니가 영문도 모른 채 총격을 당했다. ‘3·1대회’를 준비했던 ‘3·1기념투쟁준비위원회’는 자연스레 미군정과 경찰에 항의하는 목소리의 중심이 됐다.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나흘 뒤인 5일 제주읍당과 함께 상무위원회 연석회의를 소집했다. 안세훈·김용관·김행백·이시형·김영홍 등 지도부가 모인 이 자리에서 대정면당의 건의를 토대로 총파업의 투쟁방침을 결정했다. 이들은 직장별로 파업단을 조직하고 10일 정오를 기해 총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당내 투쟁 조직으로 ‘3·1사건투쟁위원회’(이하 투쟁위)가 비밀리에 만들어졌고 각 면당에서도 조직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9일엔 합법적인 당외 투쟁 조직으로 ‘3·1사건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결성해, 읍·면·리·구, 각 직장에 구성하도록 했다. 투쟁위와 대책위는 ‘3·1발포사건(이하 3·1사건)’의 실상을 폭로하며 총파업과 희생자 구호금 모집에 돌입했다. (박찬식, <4·3과 제주역사>)

 

면과 학교를 중심으로 진행된 조천 총파업

“발포책임자 강동효와 발포한 경찰관을 처벌하라!”
“피살당한 동포의 유가족의 생활을 전적으로 보장하라!”

일제강점기 제주지역을 대표하는 항일운동인 ‘조천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조천면. 김시범, 안세훈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할 정도로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컸다. “빼앗긴 우리나라를 되찾자”는 열망은 해방 후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의지로 고스란히 옮겨갔다. 하지만 조천국민학교 운동장을 채웠던 5000명의 함성이 채 사라지기도 전 ‘3·1사건’ 소식이 조천지역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옛 조천면사무소와 조천중학원 터. 왼쪽 제주시동부보건소 조천보건지소 건물 자리가 조천중학원 터이며, 오른쪽 상가 건물이 조천면사무소 터이다. 조천중학원에서 조천면 3·1기념투쟁준비원회가 구성됐으며, 조천면사무소 직원들은 총파업에 가담했다. 또한 조천중학원 파업단에는 교장 손보규와 교사 이덕구・김민학 등 4·3항쟁 주도 인물들이 적극 참여했다. 4·3봉기를 직접 촉발시킨 조천중학원 학생회장 김용철의 고문치사 사건(1948. 3. 6)이 바로 앞에 자리 잡은 조천 경찰지서에서 이루어지는 등 4·3 역사의 현장이 한곳에 모여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옛 조천면사무소와 조천중학원 터. 왼쪽 제주시동부보건소 조천보건지소 건물 자리가 조천중학원 터이며, 오른쪽 상가 건물이 조천면사무소 터이다. 조천중학원에서 조천면 3·1기념투쟁준비원회가 구성됐으며, 조천면사무소 직원들은 총파업에 가담했다. 또한 조천중학원 파업단에는 교장 현보규와 교사 이덕구·김민학 등 4·3항쟁 주도 인물들이 적극 참여했다. 4·3봉기를 직접 촉발시킨 조천중학원 학생회장 김용철의 고문치사 사건(1948. 3. 6)이 바로 앞에 자리 잡은 조천 경찰지서에서 이루어지는 등 4·3 역사의 현장이 한곳에 모여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발포사건으로 촉발된 총파업에 조천면도 적극 참여했다. 조천면사무소와 조천중학원, 각 국민학교, 우편국 등이 파업에 나섰다(제주신보, 1947년 3월14일자). 다만 지금까지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해 총파업과 관련한 정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사·연구팀이 확보한 판결문과 3·1사건 체계도, 현장 취재 등을 통해 파악한 총파업 참여 학교·직장, 파업단 책임자, 진행 상황 등은 다음과 같다. 특히 항일운동가들이 총파업에 대거 참여한 사실이 눈에 띈다.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이 그대로 총파업으로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9일 김시탁 남로당 조천면위원장의 자택에서 파업 논의가 이뤄졌다. 이어 13일 오전 10시 조천국민학교 강당에서 500여명이 모여 당외 조직인 ‘3·1사건 조천면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 책임자엔 조천면장이자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항일운동가 김시범이, 부책임자에 김성휴·김유환, 총무부에 송시철·김정환, 선전부에 김시탁·김대진·김영옥, 연락부에 한재숙·이정문·김경수, 교섭부에 김시범·윤성O, 구호부에 이인화·부병각·홍순O, 조사부에 김평원·김완배·김원식·홍원하 등이 정해졌다. 

조천면내 리 단위 마을에서도 대책위가 속속 조직됐다. 10일에는 북촌국민학교에서 마을 주민 200여 명이 집합한 가운데 북촌리대책위원회가, 13일에는 신흥리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박찬식, <4·3과 제주역사>)

관내 학교별 파업단 또는 투쟁위원회는 10일 오전 10시 조천국민학교 교실에서 조직됐다. 교장을 비롯한 전·현직 교직원들이 책임자를 맡았다. 

위원회 명단을 살펴보면 조천국민학교 파업투쟁위원회(위원장 강경준), 신촌국민학교 파업단(책임자 김보현), 북촌국민학교 파업단(책임자 문덕순), 함덕국민학교 파업단(책임자 이정민), 대흘국민학교 파업단(책임자 고종권), 선흘국민학교 파업단(책임자 장규남·이창진), 조천중학원 파업단(책임자 현보규, 부원 이덕구·김민학) 등이 있다.

조천초등학교. 1947년 3월 10일 오전 10시 조천국민학교 교실에서 학교별 파업단 또는 투쟁위원회가 구성됐다. (사진=양동규 작가)
조천초등학교. 1947년 3월 10일 오전 10시 조천국민학교 교실에서 학교별 파업단 또는 투쟁위원회가 구성됐다. (사진=양동규 작가)

이어서 11일엔 조천면사무소 파업투쟁위원회(책임자 김시범), 조천우편국 파업단(책임자 차석호) 등이 직장 파업을 이어나갔다. 이날 오후 3시엔 조천국민학교 강당에서 ‘조천면 각 직장 파업단 공동투쟁위원회(위원장 강경준)’가 결성, 관내 직장 파업을 총괄적으로 진행했다.

파업단과 투쟁위는 3·1사건과 관련해 발포책임자의 처벌과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보상 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요구조건을 명시한 전단을 마을에 붙이거나 배포하기도 했다. 

13일과 14일엔 면민 2000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려 파업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이들은 길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제주신보사가 진행한 희생자 조위금 모금에는 조천면 공공기관, 사회단체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47년 6월15일 마감한 모금 현황을 보면 조천면사무소 210원, 신촌국민학교 1647원, 신촌민청 485원, 조천면민 일동 1만9372원 등이다.(박찬식, <4·3과 제주역사>)

 

‘총파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마에 띠를 두르고 같은 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이라는 피켓을 들고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친다. 흔히 ‘파업’이라 하면 떠올릴 장면이다. 노동자들은 주로 임금을 높이기 위해, 노동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회사 측을 상대로 투쟁하는 방식 중 하나로 ‘파업’을 선택한다. 다시 말해 더 나은 ‘경제적인’ 조건을 요구하기 위한 강경 수단이다. 

하지만 제주에서 일어난 ‘파업’의 목적은 달랐다. 파업에 나선 민중과 노동자들은 미군과 경찰을 상대로 ‘3·1사건’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외쳤다. 노동자 개개인의 ‘경제적인 목적’이 아니라 전 도민이 부당한 공권력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목적’을 띠고 있었다. 

특히 ‘총파업’은 동일 지역에서 대다수의 노동자가 동시에 하는 파업을 뜻한다. 폴란드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총파업(또는 대중파업)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멋대로 결정되고 선전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역사적 필연성’을 가진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하는 ‘역사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2021년 민주노총 1020 총파업 대회 서울 서대문 사거리 모습. (사진=민중총궐기 페이스북)
2021년 민주노총 1020 총파업 대회 서울 서대문 사거리 모습. (사진=제주투데이DB)

이 같은 성격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3·1사건’에 대응하기 위한 방침으로 ‘총파업’을 결정한 연석회의에서 잘 드러난다. 남로당은 3·1사건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역사의 어느 시대에도 유례가 없는 평화군중에 대한 야수적 발포살인사건”으로 규정하며 “경찰과 미국에 대한 대중들의 증오감과 투쟁욕이 커지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이러한 움직임을 대중 투쟁으로 발전시켜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투쟁을 하기 위해 강력한 투쟁 태세를 준비해야 한다”고 투쟁노선을 정했다. 

‘3·10총파업’은 해방 직후라는 “특정한 시기”에, 진정한 독립을 할 수 없었던 “사회적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했던 제주도민들의 (외세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향한 갈망에서 비롯한 “역사적 현상”이었다. ‘3·1사건’은 이 같은 민중의 염원이 폭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교사들이 나서다

“1940년대 교사들은 당대 지식인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식인이 해야 할 역할과 책임들을 교사들이 했을 겁니다. 교사라는 직업은 신망을 받는 위치였기 때문에 지역에서 영향력도 컸을 거고요.”

조천면 파업의 특징은 학교를 중심으로 교사들이 이끌었다는 점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3·1집회’와 ‘3·10총파업’을 주도한 세력의 직업 가운데 교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해방 이후 제주사회 내 새로운 민족교육과 근대교육에 대한 열기는 굉장히 뜨거웠다. 이는 자치적으로 학교를 세우고 운영한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된다. (박찬식, <4·3과 제주역사>)

특히 조천면의 경우 일제강점기 제주 항일운동의 요람이라 불릴 정도로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큰 지역이었다. 항일운동가와 제주 정치사회를 주도한 인물이 많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해방공간으로까지 이어지며 많은 지식인들이 학교를 세우고 교사를 맡았다. 

문희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제주지부장은 당시 지식인층이었던 ‘교사’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시대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 설명했다. 집회와 총파업에서 학생과 대중들을 동원하는 데 교사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박찬식, <4·3과 제주역사>)  

7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사회에서 교사들의 위치는 어떨까. 여전히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인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까. 문 제주지부장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명목 아래 ‘정치적 금치산자’가 된 상황이다. 

그는 “만 16세 이상이면 정당 가입이 가능하고 만 18세 이상이면 피선거권을 가진다”며 “학생들도 가진 ‘정치 기본권’을, 아이들에게 민주시민 교육을 해야 하는 교사가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게 지금 교육 현장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4·3을 찾다:3·10총파업에서 4·3으로] 연재에서 마을 명칭은 당시 행정구역 표기에 따른다. (예. 조천읍 →조천면, 제주시→제주읍)

전문가와 한뼘 더 들어가기

※조천면 총파업의 중심에 선 김시범

김시범(1890~1948)은 1919년 조천만세 항일운동의 최고 주역이다. 일제강점기 내내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30년대 후반 소비조합 항일운동을 주도한 자들이 권유한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지 않았던 정통 민족주의자였다. 그의 가까운 친척 중에서 김시학·김시우·김형식·김명식 등 제주도 신진 엘리트가 배출되었고, 조카 김장환과 더불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1919년 조천 만세항일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김시범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수록)
1919년 조천 만세항일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김시범의 모습. (사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수록)

해방 후 그는 자연스레 조천면 주민들의 추대 속에 조천면장에 취임했다. 결국 1947년 3·1절 기념식과 발포사건, 3·10 총파업의 역사적 격랑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47년 2월 26일 조천중학원에서 열린 3·1기념투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3월 1일 조천국민학교 기념식을 주관했다. 

발포사건이 일어나자 3월 11일 조천면사무소 파업투쟁위원회 책임자로, 3월 13일 조천면 대책위원회의 책임자가 되어 2천여 명에 달하는 면민 집회를 열기도 했다. 결국 파업을 주도한 책임을 물어 1947년 4월 18일 제주지방심리원에서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1947년 7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의장 박경훈)의 부의장을 맡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 경력 때문에 4·3봉기 발발 이후 경찰의 지목을 받다가 1948년 11월 초 토벌대에 연행되어 11월 25일 함덕리 서우봉에서 총살당했다. 자녀들의 피해 역시 컸다. 장녀 김옥희(영원)는 조천면 여성동맹 부위원장으로 한라산에 입산해서 투쟁하다가 토벌대에 잡혀서 공개 처형됐다.(김동일의 회고록 『자유를 찾아서』, 김창후 정리 ; 김진언의 구술생애사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양경인 논픽션) 

조천면 대흘리에 조성된 김시범 가족묘. 왼쪽이 김시범 부부묘이며, 오른쪽에 김옥희 등 자녀들의 묘가 있다. (사진=박찬식)
조천읍 대흘리에 조성된 김시범 가족묘. 왼쪽이 김시범 부부묘이며, 오른쪽에 김옥희 등 자녀들의 묘가 있다. (사진=박찬식)

큰아들 김상환은 행방불명됐고, 다른 아들 김언환·김추환은 총살당했다. 부인 신경보는 며느리(행불된 아들 김상환의 처), 손자들과 함께 절멸 위기의 가정을 이끌었다. 일부 서적에는 신경보가 남편 김시범과 같은 날에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 잘못이다.

김시범은 4·3 때의 경력과 민전 간부를 맡았다는 혐의로 오랜 기간 독립유공자 추서에서 제외되었다. 제주도 항일운동가들 중 누구보다 먼저 독립유공자에 추서되어야 할 인물이 4·3의 낙인이 찍혀 연좌 적용을 받았던 것이다. 다행히 지난 2018년 문재인 정부가 광복절을 맞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무덤은 마을에 묘비도 없이 없이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다가 최근 대흘리에 조성된 가족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박찬식.

 

박찬식 제주문화진흥재단 이사장

 

 

 

제주투데이는 올해 3·1발포사건 및 3·10총파업과 관련한 문헌자료를 수집·분석하고 도내 12개 읍면별 현지 조사를 진행, 결과를 20여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공동 기획했으며 조사·연구팀은 박찬식 제주문화진흥재단 이사장이 팀장을 맡고 조사·집필 담당 연구원에 강호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 박성인 제주투데이 대표,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장, 조수진 제주투데이 기자, 영상·삽화 등 기록 담당 연구원에 김영화 작가, 양동규 작가가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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