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는 어느 정도 자라면 스스로 성장을 멈춘다. 그래서 지구에는 끝없이 성장하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긴 하다. 암세포다. 그러나 암세포도 끝없이 반복하는 세포분열 때문에 숙주를 죽게 하고 자신도 결국은 죽는다. 스스로 성장을 멈추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연 세계는 명징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경제만큼은 성장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생산이 줄어들고, 생산이 줄면 고용과 소득이 줄어들고, 고용과 소득이 줄면 소비도 줄어들 수밖에 없기에 행복도 당연히 줄어들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성장은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절대적인 국정 목표이자 좌우를 불문하고 맹신하는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경제성장이 무엇을 희생해 이뤄지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경제성장은 화폐 가치로 측정되는 ‘상품과 서비스’의 증가분을 의미한다. 문제는 경제가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서비스만으로는 성장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경제성장을 하려면 끊임없이 상품을 과거보다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밖에 없는 지구에서 한정된 자원을 끊임없이 뽑아 써야 하고, 그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배출되어 기후는 온난해지고, 오염물질과 쓰레기가 쌓여 지구 환경은 악화된다. 현세대에게 경제성장은 행복의 증가를 뜻하는 경제지표이지만 미래세대에게는 환경위기의 증가를 뜻하는 환경지표이다.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등 세계 유수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발간한 <세계불평등 보고서 2022>에 따르면 상위 10%가 전 세계 소득의 52%를 가져가는 동안 하위 50%는 8.5%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한다. 부유한 10%가 1년에 평균 1억 2000만원의 소득을 올릴 때 가난한 50%는 평균 373만원의 소득을 벌어 무려 31배의 소득 차가 난다는 것이다.
부의 불평등은 더 심하다. 상위 10%가 전 세계 자산의 76%를 차지하여 평균 자산이 7억 3000만원이나 되지만 하위 50%는 겨우 2%를 소유하여 평균 자산이 386만원에 그친다. 자산 차이가 190배가 넘는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의 불평등 정도는 산업혁명 이후 최고정점을 찍었던 20세기 초와 비슷하다고 한다. 이러한 통계는 성장주의자들의 말하는 낙수효과 전략으로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옥스팜과 스웨덴 스톡홀름 환경연구소가 2020년 발표한 <직면한 탄소불평등>에 따르면 세계 상위 10%가 1990~2015년에 전 세계가 배출한 누적 탄소량의 52%를 차지했다. 이에 비해 가난에 허덕이는 하위 50%는 전체의 7%를 배출하는 데 그쳤다. 부자들이 남아도는 부로 커다란 저택에서 살면서 개인 전용기로 세계 곳곳을 누비고 사치품 사들이기 때문에 가장 부유한 1%는 하위 10%보다 175배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것이다.
상위 10%와 하위 50% 사이에서 소득 불평등 차이와 탄소배출 책임 정도는 정확히 일치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내재하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기후위기의 해결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파리기후협약에서 정한 지구 평균기온 1.5℃ 상승 제한 목표를 달성하려면 2030년까지 세계 인구 1인당 연간 평균 2.3톤 이하로 이산화탄소를 배출해야 한다고 한다. 상위 10% 부유층이 이 기준에 맞추려면 탄소 배출량을 현재의 1/10 수준 이하로 낮추어야만 한다.
팀 고어(Tim Gore)는 “부유한 소수의 과잉 소비가 기후위기를 촉발하고 있지만 그 대가를 가난한 사람과 젊은이들이 지불하고 있다. 이러한 극심한 탄소불평등은 대부분의 정부가 수십 년 동안 지극히 불평등하고 탄소 집약적인 경제성장을 추구한 것에 따른 직접적인 결과”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를 탄소배출 세계 11위 국가로 만든 것도 이러한 경제성장의 후폭풍이다. 많은 기후운동 활동가들은 이미 공개된 기업별 온실가스 배출량 현황을 분석하여 20대 기업이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량의 57.4%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 문서에서는 이를 뭉뚱그려 발전 부문이 37%, 산업 부문이 35.8%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밝힌다. 우리나라를 ‘기후악당’ 오명국으로 만든 것은 바로 대기업 위주 경제성장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부국과 부자들과 대기업들은 경제성장을 볼모로 하여 자기들의 책임에는 눈을 살짝 감은 채 불평등 구조를 바꾸지 않고 빈국과 가난한 사람들과 중소기업에게도 책임을 나누자고 한다. 기후 위기의 해결 방식마저도 지극히 불평등한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불평등이 세습되는 사회는 결국 파국을 맞는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노예제가 그랬고, 현 정권도 교육과 부동산에서의 불평등과 내로남불 때문에 대선에서 패배했다.
기후위기의 극복은 불평등 구조를 무너뜨리고 ‘남들보다 더’라는 욕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지금은 무한 질주하는 욕망의 전차에서 내려야 할 때이다.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꾼다. ‘말랑농업’은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글이다. 격주 화요일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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