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성리 종합복지관(사진=서군택 제공)
봉성리 종합복지관(사진=서군택 제공)

​애월읍 봉성리. 옛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도너미'였다. 조선 말엽 고종33년 1895년에 어도리로 개명하여 58년을 불러오다가 1953년 봉성리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어도초등학교(사진=서군택 제공)
어도초등학교(사진=서군택 제공)

1943년 6월 3일 어도국민학교 개교했다. 1949년 1월 26일 4.3 당시 교실이 전소된 바 있다.

(사진=서군택 제공)
(사진=서군택 제공)

어르신 두 분이 정담(情談)을 나누고 있었고, 나는 노란 집에 정감(情感)이 있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무사 우리집 사진 찍엄수광?"

마침 어르신이 말을 붙여준 덕분에 나도 어르신 옆 의자에 앉아서 말을 걸어볼 기회를 얻었다.

​"삼춘, 여기 봉성리는 제주4.3 때 피해가 많지는 안았댄 허멍 예?"

​"맞쥬~ 그때 난 일곱살이었는디 사태 때 죽은 사람은 거의 어섰쥬. 납읍리허고 어음리는 많이 당했댄 허여."

​"납읍은 집들만 불에 타고 사람은 거의 죽지 않았댄 헙디다마는. 납읍마을은 경찰에서 정보를 주었는지 빨리 해안으로 소개된 후에야 토벌대가 들이닥쳐서 집만 불에 탔댄 헙디다. 어음리 빌레못동굴엔 토벌대 2연대가 유격대 아지트로 오인핸 몬딱 죽여버렸댄 허고마씨."

​"어떵허연 젊은 양반이 경 잘알암수광?"​

"아이고 난 책으로만 공부해신디, 산사람(유격대)들이 식량구하러 곽지리 까지도 내려가고, 봉성리에도 가끔 들렸댄 헙디다마는."

​얘기 도중 한 어르신의 핸드폰이 울렸고 "할망이 집에 들어오랜 해부난 난 집에 가야쿠다"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나도 '삼춘 고맙수다'라는 말과 함께 292번 버스를 타러 봉성리사무소로 향했다.

지름자갈밭(사진=서군택 제공)
지름자갈밭(사진=서군택 제공)

저렇게 밭에 있는 돌을 지름자갈이라 했다.

돌이 습을 머금고 있어서 밭작물에 도움을 주는 대신에 구근류작물이 아닌 엽채류 작물을 재배하는데 안성맞춤이라 한다.

어도오름(사진=서군택 제공)
어도오름(사진=서군택 제공)
어도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오래 된 점빵. 제주시로 향하는 버스 정거장 앞이라 예전에는 일종의 터미널 매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사진=서군택 제공)
어도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오래 된 점빵. 제주시로 향하는 버스 정거장 앞이라 예전에는 일종의 터미널 매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사진=서군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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