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제주에 유배 온 외지인이나 해방 후 취재를 온 기자들이 남긴 답사기나 여행기에는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장면이 꼭 들어있다. 물동이를 육지에서처럼 이고 다니는 게 아니라 지고 다닌다는 것도 놀랍지만 이 일을 오로지 여자들만이 한다는 것도 놀랍다는 것이다.

제주도는 모든 것을 대를 쪼갠 대오리로 만든 구덕이라고 하는 바구니에 넣고 배라고 하는 멜빵으로 지고 다닌다. 이것은 제주도의 독특한 지형 때문이다. 제주도는 길이 온통 자갈이 많아서 이고 다니다간 돌부리에 채여 넘어진다. 땔감도 짐도 물동이도 오로지 여자들만이 지고 다니는 것도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물허벅을 등에 지고 가는 모습 (사진=홍정표)

물동이도 육지와는 전혀 다른 모양이다. 육지에선 동이라고 하는 둥글고 배가 부르며, 아가리가 넓고 양옆에 손잡이가 달린 옹기를 머리에 이고 물을 긷고 날랐다. 그러나 이런 그릇으로는 제주도에선 물을 긷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주둥이가 작은 허벅으로 이것은 오로지 제주에만 있는 독특한 민속공예품이다.

물허벅세트 허벅은 주둥이가 좁고 몸통은 배가 부른 독특한 모양의 질그릇이다. (사진=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

제주도는 한국 최대의 강수지역이므로 물이 넘치지만 먹을 물은 늘 부족했다. 구멍이 뿡뿡 뚫린 현무암과 배수가 잘되는 화산회토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 빠짐이 좋은 까닭에 제주사람들에겐 물이 귀했다.

제주도내의 용천수분포 용천수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만들어졌다. (그래픽=박원배)

제주 사람들은 용천수나 봉천수에 의지했다. 용천수는 급속하게 땅으로 스며든 지하수가 지표면으로 솟아나는 것인데, 바닷가에 이런 용천수가 있었다. 제주의 마을은 물을 구할 수 있는 해안가 마을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봉천수는 빗물을 모아둔 것을 말하는데 중산간 지역에서는 이런 봉천수를 식수로 삼았고, 곳곳에 연못을 파서 소나 말을 먹였다. 식수는 촘항에 의지하기도 했다.

촘항 물이 귀한 산촌이나 우물이 먼 지역에서는 잎이 넓은 활엽수에 촘이라고 하는 짚을 이용한 물받이도구를 만들고, 그 아래에 항아리를 둔다. 이것을 촘항이라고 한다. 활엽수는 증산작용이 활발하기 때문에 그아래는 늘 습하다. 촘을 통해 이슬방울이나 빗물을 모아 식수로 활용하였다. 고인물은 썩을 수 있기 때문에 개구리를 넣어서 식수와 썩은 물을 구분하였다고 한다. (사진=제주민속촌)

용천수가 있는 곳에서 마을까지는 가까워야 2km정도가 보통이었다. 조선 초기까지도 제주는 질그릇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제주에서 물을 길러 나르기 위해 사용한 것은 통나무에 구멍을 낸 나무통이다. 이것을 구덕에 넣고 지어 날랐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질그릇으로 된 허벅이 등장한 것을 빨라야 18세기 말이다. 그제야 제주에도 허벅을 만들 정도로 높은 도기 기술력이 생긴 것이다. 그릇을 만드는 기술자들인 물레장인들 중에서도 허벅을 만들 수 있어야 ‘온착(완전한)대장’이라고 해서 명성을 얻었다. 좁고 높은 부리를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육지의 도기대장들은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허벅은 물을 긷는 것 말고도 쓰임이 다양했다. 어릴 적 외할머니 장례식 때 허벅에 담긴 팥죽을 장례식에서 나눠먹은 기억이 있다. 장지까지 긴 거리를 이동할 때 허벅에 담긴 죽은 쏟아지지도 않고 입구가 좁아서 식지도 않는다. 죽허벅 외에도 술허벅, 간장허벅 등 허벅의 용도는 다양하다. 허벅은 제주의 민속타악기로도 사용되었다. 부리부분과 배 부분을 대나무가지로 두드리면서 고저장단을 맞추었다. 제주 질그릇은 현재까지 발견된 것 만해도 100여종이 넘는데, 그중에서도 허벅만 무려 36종류로 압도적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허벅은 가장 대표적인 제주 질그릇이다.

허벅이나 질그릇의 종류는 크기에 따라 그리고 부리모양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있다. 먼거리 이동을 위해 크게 만든 맞춤허벅은 바릇이란 접두어가 붙어서 바릇허벅이라고 부른다. 소녀들을 위해 작게 만든 것은 대배기(대바지)라고 하고, 그보다 작으면 애기대배기라고 한다. 또 부리가 좁으면 등덜기라고 하는데, 여기에 바릇, 대배기, 애기 같은 접두어를 붙여서 크기를 구분했다. 부리가 허벅보다 낮고 넓은 허벅은 능생이라고 하고, 여기에 역시 접두어를 붙여서 크기를 구분했다. (사진=제주해녀박물관)

흙벽돌을 이용하는 육지의 가마와 달리 제주 질그릇을 만드는 가마는 돌로 만든다. 현무암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서 그 자체로 우수한 기공을 갖고 있는 좋은 단열재이면서 열에 강한 내화재이다. 넓적한 돌로 쌓아 만든 돌가마는 섭씨 1200도까지 올릴 수 있기 때문에 구운 질그릇의 겉은 유약을 바른 듯이 반질반질하고 단단해진다. 이것이 제주 질그릇이 가진 우수한 점이다. 유약을 바르지 않아도 겉은 도자기처럼 변하고 안은 흙의 성질이 남아있게 되는데 그러면 물을 정화시키고 발효식품을 저장하면 발효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맛이 보존되고 부패를 막기 때문에 제주 질그릇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과학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질그릇이 된다. 이 때문에 곡식을 제외하고 처음에 담았던 물·술·간장 등의 용기는 서로 바꿔 쓰지 않는다.

제주에서 도기를 굽는 가마는 굴이라고 부른다. 굴은 굽는 방법과 만들어진 도기의 빛깔에 따라 노랑굴과 검은굴로 나뉜다.

노란굴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에 있는 노란굴. 제주도에 있는 돌가마들은 제주 서쪽마을인 대정읍과 한경면에 집중되어 있다. 이곳이 흙이 제주 옹기를 만들기에 가장 알맞기 때문이다. 노란굴은 출입구가 좌우에 있다.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전시도록)

노랑굴에서 구워진 허벅은 노란색(갈색)을 띤다. 잿물유약을 바르지 않고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온도인 섭씨 1100~1200도에서 굽기 때문에, 붉은색과 노란색이 아름답게 발색한다. 이런 색을 얻기 위해서는 불 조절을 잘 해야 하고 불 때는 시간도 길다.

검은굴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에 있는 검은 굴. 출입구와 굴뚝이 굴의 위쪽에 있는데, 아궁이에서 그릇을 놓는 곳까지는 텅 비어 있어서 연기가 잔뜩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전시도록)

반면에 검은굴에서 아궁이로 땔감을 잔뜩 집어넣고 900℃ 내외의 온도로 밀폐시키면 타고 있던 장작에서 연기가 만들어져서 도기의 표면에 스며든다. 쉽게 만들 수 있지만 만들어진 도기는 진한 회색 또는 검은색으로 변하여 광택이 없고 쉽게 부서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릇은 지새그릇이라고 한다. 지새는 기와란 뜻이다.

국립민속박물관전시도록

노란굴에서 구울 때는 아래에 허벅을 놓고 자배기를 닮은 장태를 엎어놓고 그 위에 다시 허벅을 놓고 장태를 덮지 않고 굽는다. 이때 아래 허벅을 알데기허벅, 위의 허벅을 웃데기 허벅이라고 한다. 알데기허벅은 장태를 덮은 부분은 색이 그대로 붉게 남아있고, 잘 구워진 부분은 갈색으로 자연스럽게 두층으로 나눠진다. 웃데기허벅은 재가 날려서 붙으면서 발색하기 때문에 은하수같은 모양이 박혀있기도 하고 다양한 무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서 아주 아름답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에는 화강암이 없기 때문에 자기를 만들 흙이 없다보니 청자나 백자는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제주 질그릇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자기처럼 보존성이 우수해서 다양한 그릇으로 만들어졌다. 보관용 항아리, 허벅, 병, 사발, 단지 등, 사기그릇을 대체하는 다양한 생활용기 뿐만 아니라 화로,벼루,연적,그물추 등도 만들었다.

다양한 제주 질그릇들 제주 질그릇은 10개를 묶어 하나의 세트인 줄(족)로 판매했다. 춘두미(웃통개) 알동(알통개) 허벅,망대기,동이,장태,대바지,소능생이, 허벅능생이, 셋재비 ,조막단지, 독사발 등이 포함된다. 통개는 항아리, 망대기는 작은 항아리 종류, 셋재비와 동이는 장태종류이다. (사진=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검은굴에서 만들어진 지새그릇은 아주 미세한 틈들이 있어 열에 견디므로 시루·화로나 물을 보관하는 물항아리인 물항(물통개)를 만들었다. 노란굴에서 만들어진 그릇은 높은 온도에서 흙속의 금속성분이 녹아 흘러 내리는 자기화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구멍이 막히는데 반해서 지새 그릇은 틈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구멍에 뜨거운 공기가 숨어들었다가 뿌려주기 때문에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시루안의 떡은 설익은 부분이 없어 골고루 찔 수 있고, 화로는 온기를 오래 간직할 수 있다.

물항아리의 경우에는 기공을 통해 물이 증발하면서 증발열을 흡수하여 물을 시원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디언들은 일부러 물을 보관하는 토기를 구멍이 숭숭하고 성기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냉장고 역할을 한다고 한다.

지새 허벅은 가볍고 값도 싸기 때문에 소녀들을 위한 작은 허벅으로 만들기도 했다. 아이들이 넘어져서 허벅이 깨지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다지 경제적 타격을 입지 않았다. 여자아이들은 10살 정도가 되면 부모님을 도와 허벅을 지고 물을 길러 다닌다.

부모님이 밭일을 나가거나 바다에 나간 동안 물을 긷고 동생을 돌보고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는 일은 여자아이의 몫이다. (사진=제주도 여성특별위원회)

허벅이란 이름은 허벅다리, 허벅지모양에서 땄다고도 하고 몽고의 가죽물명인 ‘허버’에서 왔다고도 하지만 그 유래가 정확하지는 않다고 한다.

허버 몽골에서 사용하는 바가지 또는 두레박을 일컫는 몽골어라고 한다. 허벅이란 말의 유래가 워낙 부근에서 유사한 언어를 찾기 어려운 점을 고려할 때 가장 비슷한 말로 보이긴 한다. (사진=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허벅은 제주사람들의 삶에 가장 없어서는 안 될 생활용품이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두 번씩 물긷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상수도 시설이 집집마다 설치되기 시작한 1970년대가 되면서 비로소 허벅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제는 민속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제주의 부엌은 정지라고 부른다. 정지 입구에는 물항 또는 물통개라고 부르는 물항아리가 있다. (사진=제주해녀박물관)

 

뭂팡 부엌 앞에는 물팡이라고 하여 지고 온 허벅구덕을 부리는 곳이 있다. 여기에 허벅을 부린 후에 구덕 안에서 허벅을 꺼내서 물항에 물을 붓고 항아리가 찰 때까지 다시 물을 뜨러 간다. (사진=제주민속촌)
허벅에 물을 긷고 와서 부엌에 있는 물항에 물을 붓는 것은 굉장히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했다. (사진=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올해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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