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인디플러그
'아치의 노래, 정태춘' 영화 포스터

최근 정태춘의 다큐 영화 제작사 이벤트에 응모하여 시사회 초대권을 받았다. 덕분에 개봉에 며칠 앞서 영화를 보았는데 그의 삶과 노래가 어우러진 한 편의 콘서트였다. 가슴이 벅차올라 숨쉬기가 힘든 구절도 있었고, 그의 데뷔 시절 모습이 전원일기의 농촌 총각 모습 같아 웃음이 나기도 했다. 앙 다문 입과 그의 굳은 표정은 마치 세상의 불의와 대결하는 권투 선수 같기도 했다.

정태춘은 1978년 '시인의 마을'로 데뷔한 원로 가수이자 사회운동가이며 시인이다. 지금은 뮤지션이면서 투사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그는 원래 서정적인 포크 가수로 이름을 날리며 데뷔 이듬해에 MBC 10대 가수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소위 '잘 나가는' 신인 시절을 보냈다. 50대 이상의 세대들에게는 '시인의 마을, '촛불', '떠나가는 배', '사랑하는이에게' 같은 곡을 한 번쯤은 부르거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나 역시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노래방에서 '촛불'을 즐겨 불렀지만 그 노래가 정태춘의 노래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아치의 노래, 정태춘' 영화 스틸컷
'아치의 노래, 정태춘' 영화 스틸컷

내가 '제대로' 정태춘의 노래를 듣게된 계기는 1995년 대학교 새내기 새로 배움터(새터) 였다. 노래와 연극이 어우러진 집체극 공연에서 접한 "우리들의 죽음", "아, 대한민국" 의 노랫말은 충격이었고 이야기를 하듯 노래를 부르는 특유의 창법도 독특했다. 무엇보다 그의 노래는 내가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 "사랑하는이에게", "촛불" 같은 노래를 불렀던 가수가 어쩌다가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되었을까 의아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영상물등급위원회로 바뀐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검열철폐 투쟁에 앞장서며 정태춘이 비합법 음반을 출시한 사연을 알게 되면서 '우와! 이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에 어린 우리 둘이서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방문은 밖으로 자물쇠 잠겨있고
윗목에는 싸늘한 밥상과 요강이
엄마, 아빠가 돌아올 밤까지 우린 심심해도 할게 없었네
낮엔 테레비도 안 하고
우린 켤줄도 몰라 밤에 보는 테레비도 남의 나라 세상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안 나와
우리 집도 우리 동네도 안 나와
조그만 창문의 햇볕도 스러지고
우린 종일 누워 천정만 바라보다 잠이 들다 깨다
꿈인지도 모르게 또 성냥불 장난을 했었어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은 다 먹어치우고
오줌이 안 마려운데도 요강으로
우린 그런 것 밖엔 또 할 게 없었네
동생은 아직 말을 잘 못하니까
후미진 계단엔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말야
옆방에는 누가 사는지도 몰라

어쩌면 거긴 낭떠러인지도 몰라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 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여기저기 옮겨 붙고 훨 훨타올라
우리 놀란 가슴 두 눈에도 훨훨

<정태춘, 우리들의 죽음 중에서>

 

여튼 나는 대학시절 내내 정태춘을 비롯해 안치환, 노찾사, 꽃다지, 조국과 청춘, 희망새, 천지인, 소리타래, 최도은 등 이른바 민중가요를 많이 들었고 부르기도 즐겼다. 그러나 정태춘의 노래는 민중가요의 주류를 이루는 행진곡풍의 투쟁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나는 인근 대학 대동제나 방송국 공개방송에 정태춘이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혼자서도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는 고향 평택이 미군기지로 빼앗기게 되자 대추리에서 온 몸으로 저항했고 정부의 행정대집행 당시 논두렁에 처박혀 경찰들에게 사지를 들려 연행당하기도 했다. 그때가 2006년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절이다.

 

한겨레 신문 1996. 12. 28.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 무렵을 전후해 그는 오랜 시간 노래를 만들지도 부르지도 않고 세상과 등지고 살았다. 그러던 중 2019년, 1년 늦게 개최된 데뷔 40주년 콘서트가 참 반가웠다. 정태춘은 풍경화를 그리듯 노래를 불렀고 박은옥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들의 딸 정새난슬과 함께 부르는 세 식구의 노래는 정겨웠다. 40주년 콘서트에서 이듬해인 2020년 그의 다큐 영화를 개봉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는데 2021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먼저 선을 보이고 2022년 5월 18일 공식 개봉을 하게 되었다. 영화 제목은 “아치의 노래, 정태춘” 이다.

나는 정태춘을 스스로 각성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 예술의 자유를 위한 빛나는 투쟁의 성과 앞에 차려진 조촐한 상찬이다. 정태춘 그에게는 배우자 박은옥이 아니라 동지이자 동료 박은옥이 곁에 있기에 참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정태춘과 박은옥의 노래를 통해 각성하고 위로받은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이 글을 통해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여전히 당신들의 노래가 이 시대의 위로가 되어 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호일 영화와 음악, 한국현대사와 인권에 관심이 많은 '육지것'. 2020년 부터 직장에서 제주 근무를 명받아 제주살이 중이며, 제주투데이 독자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