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2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20일 오후 제주시 한울공원 인근에 서 있는 ‘4·3 도민 학살 주역’ 박진경 추도비를 가둔 감옥이 결국 철거됐다. 박진경은 4·3 당시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며 무차별적인 진압을 이끌었던 대령이다. 

이 같은 작전이 향후 제주도민 대규모 학살로까지 이어지며 박진경은 도민 학살의 ‘주범’이라고도 불린다. 그런 학살자의 죽음을 기리는 비석이 대한민국 그 어디도 아닌, 학살이 자행된 제주에, 그것도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관할하는 곳에서 서 있다. 

광주에 전두환 추도비가 떡하니 세워져 있다고 하면 상상이 될까. 제주 사회에서도 박진경 추도비 존치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4·3 관련 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 단체가 지난 3월10일 철창 조형물을 추도비 둘레에 씌웠다. 

‘역사의 감옥에 가두다’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설치물은 박진경을 감옥에 가둬 단죄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부지를 소유한 제주도보훈청은 이를 두고 ‘불법조형물을 정당한 사유없이 무단으로 설치했다’며 원상복구 명령을 내렸다. 

2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2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 철거 현장 맞은편에서 4·3단체들이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조형물을 설치한 단체 측이 “철거할 계획이 없다”며 일관된 입장을 보이자 도보훈청은 이날 행정대집행을 통해 ‘감옥’을 철거했다. 

철창을 들어 옮기는 과정에서 보훈청 관계자가 아래 직원에게 철창을 옮기다가 비석을 훼손할 것 같으니 주의하라고 하자 주변에서 “학살자를 보호하는 게 보훈청이 할 일이냐”는 비난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이날 추도비 앞에서 피켓 시위를 했던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은 “박진경이 제주4·3 학살자라는 역사적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며 “학살자를 학살자라 부르지 못하는 게 어떻게 정의로운 역사인가”라고 규탄했다. 

이어 “‘역사의 감옥’ 설치가 무단 점거가 아니라 역사를 왜곡하는 설치물(추도비)을 두는 것 자체가 역사의 땅을 무단 점거하고 있는 것”이라며 “대통령도 (4·3당시 자행된 학살에 대해)국가의 책임이라고 사과하지 않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2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2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하는 과정을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왼쪽)이 지켜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조형물 설치를 이끌었던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우리는 이념적 갈등이 아니라 최소한 제주 땅에서 4·3 학살의 주역 중 하나인 박진경을 추도하는 시설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박진경 추도비가 지금 이 자리에 아무런 조치 없이 제주 시내를 내려다보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역사적 단죄의 의미를 담은 설치물을 철거하는 행위는 행정의 잣대”라며 “제주특별자치도는 최소한 박진경에 대해 역사적으로 정확한 사실관계를 적시한 안내판이라도 설치해줄 것을 요청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극우성향 단체 관계자가 철거 현장에서 “박진경 대령은 학살자가 아니다”라고 외치다 시민사회 단체 측에서 “당사자도 아니고 시위 신고도 하지 않은 분이 목소리를 내는 건 부적절하다”며 지적하자 이를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2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2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했다. 감옥을 들어낸 뒤 현장. (사진=조수진 기자)

감옥 조형물 설치에는 제주민예총, 제주주민자치연대, 제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노동자역사한내제주위원회, 제주다크투어, 제주통일청년회, 제주4·3연구소, 제주아이쿱소비자생활협동조합, 제주여민회, 무명천진아영할머니삶터보존회, 제주참여환경연대, 서귀포시민연대, 제주문화예술공동체, 노무현재단 제주위원회, 민주노총 제주본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등 도내 16개 단체가 함께했다.

한편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 홈페이지 내 이동희 청장의 인사말에는 “국가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이 국민들로부터 예우와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고 명시하고 있다. 

동포인 제주도민 모두를 학살해서라도 자신의 ‘공’을 쌓으려던 인물의 행위를 국가를 위한 공헌으로 볼 수 있을지 물음에 대한 대답이 과제로 남았다.

2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2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했다. '역사의 감옥'을 설치했던 시민사회 단체들은 그 자리에 현수막을 내걸었다. (사진=조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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