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슴책방 현관을 지키고 있는 대운이. (사진=요행)
제주사슴책방 현관을 지키고 있는 대운이. (사진=이보경씨 제공)

#그림책, 어른이들을 위한 마음치유 처방전

이곳의 책방지기는 어린 시절을 목장에서 보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넓은 초원과 젖소, 말, 새가 전부였던. 가끔씩 출판사 방문판매원이 들렀는데 그녀의 엄마는 그림책 전집을 종종 사주셨다. 그 그림책은 그녀에게 친구였고 스승이었고 가족이었다.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가 돼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림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림책. 그림책의 매력은 뭘까. 그림책도 어떤 건 미니작품집 같기도 하고, 페이퍼 커팅북이나 팝업북의 경우 일단 눈이 즐겁다. ‘1차원적’ 인간인 나로서는 입체를 상상하는 시각과 그것을 구현해내는 작가의 능력이 그저 경이롭다. 

무엇보다 텍스트로부터의 해방. 언어는 사회와의 약속이고 세상과 연결하는 수단으로 우리 주변을 텍스트가 둘러싸고 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고개만 살짝 돌려도 텍스트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친절한’ 설명, 너무 많은 텍스트는 상상력을 통제한다는 오류가 발생한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제한하는 경우도 많다. 

그림책 속의 꽃 한 송이, 토끼의 발자국, 우주로 떠나는 문, 파도치는 바다 등등 하나의 장면에 수많은 상상이 시작된다. 놀랍게도 같은 책이라고 할지라도 언제, 어느 장소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림책은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림책이라고 하면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지배적인데 과연 그럴까? 

우린 누구나 마음속에 치유하지 못한 상처를 안고 사는 어린이가 있다고 한다. 그 어린이를 위로하고 달래주는 방법은 백 마디 말보다 어쩌면 그 아이의 스스로 생각하도록 하는 한 권의 그림책이지 않을까? 

사실, 제주사슴책방은 책방이라기보다는 전시관이라는 기분이 든다. 아니다. 사실, 책방도 작가들의 작품이 있는 곳이니 책방 자체가 전시관이랄 수 있겠다. 우리가 그것을 구매 목적용으로만 대하니 하나의 상품이 된 것이지 곰곰이 생각하면 한 작가가 깊이 탐구하고 사고해서 완성한 작품이 구매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책방은 그 자체가 전시관, 박물관이랄 수 있겠다. 

제주사슴책방에 진열된 그림책들. (사진=요행)
제주사슴책방에 진열된 그림책들. (사진=요행)

#사슴책방? 분점인가요? 

지금은 성산동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서울 마포구에 그림책만을 전문으로 다루면서 그림책작가 지망생을 교육하는 책방이 있다. 그곳의 이름이 ‘사슴책방’이다. 이보경씨에게 책방을 권한 사람이 ‘사슴책방’의 두 대표인데 제주에도 그림책 책방이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분점 같은 느낌이 들지만 사실 이 두 개의 ‘사슴책방’은 이름만 같이 사용할 뿐 전혀 다른 공간이다. 책 입고에서부터 운영 방식, 자산 운용도 별개다. 

이보경 작가의 ‘제주사슴책방’엔 1000권이 넘는 책이 있다. 매대에 있는 것만 이 정도이고 책 보관실에 그만큼의 책이 더 있다. 입고 기준은 내용에 크게 구애받는다기보다 그림 위주로 선택한다고. 선과 색에 탁월한 책방지기의 눈에 그림이 좋고 디자인이 세련되고 색감이 좋을 것. 같은 책이라고 해도 나라별로 색감과 채도, 종이질이 다르니 나라별로도 책을 마련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책방으로 부르는, 그러니까 대형서점과의 대척점에 있는 독립서점들은 도매상 없이 출판사와 직접 거래를 튼다. 책방 업무 중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이 책 주문이다. 이곳의 책방지기는 매일 전 세계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을 검색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신작이 언제 나오는지 살핀다고 한다. 

이곳은 외서가 80% 이상을 차지하는데 세계의 출판사와 일일이 연락을 취해서 책을 구입하고 있다. 유럽의 책들을 배에 싣고 비행기에 실어서 제주로 모이게 하고 있는 것. 괜히 그림책 전문 서점이 아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한국 그림책 작가들의 수준이 높아서 외국에서 수상하는 작가 또, 잘 판매되는 책들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그림책 시장은 1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니 서글프다. 

제주사슴책방에 진열된 그림책들. (사진=요행)
제주사슴책방에 진열된 그림책들. (사진=요행)

#책방지기의 또 다른 이름, 그림책 작가 

그녀가 책방 문을 열 때 목표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그림책을 내는 것. 지난 2019년 그 목표를 이뤘다. 제주 마을에서 수호신 역할을 하는 나무에 관한 <제주에는 소원나무가 있습니다>를 펴냈다. 제주에 살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 제주에서도 점차 잊히는 것들을 짧은 글과 아름다운 그림으로 담아낸 책이다. 

책방지기는 이 책을 가지고 도내 웬만한 초등학교는 두루 다녔다고 한다. 학교측에서 먼저 요청이 온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그림책 세계를 알려주고 또, 제주의 전통과 문화도 알려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제주 동서남북 어디든 갔다고. 그 경험은 이보경 작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보람을 느꼈고, 자긍심을 얻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그림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두 눈을 마주 보며 교감할 수 있었던 것은 큰 감동이었다. 이 책은 올해 초·중학교 제주어 수업 교재로 채택됐다. 

이보경씨는 제주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책방을 운영하며 생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주에 있는 한 제주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많이 펴내겠다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제주어를 제목으로 한 그녀의 새 그림책이 곧 세상에 나온다.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있음을 뜻하는 제주어 ‘모드락’이 책 제목으로 쓰였는데 내용은 이렇다. 소녀가 선물을 들고 친구의 생일파티로 향하는데 숲을 지나야 한다. 그런데 숲에서 만난 동물들이 생일선물로 준비한 구슬을 하나씩 빼앗는다. 하지만, 그 숲에서 소녀는 새로운 무언가를 얻게 되고 그것으로 생일선물을 대체한다. 

‘빼앗기는 듯한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선물 같은 책’을 만들고 싶어서 제작하게 됐다고.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색감과 채도, 디자인과 내용으로 우리 곁을 찾아올까? 어쩌면 이 칼럼이 실릴 무렵 <모드락 숲의 선물>이 이미 출간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벌써 세 번째 그림책을 준비 중이다. 제주4·3을 소재로 제작 중이라고 한다. 그림책 작가 이보경이 보여줄 제주4·3이라…. 슬프되 비관적이지 않고, 아프되 곪지 않으며 가만히 안아주는 그런 느낌의 책이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이보경 작가의 신간 '모드락숲의 선물'.
이보경 작가의 신간 '모드락숲의 선물'.

#소비되는 책 한 권의 가치, 그 무게

내가 이 책방을 찾았을 때 한 어머니가 아이에게 정성스럽게 책을 읽어주고 계셨다. 따뜻한 풍경이다. 이곳이 그들의 집이었다면 말이다. 책방은 공공의 장소면서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지 도서관은 아니다. 나는 순간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멈칫했고, 책방지기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어머니께 양해를 구했다.

이것이 양해를 구해야 할 문제일까? 앞서도 말했듯이 책방은 책을 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취향을 고려한 다양한 책을 준비해 손님을 맞는다. 손님은 원하는 책을 선택해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림책의 경우 구입하지 않은 채 그곳에서의 완독은 좀 곤란하다. 

그림책의 속성상 짧게는 10분이면 책 한 권을 읽는다. 책만 읽고 아이들에게 ‘읽었으니 됐지?’ 하고 그냥 나가는 가족 단위 손님이 꽤 된다고 하니 독자로서, 손님으로서 여물지 못한 책과 책방에 대한 예의가 아쉽다. 

책방지기는 작가의 시선에서 이것은 ‘예의’나 ‘배려’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나라 도서 시장을 나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무서운 현상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사지 않는 책을 출판하는 업체는 많지 않다. 당연한 얘기지만 출판사도 수익을 내야만 책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책을 내지 않으면 작가들은 창작물을 낼 수 없고 그렇다면 굳이 창작물을 만드는 활동을 하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그림책이라는 장르는 쇠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방지기가 한 예를 들려줬다.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에서는 성인이 그림책을 보는 것이 일상화돼 있어요. 책방 손님들이 종종 외국 그림책은 종이가 너무 좋고, 색감도 이쁘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유럽에서는 그림책을 찾는 사람이 있으니 그만큼 다양한 책이 출판되는 거거든요. 책방에 출판사 대표님들이 오신 적이 있는데 책방에서 잘 판매되는 팝업북을 출판하면 어떠냐고 추천해 드리면 고개를 저으세요. 왜냐하면 그런 팝업북은 제작비가 많이 드는데 비싼 가격을 주고 책을 사는 독자들이 우리나라에는 많이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창작자만의 비극이 아니다. 독자에게도 그림책이라는 장르의 양질의 작품을 만날 기회를 잃는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한 권의 책을 구입하는 것은 마음의 양식 저장고를 살찌우는 일인 동시에 우리나라 출판업을 성장시키고 창작자를 육성시키는 일이라는 의미다. 독자로서 우리의 역할이 얼마나 멋지고 숭고한가. 독자의 품격을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꽃이 핀 정원을 돌아다니는 대운이. (사진=이보경씨 제공)
꽃이 핀 정원을 산책하는 대운이. (사진=이보경씨 제공)

#대형서점은 줄 수 없는 것 

이보경 책방지기는 말수가 적다. 그리고 내향형의 사람이라 사실 사람과 있으면 ‘기가 빨린다’고 한다. 실제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고도 했다. 그런데도 책방을 한다. 심지어 책방 내에서는 대단한 수다쟁이다. 손님이 한 가지 질문을 하면 그 손님이 만족해할 때까지 답을 한다. 

그림책에 대해 소개를 해 달라고 하면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이 책, 저 책을 꺼내어 설명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말을 반복하고, 같은 행동을 해야 하는데도 지겨워하는 기색이 없다. 손님들께 말을 하기 위해서 책방 문을 열지 않는 나흘간은 되도록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보경 책방지기의 말을 좀 더 덧붙여 보겠다. 

“제가 그림책 작가이고 그림책 책방을 운영하기 때문에 어른들도 그림책을 통해서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국내외의 아름다운 그림책을 더 많은 손님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책방지기로서 가장 큰 소망입니다. 책방에 들러주시는 손님들이 그림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긴다면 무척 뿌듯할 것 같아요.”

대형서점에서는 서점지기가 책 한 권, 한 권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않는다. 책 보관실의 문을 열어 구석진 곳에 있는 책을 꺼내어 손님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럴 여력도, 그렇게 많은 책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제주사슴책방을 비롯해 동네 책방에는 대형서점이 줄 수 없는 다정함이 있다. 독자와 양질의 책, 작가와의 상생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다. 그 고민을 마주하고 같은 쪽에 선다면 우리나라에는 세계가 부러워할 다양한 책과 작가들이 가득하겠지. 아,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벅차고 설레는 일인지! 

※제주사슴책방은 제주시 조천읍 중산간동로 678-71에 있어요. 
금, 토, 일 이렇게 일주일에 3일만 낮 12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열어요.
운이 좋으면 일광욕하는 대운이를 볼 수도 있답니다. 

제주사슴책방 책방지기의 추천 책 

있잖아, 누구씨 (정미진 글/ 김소라 그림) 

있잖아, 누구씨 책 표지.
있잖아, 누구씨 책 표지.

책방지기가 근래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고 했다. 어른이가 읽으면 참 좋을 것이라는 말에 나도 읽어 보았다. 짧게 요약하면 어릴 적 엄마를 여읜 한 아이가 ‘누구씨’를 통해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이야기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아가 형성되기 전의 어린아이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괜찮다고 주문을 걸었을 뿐이다. 그러다 ‘누구씨’라는 가상의 친구를 얻어 혼자여도 괜찮았다가 정말 혼자가 돼 버렸다. 그런 혼자가 싫어서 ‘누구씨’를 외면해 사람들 속에 섞여들었지만 아이는 공허함과 한 몸인 채로 성인이 됐다. 

‘누구씨’가 없어도 외롭고 어렵고 두려운 삶. 그렇게 꽤 아픈 성장통을 겪고 다시 ‘누구씨’를 찾은 주인공은 ‘괜찮다는 건 꽤 괜찮은’ 것을 알게 됐다. 길었던 성장통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겐 또 다시 삶의 시련이 닥칠 것이다. 그래서 또 아프고 다치고 슬프겠지만 언젠가는 그 시련을 또 극복해 낼 것이다. 

한 장의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책이다. 마침내 책장을 다 넘겼을 때는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에 남아 목구멍을 답답하게 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해방감을 느끼게도 하는. 내 안의 아이를 들여다보게 하는 책이다.  

p.s 책방지기는 사실 자신이 작가이기 때문에 본인 책이 가장 애착이 간다고 수줍게 말했다. ^^ 

요행.

제주의 시골에서도 책방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책방은 책방지기의 성향에 따라 여러 장르의 책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책방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곤 합니다. 책방지기의 사심이 가득한 책방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책방지기의 삶을 바꾼 책 한 권과 책방의 탄생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인생 설계의 방향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