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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일이 말하는 4·3 해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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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일이 말하는 4·3 해결은?
  • 박소희 기자
  • 승인 2022.05.26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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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해결' 강조...국가 책임에 대한 후속 조치와 미군정의 사과까지
가해자 처벌은 부여된 상훈 박탈 정도로...특별법 개정으로 배보상 증액
4·3 해결 보수 역학론 주장엔 "4·3 폄훼하는 이들에 목소리 내야 역할"
부상일 제주시을 국회의원 후보. (사진=박소희 기자)
부상일 제주시을 국회의원 후보. (사진=박소희 기자)

국민의힘 부상일 국회의원 후보는 제주4·3과 관련 미군정 사과까지 이뤄져야 한다면서 '정의로운 해결'을 강조했다. 

제주시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부상일 후보는 25일 제주투데이와 통화에서 "''완전한 해결'은 사실상 기준이 모호한 것 같다"면서 '정의로운'에 무게를 실었다.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해제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약 3만 명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한 4·3 당시 남한 지역을 통치했던 미군정이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을 외치던 도민들을 강경하게 탄압한 사실이 여러 보고서와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한 '정의로운 해결'이란 국가 책임에 대한 후속 조치와, 미군정의 사과까지 이뤄내는 것이다. 

부 후보는 국가가 민간 학살에 대한 잘못을 인정한다면,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을 이어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재산·안전 뿐 아니라 '인권'까지 침해한 사실을 인정하고, 인권교육 과정에 제주4·3을 다룰 때 '정의로운 해결'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특별법 개정 당시 삭제된 '인지청구 특례 및 혼인신고 특례 등 가족관계 관련 조항'을 신설하고 4·3 피해 배·보상금 상향 조정도 약속했다. 

참여정부 시절 국가 차원의 공식 사과는 이뤄졌지만, 공권력에 대한 가해자 처벌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가해자 처벌에 대해 묻자 "가해자 중 생존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생존자만 형사처벌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면서 현재 가해자에게 부여된 상훈 박탈로 충분하다는 의견을 전했다. 

미국에 책임을 묻고, 이에 대한 후속조치도 미진한 상황. 

하지만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의식한 부 후보는 "미군정의 책임을 '묻기' 보다는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4·3 해결 과정에서 보수의 역할도 분명이 있다는 부 후보 주장에 대해서는 일각에서 비판도 제기했다. 

부상일 후보는 선거 유세 과정에서 "4·3특별법 초안은 국민의힘 계열인 한나라당 변정일 전 국회의원이 만들었고, 이명박 정부 때 4·3 관련 예산이 크게 증액됐으며 4·3 국가추념일 지정도 박근혜 정부에서 이뤄졌다"는 발언을 이어갔다. 

그러나 정부수립 전후로 발생한 4·3은 이승만 정권은 물론,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 금기어였고, 민주정부가 들어서서야 비로소 공식어로 자리 잡았다.

발생 50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됐다. 

당시 한나라당이 발의한 특별법이 민주당 계열 새정치국민회의 발의안보다 내용적 측면에서 훨씬 진보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4·3의 진상규명 보다 4·3의 성격 규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4·3을 민중항쟁, 혹은 통일운동으로 본 것이 아니라 '남로당 폭동'으로 규정하고 국가 책임을 지우려고 한 움직임이 당시 국회 내 있었다는 것. 

변정일·양정규·현경대 국회의원에 의해 발의된 한나라당 특별법은 4·3의 시간적 범위를 경찰 발포사건이 있던 3월1일이 아닌 4월3일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국가배상 대상 범위가 달라지는 문제도 있지만, "4·3을 4월3일 일어난 무장봉기만 따로 떼어내 이념적 갈등 속으로 주민의 희생을 희석시키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당시 법안심사소위과정에서 이같은 부분이 논쟁이 됐지만 국민회의가 발의한 내용인 3월 1일을 기점으로 4·3 정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또한 DJ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4·3은 '빨갱이들의 반란'으로 인식, 입에 담을 수 없는 "불온한 것"으로 치부됐으며 4·3 당시 군경 토벌대 희생자의 가족들은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활동을 제약받았다. 또한 불법재판으로 인해 희생된 수형인에 대한 명예회복도 70년만에 이뤄졌다. 

이같은 점을 설명하며 법학 전문가와 도민들은 "긴 세월 '속숨(침묵)'하며 살아야 했던 도민들에 진 빚 더 많다"면서 "책임을 통감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일갈했다. 

특히 "4·3 당시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박진경의 추도비 설치 문제만 보더라도 지금까지 보수는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돌아봐야 한다"면서 "보수 역할을 주장하고 싶다면 진영논리를 떠나 4·3을 폄훼하는 이들을 향해 분명한 목소리를 내줘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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