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녹색당원들이 '관광객 수를 반으로 줄이자'는 슬로건을 내세운 현수막을 설치하고 있다. (사진=이성홍 제공)
제주녹색당원들이 '관광객 수를 반으로 줄이자'는 슬로건을 내세운 현수막을 설치하고 있다. (사진=이성홍 제공)

 

제주 녹색당은 관광객 수를 줄이자고 주장합니다. “관광객 수 절반으로, 도민행복 곱빼기로!”라는 플래카드를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이런 구호에 대한 반응은 양면적입니다. 한편으로는 관광객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겪은 풍광의 변화와 불편함, 단적으로 자동차의 증가와 쓰레기, 오·폐수 문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구호를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하겠지요. ‘그럼 어떻게 먹고 살라는 거지?’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리는 여태껏 개발과 성장 밖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얼마 전 제주투데이의 기사(☞[@.@뭐라는공약?]'관광객 수 50%↓=도민행복 곱빼기' 등식이 배제한 것들)가 이런 ‘상식’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군요. 

“50%까지는 아니지만 제주 지역 관광객 수가 대거 감소한 전례가 있다. 제주도관광협회 집계에 따르면 관광업계와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이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2020년 제주를 찾은 관광객 수는 1023만명이다. 2019년 1528만명에 비해 고작(?) 33% 줄었을 뿐이다. 2020년, 개인은 저마다 어땠는지 몰라도 ‘도민행복’이 늘었다고는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50%가 감소했어야 ‘도민행복 곱빼기’를 맛볼 수 있었을까.”

기사를 쓴 기자는 “관광객 수와 도민행복의 관계는 단순한 등식으로 처리할 수 없다”고 덧붙이고 있네요. 기자라고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상식의 세계를 쉽게 벗어날 수는 없었겠죠. 이렇게 반문하고 싶네요. ‘지금까지의 만병통치약처럼 생각되었던 성장이 도민을 행복하게 했나요?’ 어쩌면 성장과 개발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에도 ‘관광객 수’를 줄이자는 구호에 직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일 수도 있겠군요. 상식의 세계에서 당연한 것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여기서 기사는 한 발 더 나갑니다. 녹색당의 구호가 “관광 및 서비스 업계에 종사하는 자영업자와 노동자 등이 누려야 할 안정과 ‘행복’이란 요소는 배제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관광객 수를 줄이면서 ‘도민행복’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말합니다. “제주의 산업 재편과 관광 관련 업종을 대체할 일자리와 보상책이 필수적”이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넌지시 근본적인 대안을 요구합니다. “사회 전환 계획과 제주의 경제 구조를 어떻게 바꿀지”를 밝히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기자는 녹색당의 메시지를 오해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오해는 앞에서 말한 그 상식의 세계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태도의 결과라고 말입니다. 기사는 정확히 녹색당이 비판하고 있는 성장과 개발의 편견에 붙들려 있습니다. 이 편견은 한 가지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무한한 자연’이 그것입니다. 기사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은 ‘도민행복’입니다. 그런데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녹색당이 게시한 현수막 문구.(사진=녹색당 제공)
녹색당이 게시한 현수막 문구.(사진=녹색당 제공)

녹색당의 구호는 ‘행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자는 제안입니다. 그런데 기사는 이미 행복을 단기적 성장과 개발의 혜택으로 축소해서 가정한 후, 이 제안을 거부합니다. 인과관계를 ‘성장→행복’이라는 ‘가정’에서 ‘성장→생태위기(기후위기와 팬데믹)’라는 ‘현실’로 옮겨간다면 어떨까요? 자연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성장은 그 자연의 한계 안에서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추구되어야 합니다. 기후재난과 창궐하는 팬데믹 아래서 누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런 절박한 질문에 “제주도지사에게는 항공편 수 조절 권한이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그냥 오해가 아니라 ‘무지’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사가 잊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양적 성장을 곧바로 행복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세계가 공평한 정의의 원리로 운영된다고 생각하는 착각입니다. 착각이 아니라면? 부정의와 불평등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제주도의 급속한 경제팽창이 불만을 낳는 것은 개발의 혜택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광업계 종사자들의 생계를 걱정하면서 왜 그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지요? 일자리를 잃은 칼호텔 노동자들 앞에서 제주도의 경제성장이 도민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말할 수 있나요? 앞에서 언급한 지속 불가능한 생산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정의롭지 못한 분배를 더욱 악화시킬 겁니다. 기후위기가 가속화되고 팬데믹이 빈발할 때 재난에 노출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개발이 도민의 행복이라고 외쳤던 사람들, 그러면서 개발의 이익을 독점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축적한 부로 재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방책을 찾을 겁니다. 물론 임시방편이겠지만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재난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겁니다. 

녹색당의 정책과 구호는 ‘제안’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연의 한계와 사회적 불평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바꾸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으라고요? 위기가 목전에 다다랐고, 당장 바꾸지 않으면 재난을 맞닥뜨릴 판국인데 팔짱을 끼고 ‘대안을 내놓으라’고 훈계하는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쩌면 녹색당의 ‘제안’은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 들여온 정치의 관행을 바꾸자는 의미까지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지켜질 게 뻔한 정당의 정책이 비판과 토론 없이 만들어지고 공보물이라는 이름으로 집집마다 배달됩니다. 그럴듯한 말들과 현란한 디자인이 정치를 대체하고 있지요. 녹색당의 정책은 그렇게 아름답지만 공허한 말들로 꾸며져 있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미래를 향한 구체적인 말들과 실천들은 녹색당이 아니라 도민들이 함께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정당과 정치인들, 관료들에게 맡겨 놓은 결과에 만족하십니까? 왜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요? 작은 이야기들이 모일 때 녹색당이 제안하는 전환, 녹색 사회로의 전환은 구체적인 꼴을 갖추고 내용을 채우게 될 겁니다. 그래서 녹색당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자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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