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2-07-04 18:07 (월)
[임영근의글바다] 단순하게 더 단순하게
상태바
[임영근의글바다] 단순하게 더 단순하게
  • 임영근
  • 승인 2022.05.26 18: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애기구덕. (사진=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애기구덕. (사진=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아이를 키울 때 꼭 마련해야 할 물건이 있었다.

출산이 다가오자, 처형께서는 ‘임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태아 보험을 들어 놓고 몇 회분의 보험료를 납부한 보험증서를 보내왔다. 아내는 원만한 자연분만을 위해 임산부 기체조 교실에 열심히 다니는 한편, 배냇저고리를 비롯한 아기 용품도 대부분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아기를 키우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지만, 서울에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제주에서 널리 쓰이는 ‘아기 구덕’이었다. 글자 뜻 그대로는 아기 바구니라는 말이지만, 실제 쓰임새는 아기 요람이다.

아기 용품을 파는 전문점에도 요람이 있었지만, 흔들 그네처럼 요란하고 거창한 장치로 만들어졌는데, 비싸기만 할 뿐 그다지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요람을 보면서 어렸을 때 주변에서 흔히 쓰던 아기 구덕이 떠올랐다. 제주에 계신 친척께 부탁드려 꼭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기 구덕의 모양은 단순했다. 아기를 편안히 뉘일 수 있도록 가로로 긴 네모꼴 바닥에, 아이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둘레에 난간 모양의 테두리를 둘렀다. 그리 두껍지 않고 둥근 철제 프레임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기까지는 그저 있음직한 요람으로 여길 수 있지만, 요람의 요체는 얼마나 쉽게 잘 흔들 수 있느냐에 있다. 제주의 아기 구덕에는 네모꼴 아래, 양옆으로 타원형 받침이 하나씩 달려 있다. 초승달과 반달의 중간쯤 되는 모양인데, 이 받침 덕분에 앞뒤로 무리 없이 흔들렸다. 받침의 기울기가 반달처럼 너무 급하지도 않고 초승달처럼 느슨하지도 않았다. 그런 만큼, 아기가 잠들기에 딱 좋을 만큼 흔들렸다.

지금 40∼50대 이상의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서 이런 '애기구덕' 이라는 이 고장 특유의 요람에 누워자랐던 추억이 있다. 대로 짠 이 구덕은 통의 중심쯤에 그물을 엮고 그 위에 짚을 깐 다음 기저귀를 깔고 아기를 눕혔다. 그리고 이 요람을 흔들며 자장가를 불렀다. 이 요람을 심지어 밭이나 어디나 지고 다니기도 했다. (사진=제주시)
지금 40∼50대 이상의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서 이런 '애기구덕' 이라는 이 고장 특유의 요람에 누워자랐던 추억이 있다. 대로 짠 이 구덕은 통의 중심쯤에 그물을 엮고 그 위에 짚을 깐 다음 기저귀를 깔고 아기를 눕혔다. 그리고 이 요람을 흔들며 자장가를 불렀다. 이 요람을 심지어 밭이나 어디나 지고 다니기도 했다. (사진=제주시)

막내 동생이나 사촌 동생을 키울 때가 생각난다. 애기 구덕에 애기를 뉘어 놓으면 잠을 참 잘 잤다. 자랑자랑 하는 노랫가락에 맞춰 살살 흔들어주면 울며 보채던 아이도 어느 결에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다. 어쩌다 살짝 잠이 깰 때에도 살살 흔들어 주면 금세 또 잠에 빠져들었다. 특히나 구덕을 흔드는 데 거의 힘이 들지 않아 너무 좋았다. 누운 자세로 발만 뻗어도 아기 구덕을 쉽게 흔들 수 있었다. 매미 소리만 들리는 나른한 여름 날 오후, 마룻바닥에 누워 애기 구덕을 꼬딱꼬딱 흔들다가 애기도 스르르 잠이 들고 나도 그만 잠이 들곤 하던 때가 떠오른다.

제주 오일장에서 사서 보내준 아기 구덕 덕분에 애 키우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온 서울 출신 후배가 애기 구덕을 보더니 너무 편하고 좋겠다며 부러워했다. 출산을 앞둔 후배는 애기 구덕을 꼭 자기에게 물려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아이가 쓰던 애기 구덕은 얼마 뒤, 서울 출신 후배의 집으로 보내졌다.

원래 애기 구덕은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였다. 애기를 기르면서도 바깥일을 해야 하는 제주 어머니들의 절심함이 만든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애기 구덕에 아이를 누이면 밖에서도 일을 할 수 있었다. 아기가 바구니에 들어 있어서 해를 입을 염려 없이 밭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아기 구덕은 흔들어 재울 수 있어서 편리하기도 했다. 바구니라 흔들림이 그리 부드럽지는 않았겠지만, 바구니를 흔들어주면 아기를 더 쉽게 재울 수 있었다. 이런 대나무 구덕을 더 편리하게, 더 흔들림이 좋게 개량한 것이 ‘제주 오일 시장표 철제 아기 구덕’이다.

대나무 애기 구덕하고 잘 어울리는 물건도 있었다. 애기 구덕을 지고 밖으로 다니기에 딱 맞춤인 것. ‘베’라고 부르는 것이다. ‘베’는 태권도복이나 유도복에 두르는 띠처럼 생겼는데 길이가 도복 띠 두세 배쯤 되었다. 지난 연재 글인 <일출봉에 부는 바람>에서 썼듯이, 보자기가 만능 가방이라면 ‘베’는 만능 지게였다. 일출봉 분화구에서 수확한 띠를 볏단처럼 엮은 뒤, 그 볏단을 ‘베’로 지고 집으로 날랐다. 대나무 애기 구덕도 ‘베’가 있으면 간단히 등에 지고 바깥나들이를 할 수 있었다. 애기 구덕뿐만 아니라 물허벅이든 다른 바구니든 ‘베’로 둘러메고 나르면 되었다. 거추장스럽게 지게 없이도 온갖 물건을 지고 다닐 수 있었다. 우리 어머니도 바구니를 ‘베’로 지고 다니면서 땔감으로 쓸 솔잎 따위를 주워오셨는데, 솔잎뿐만 아니라 제주의 어머니들이 온갖 것을 지고 나르는 데 이 단순한 ‘베’가 큰 역할을 했다.

자치기
자치기

우리가 가지고 놀던 것들 가운데에도 단순한 것이 많아 직접 만들어 썼다. 자치기를 할 때 쓰는 자도 직접 만들었다. 나무로 된 팽이는 도구가 있어야 해서 쉽게 만들지는 못 했지만, 두꺼운 종이 가운데에 나무 막대를 끼운 팽이는 가끔 만들었다. 이런 간이 팽이는 종이 위에 어떤 색을 칠할 것인지 궁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여러 색깔로 둥근 띠를 그리면서 팽이가 돌 때의 색깔을 즐겁게 상상했다. 사철나무의 빨간 열매를 피스톨처럼 생긴 작은 통에 넣고 가는 막대로 쏘던 일도 생각난다. 막대로 빨간 열매를 힘껏 밀 때면 퐁퐁 하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제기도 금방 만들 수 있었다. 준비물은 네모난 비닐 한 장, 10원짜리 동전, 헝겊 쪼가리 하나, 실 또는 고무줄 약간. 네모난 비닐을 펴고 가운데 동전이 들어갈 자리를 여유 있게 남겨두고 양옆으로 폭이 약 0.5센티미터 정도 되도록 칼로 잘라준다. 이것이 나중에 나풀거리는 꽃술 역할을 할 것이다. 이렇게 칸칸이 다 자른 다음, 동전을 가운데 넣고 비닐을 돌돌 말아준다. 이때 동전 하나가 너무 가볍다싶으면 한두 개 더 넣어서 말아도 된다. 다 말았으면 동전이 있는 머리 부분에 헝겊 쪼가리를 둘러준다. 마지막으로 헝겊 쪼가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실이나 고무줄로 목을 잘 묶어주면 완성. 요즘 문방구에서 파는 제기는 머리가 너무 무거워 차기가 쉽지 않지만, 손수 만들던 예전의 제기는 몸이 가벼워 통통 잘 찰 수 있었다.

딱지도 수없이 만들었다. 한때는 좋은 종이만 보이면 딱지를 접을 생각뿐인 적도 있었다. 처음 딱지 접기를 배웠을 때,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딱지를 접을 수 있다니 신기하고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떠오른다. 다 쓴 공책이 있으면, 종이 두 장을 찢어 한 장씩 길게 세로로 접어준다. 이 종이 두 장을 십자가 모양으로 겹쳐 놓는다. 아래 놓여 있는 종이에서 몸통 밖으로 나온 날개 부분을 삼각형 모양이 되도록 대각선으로 접은 뒤, 이것을 몸통 쪽으로 한 번 더 접어준다. 이렇게 돌아가면서 날개를 세 번 접어주면, 마지막 접은 날개를 꽂을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여기에 꽂아주면 네 개의 날개가 딱 맞물린 딱지 완성. 이렇게 만들어진 딱지 아랫부분에 틈새가 하나 생겨난다. 여기에 종이를 더 끼워주면 더 힘 있고 두꺼운 딱지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두꺼워진 딱지가 과연 좋을까? 딱지를 만들 때 마다 늘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딱지 만들 때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이다. 공격형이냐 수비형이냐. 골판지처럼 두꺼운 종이로 만들면 힘이 좋아 상대방 딱지를 잘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딱지는 무게 중심이 높아 땅에 놓여 있으면 붕 뜨게 마련이다. 이런 허점 때문에 쉽게 넘어간다. 그렇다면 쉽게 넘어가지 않는 딱지를 만들어보자. 얇고 땅에 착 감기는 듯한 딱지. 이런 딱지는 잘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방을 뒤집을 힘 또한 약하다. 딱지 만들기는 언제나 이 둘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맞출지 고민하는 과정이다.

종이로 딱지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야구 글러브도 종이로 만들었다. 종이로 야구 글러브를 만든다고? 이렇게 의심할 독자분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로 종이로 야구 글러브를 만들어 야구를 하며 놀았다. 단지, 진짜 야구할 때 쓰는 공이 아니라 테니스공이나 문방구에서 파는 고무공처럼 가벼운 공이었을 뿐, 분명 종이로 만든 글러브로 야구를 했다. 독자들 가운데에도 해적 놀이를 하거나 야구장 같은 데서 쓰던 종이 모자, 신문지 따위를 접어 만들던 모자가 떠오르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런 모자를 접는 방법을 응용하여 야구 글러브를 접었는데, 지금은 방법을 모두 잊어버려 안타깝다.

야구 글러브를 접기에 가장 좋은 종이는 시멘트 포대였다. 누런색의 시멘트 포대 종이는 얇으면서도 질겨서 쉽게 찢어지지 않았다. 야구 글러브가 귀한 시절에, 종이 글러브가 있어서 좋았다. 종이 글러브 덕분에, 비록 테니스 공이나 고무공이지만 친구들과 신나게 야구를 할 수 있었다.

종이 글러브는 디자인 면에서 보통 글러브보다 더 나은 점도 있었다. 보통 야구 글러브에는 엄지손가락과 나머지 손가락 사이에 포켓 부분이 있다. 이 포겟의 머리 부분은 보통 일자로 되어 있다. 그런데, 종이 글러브의 포켓 머리를 지붕처럼 감싸도록 접는 형들도 있었다. 지붕처럼 감싼 머리 부분이 있어서, 포켓에 들어온 공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잘 막아줄 것 같았다. 비록 종이 글러브이지만 늠름해 보이기까지 했다.

일출봉의서녘 기슭에 성산포 마을이 조성되기 시작 할 무렵이다. 공장으로 보이는 집 몇 채, 거기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로 보아 탁주공장이나 패류가공공장이 아니었을까. 통밭알 포구에 떠 있는 배 두어 척, 이때 만해도 성산포는 매우 한적한 어촌이었다. (사진=제주시)

태삼이 삼촌은 바깥일에 능했다. 오촌 아저씨이지만 나보다 한 살 위라, 형 아우처럼 지냈다. 성산포에 있는 통밭알 바닷가에 갈 때면 태삼이 삼촌은 쇠꼬챙이 하나만 들고 갔다. 통밭알은 커다란 만을 이룬 곳인데, 건너편에 식산봉이 보였다. 썰물 때면 넓은 모래밭이 펼쳐졌다. 간혹 동네 아이들이 조개를 캐기도 했지만, 삼촌은 쇠꼬챙이 하나로 조개를 잡았다. 성산포에서는 ‘대칼’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맛’이라는 조개였다. 대나무 토막처럼 길고 껍질 색깔은 누런색이었다. 누런 껍질에 마치 나이테처럼 무늬가 져서 정말 대나무처럼 생겼다. 그래서 이름이 대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넓은 모래밭을 걸어 다니며 삼촌이 길다란 꼬챙이를 모래밭 속에 쑥 찔러 넣었다 빼냈다. 그런 동작이 여러 번 되풀이되면 큼지막한 대칼이 쑥쑥 딸려오곤 했다. 꼬챙이에 눈이라도 달린 것일까? 정말 신기하게도 삼촌은 꼬챙이 하나로 대칼을 잘도 잡아 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래밭에 작게 나 있는 숨구멍을 보고 꼬챙이를 찔렀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던 나는 마치 삼촌이 요술을 부리는 듯했다.

삼촌은 성산포의 바다를 잘 알아 낚시도 잘했다. 낚싯대 없이 그냥 낚싯줄만 쓰기도 했다. 성산포항 근처에서는 낚싯줄을 몇 번 빙글빙글 돌리다 멀리 던지는 식으로 낚시를 했다. 파도가 거친 날에는 바위 위에 올라가 낚시를 하기도 했는데, 이때는 낚싯대를 썼다. 낚싯대는 대나무로 삼촌이 손수 만든 것이었다. 대나무는 워낙 쓰임새가 많아 삼촌은 대나무로 이것저것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었다.

하루는 삼촌이 잠자리채를 만들 거라며 나를 불렀다. 학교에서 곤충채집 숙제가 있기도 했고, 잠자리든 매미든 곤충에 열을 내던 다른 아이들처럼 나도 잠자리를 잡고 싶었다. 그래서 잠자리채를 꼭 갖고 싶던 참이었다. 그런데 잠자리채를 만든다고 했지만, 둥그런 테도 그물망도 보이지 않았다. 책에서 보던 잠자리채를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삼촌이 들고 있는 것은 내 키보다 조금 큰 대나무뿐이었다. 도대체 대나무 하나로 잠자리채를 어떻게 만든다는 거지?

삼촌은 대나무 두세 마디 정도를 반으로 쪼갰다. 쪼개진 마디 끝에 끈을 조곤고곤 감았다. 그리고는 쪼갠 대나무 사이를 벌려 긴 막대를 가로로 꽂아 고정시켰다. 만화에서 많이 보던 모습. 열린 악어 입에 막대를 끼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그 모양새였다. 마치 두 팔 벌린 대나무가 와이 자 모양으로 고정되었다.

삼촌은 와이 자 대나무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다. 거미줄이었다. 보이는 거미줄마다 팔을 벌리듯 벌어진 대나무를 대고 감았다. 그렇게 몇 번 거미줄을 감으니, 벌어진 대나무 사이로 거미줄이 잔뜩 묻었다. 끈적끈적한 거미줄이 묻은 대나무. 대나무는 움직이는 거미줄이 되었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잠자리를 잡겠다고 조심조심 다가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움직이는 거미줄이 있으니 잠자리 근처에 가져다대기만 해도 쉽게 잡을 수 있다.

삼촌이 이 거미줄 잠자리채를 발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 제주 사람들이 자연에서 배우며 쌓아온 지혜가 거미줄 잠자리채에도 담겨 있을 것이다.

글_임영근

부산에서 태어나 여섯 살쯤에 부모님 고향인 성산포로 옮겨가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제주시로 이사가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육지’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학생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고, 졸업한 뒤에는 출판 편집자로 일했다. 현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고양시 인문학 모임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시사 월간지, <시대> ‘서양철학산책’, ‘이 책 저 책 읽으며’ 코너에 에세이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 산문집 '일출봉에서 부는 바람'을 출간했다. 이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의사이자 사진작가인 김수오 선생 작품과 함께 격주 목요일 제주투데이에서 게재한다. 어렸을 때 성산포와 제주시에서 자란 일이 글쓰기에 큰 힘이 됐다고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