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동네 어귀에서 여름 내내 그늘을 만들고 시원한 바람을 뿜어내는 멀구슬나무가 연보라색 꽃을 많이도 달았다. 큰 딸의 팔짱을 끼고 걷던 어머님이 “별나게도 고장을 하영 단 걸 보난 저 낭도 나추룩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이여(별나게 꽃이 많이 달린 걸 보니 저 나무도 나처럼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이다;편집자)”라고 하신다. 식물들은 죽을 때가 되면 온 힘을 다 짜내어 꽃을 왕창 피운다. 종을 유지하려는 눈물겨운 소신공양이다.
식물들은 빛, 물, 양분 등 생육환경이 좋으면 생식생장에는 관심이 없고, 키와 덩치를 키우는 영양생장에만 열중한다. 그러다가 생육환경이 열악해질 조짐이 보이면 자손을 남기기 위해 꽃피우는 데 모든 힘을 쏟는다. 식물들은 생육환경이 악화될 것을 어떻게 감지하고 꽃눈을 맺는 것일까?
첫째는 온도를 통해서 감지한다. 추위에 잘 견디는 대부분의 식물들은 일정기간 이상 낮은 온도에 노출되어야만 꽃눈을 맺는다. 때문에 가을보리를 봄에 파종하면 이삭을 맺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춘화(春花, vernalization)라고 한다. 오랜 경험으로 이 현상을 아는 농부들은 수박을 재배할 때 일부러 가을보리를 봄에 파종하고 그 사이에 수박모종을 심어 보리 스스로가 땅을 피복하게 하여 잡초를 방제하기도 한다. 또 봄무를 너무 일찍 심었다가 시샘추위가 오랫동안 계속되면 무 뿌리가 굵어지기도 전에 꽃대가 나와 먹을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농사는 때를 맞추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둘째는 밤의 길이를 통해서 안다. 식물들은 밤 길이의 변화로 환경의 변화를 예비한다. 저온 작물인 시금치와 상추 등은 밤의 길이가 짧아지면 앞으로 온도가 계속 상승해서 더 이상 살기 어렵다는 것을 예지하고 꽃대를 올린다. 반대로 고온 작물인 콩, 들깨 등은 밤의 길이가 길어지면 추위가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꽃을 피운다. 들깨 비닐하우스에서 밤에 불을 켜는 까닭도 인위적으로 밤의 길이를 짧게 해 꽃눈형성을 억제함으로써 오랫동안 들깻잎을 수확하기 위함이다.
또한 식물들은 일정 정도의 탄수화물이 축적되어야만 꽃을 피운다. C(탄소)/N(질소)율이 낮으면 식물들은 생식생장으로 전환하지 않고 영양생장만 계속하려고 한다. 지난해에 감귤이 지나치게 많이 달렸던 과수원에 감귤 꽃이 적게 오는 원인 중에 하나도 감귤나무가 과도한 착과로 탄수화물을 열매에 너무 많이 빼앗겨 C/N율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농부들이 감나무 줄기를 환상박피하는 이유도 광합성으로 축적한 탄수화물이 체관을 통해 뿌리로 내려가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가지의 C/N율을 높여 꽃눈 형성을 촉진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식물들은 환경의 변화와 자신의 상태에 따라 개체의 영달을 추구하는 영양생장을 할지 종의 유지를 위해 생식생장을 할지를 선택한다.
심지어 식물들은 상황에 맞게 성을 바꾸기도 한다. 사약의 재료였던 천남성은 뿌리에 충분한 영양분을 저장하기 전에는 수꽃만을 피우다가 해를 넘기면서 뿌리가 굵어지면 비로소 암꽃을 피운다. 그러다가 또 환경이 악화되어 뿌리가 가늘어지면 수꽃을 피운다. 이처럼 천남성은 뿌리에 축적된 영양분의 상태에 따라 성을 전환함으로써 크고 튼튼한 후손을 얻는다.
또한 식물들은 환경의 변화에 대비해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참다래, 은행나무처럼 수꽃과 암꽃이 피는 개체가 다른 자웅이주(雌雄異株), 배추나 무처럼 자기 또는 같은 계통의 꽃가루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가불화합성(自家不和合性), 도라지나 목련처럼 수술과 암술의 성숙시기를 달리하는 자웅이숙(雌雄異熟) 등은 속씨식물들이 근친교배를 막아 자식열세(自殖劣勢)를 예방하고 새로운 환경에 대비한 새로운 유전자조합 생성을 제고하기 위한 성 선택 전략들이다.
지금 차를 밖에 세워두면 차가 온통 송홧가루로 노랗게 물든다. 자동차가 짝을 찾지 못한 불쌍한 소나무 정자들의 무덤이 된 것이다. 소나무는 하늘로 쭉쭉 뽑아 올린 새 가지에 암꽃과 수꽃을 피우지만 분홍색 암꽃 하나를 가지 끝에 달고, 무수한 노란색 수꽃을 가지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달아서 키가 더 큰 나무의 꽃가루를 받으려고 한다. 그러니 낮은 가지에서 나온 대부분의 꽃가루는 암술의 선택도 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식물들은 평생 한 곳에 있어도 향긋한 냄새와 화려한 꽃의 색깔이나 특이한 모양으로 바람, 곤충, 새 등을 유인하여 자기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건장한 신랑을 맞아들이는 성 선택을 하고, 달콤한 열매와 특수한 구조 등으로 동물이나 물과 바람을 이용하여 씨앗을 자기영역 밖으로 퍼트리는 전략을 펼치면서 자기 세력을 확장한다. 이러한 성 선택과 이동 전략이 고도화되고 치밀할수록 그 종은 우점종이 된다.
선거는 식물들의 언어로 표현하면 미래에 대한 대책 없이 당장의 생존만을 계속 추구하는 영양생장을 할지, 내일을 위해 지속가능한 미래를 선택하는 생식생장을 할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또 선거는 익숙한 유전자 조합과 새로운 유전자 조합이 경쟁하는 장이자 세대와 세력 교체 여부를 결정하는 장이다.
지금 제주는 난개발로 인한 농지와 지하수, 곶자왈과 오름, 한라산과 바다 등 미래자원의 오염과 파괴, 부동산 가격 상승에 따른 부의 편재와 공동체의 상실, 온실가스 배출에 따른 기후위기 등 제주다움이 사라지면서 지속가능성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
내일 지방선거에서는 미래세대를 위해 소신공양을 하는 선택은 못할지라도 지금 당장의 나의 작은 이득에서 벗어나 최소한 지속가능한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기존의 시각과 기존의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영역에서 제주가치를 뿌리내리고자 하는 후보들을 선택하면 더욱 좋겠다.
쌀 증산왕의 아들로 태어나다. ‘농부만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뒤로 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대학에서 농사이론을 배우고 허브를 재배하다. 자폐아인 큰딸을 위해서 안정된 직업 농업공무원이 되다. 생명 파수꾼인 농업인을 꿈꾼다. ‘말랑농업’은 건강한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연결하는 글이다. 격주 화요일 독자들에게 제주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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