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을 제외하고 제주섬에서의 파업은 거의 끝났다.”
-미6사단, <G-2보고서>, 1947년 3월19일.

한반도는 30여년 만에 해방이 됐다. 하지만 동포를 탄압했던 친일 경찰들이 버젓이 그대로 경찰복을 입고 있고, 일제강점기 농산물 수탈 정책인 ‘공출제도’는 ‘성출제도’라고 이름만 바뀐 채 여전히 서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한반도는 냉전 체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분단될 조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3·1발포사건’이 일어났다. 1947년 ‘3·1기념대회’를 구경하던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경찰의 총탄에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쳤다. 공권력의 과잉 진압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민심을 폭발시켰다. 당시 한반도 이남을 점령했던 미군정이나 발포 책임이 있던 경찰 측 어디에서도 이 사태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제주 민중들의 분노는 ‘3·1대회’를 준비했던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중심으로 조직화됐다. 가진 것 없는 민중들이 선택할 수 있던 저항의 방식은 많지 않았다. 교사와 학생, 은행,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관리자와 노동자, 농민, 공무원까지 참여한 ‘3·10총파업’은 “필연적인 역사적 현상”(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이었다.

파업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당시 경찰 총수였던 조병옥 미군정청 경무부장이 제주로 왔다. 미군정은 전남과 전북, 경기도로부터 응원 경찰 400명 가까이 제주로 급파했다. 미군정은 발포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하는 대신 ‘3·1기념대회’와 파업을 주모했다는 혐의로 민주주의민족전선 간부들을 무더기로 검거했다. 이 같은 강경 대응에 총파업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진압됐다. 

일제강점기부터 자주독립을 향한 열망이 강했던 조천면도 검거 열풍을 피해 가지 못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판결문 자료에 따르면 발포사건 이후 1947년 말까지 관련 수형인은 모두 245명에 이른다. 이중 조천면 지역 출신 수형인은 11명이다. (박찬식, <1947년 제주3·1사건 연구-집회와 총파업 주도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32, 2006년)

표=박찬식, 1947년 제주3·1사건 연구-집회와 총파업 주도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32, 2006년
표=박찬식, 1947년 제주3·1사건 연구-집회와 총파업 주도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32, 2006년

 

“뭉치면 이깁니다” 대중투쟁으로 이어진 총파업 열기

3·1발포사건 이후 제주도 내 여러 지역에서 주민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조천면의 경우 학생과 청년들의 투쟁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1947년 5월 17일부터 미·소공동위원회(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설치된 회의)가 속개하고 6·10항일운동 기념일을 앞둔 상황에서 조천면 사회단체들은 적극적으로 ‘대중투쟁’에 나섰다.

삐라를 중심으로 펼쳐진 대중투쟁. (그림=김영화 작가)
3·1발포사건 이후 조천면에선 학생과 청년들이 주로 집회와 삐라 부착을 위주로 대중투쟁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림=김영화 작가)

투쟁 방식은 주로 집회와 ‘삐라(전단)’ 부착 및 배포로 이뤄졌다. 조천중학원생 이성규·김진태와 청년 부동선은 북촌리 민주청년동맹 간부 이달군의 지시에 따라 전단을 돌담에 붙이다가 경찰에 검거됐다. 삐라의 내용은 “강제공출 절대반대”, “민청해산명령 취소하라” 등이었다. 조천리에선 조천중학원생 김호선과 김응삼이 “입의보선법(立議普選法·과도입법의원 보통선거) 절대반대”, “회뢰(賄賂·뇌물)검사 박종훈을 매장하라”는 삐라를 작성해 일주도로변 벽에 붙였다가 경찰에 체포당했다. 

같은 해 8·15 기념일을 앞두고 대중투쟁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조천리에선 8월 13일 “8월 15일은 우리의 날”, “리민 여러분 뭉칩시다. 뭉치면 이깁니다”는 내용의 전단이 마을 곳곳에 붙었다. 15일 제주읍 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기념집회를 논의하기 위해 지역 청년들은 10일 선흘국민학교, 14일 조천리 야외 등에서 무허가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14일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기념집회는 취소됐다. 

이 과정에서 13일 조천면 북촌리에서 경찰과 지역주민들이 충돌해 부상자가 발생한 ‘북촌리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새벽 “공출 반대” 등이 적힌 삐라를 돌담에 붙이던 청년들이 순경에 적발됐다. 순경들이 청년들을 쫓는 과정에서 총격을 가했고 이 발포로 10대 소녀 장윤수를 비롯한 주민 세 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를 본 한 소녀가 정오쯤 마을 공회당에 있는 사이렌을 울리자 흥분한 주민들이 몰려들어 마을을 벗어나지 못한 순경 두 명을 붙잡아 폭행을 가했다. 또 북촌리 주민들은 오후 2시쯤 함덕파출소로 몰려가서 항의 시위를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북촌리 주민 40명이 검거됐고 이 중 22명이 재판에 부쳐졌다. 

북촌리 사건을 다룬 한성일보 1947년 8월17일자 기사(붉은 네모). (자료=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북촌리 사건을 다룬 한성일보 1947년 8월17일자 기사(붉은 선). (자료=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경찰, 신촌리 남로당 조직부 아지트 급습

해를 넘겨 1948년 1월초부터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남한 단독선거 실시로 굳어졌다. 이는 곧 한반도의 분단을 의미했기 때문에 남한 내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잇따라 반대 성명을 발표하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특히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막기 위해 강력한 투쟁계획을 세웠는데 제주지역에서도 이 방침에 따라 시위 등을 벌였다. 함덕리에선 2월 7일 김한추·한봉섭 등이 무허가 집회를, 2월 13일과 3월 초순엔 북촌리 청년들이 무허가 집회를 열어 “미·소 양군 동시 철퇴”와 “총선거 반대” 등을 촉구했다. 

앞서 같은 해 1월엔 남로당 제주도당 지도부의 비밀회의가 경찰에 적발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1월 중순 신촌리 출신 남로당 조직부 연락과장 김생민을 체포한 뒤 주요 정보를 확인해 남로당 조직부 아지트가 있던 신촌리를 급습했다. 

당시 조직부장은 김달삼(본명 이승진)으로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모임에 참석했던 남로당 간부 등 169명을 체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남로당 도당 지도부는 조직이 와해될 수 있는 최대 위기 상황에 부딪혔다. 
 

김용철 학생 고문치사, 조천 민심을 들끓게 하다

“경찰들은 ‘자기네한테 유리하게 써달라’하고, 또 마을 주민들은 ‘올바르게 안 해주면 죽인다’하고…. 삼촌이 상당히 망설이다가 이래도 화를 입고, 저래도 화를 입을 바에 옳은 말을 쓰겠다고 해서 있는 그대로 검안서를 썼다고 합니다.”

4·3무장봉기가 일어나기 한 달 전인 3월6일 조천 지역 민심을 들끓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조천중학원 2학년 김용철 학생(당시 21세)이 경찰에 끌려간 지 이틀 만에 숨진 것. 이에 경찰 측은 사망 원인을 지병에 의한 것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시신 전체에 시커멓게 멍이 든 점 등을 들며 주민들은 고문에 의한 죽음이라고 의심했다.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두고 조천중학원생들은 사인규명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고 지역 유지들 역시 군정당국에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부검은 이례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됐다. 1차 부검 시 경찰 측의 훼방이 있었다는 논란이 일자 미 고문관이 재부검을 지시했다. 이때 검시 의사 장시영은 "타박으로 인한 뇌출혈이 치명적인 사인으로 인정된다"는 감정서를 제출했다. 

지난달 17일 ‘3·10총파업 조사팀’이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덕성리 산에 위치한 안영훈 묘 앞에서 조카 안성모씨를 만나고 있다. (사진=양동규 작가)
지난달 17일 ‘3·10총파업 조사팀’이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덕성리 산에 위치한 안영훈 묘 앞에서 조카 안성모(왼쪽)씨를 만나고 있다. (사진=양동규 작가)

‘3·10총파업 조사팀’은 이번 조사 과정에서 당시 부검에 조천지역 의사도 참여했다는 증언을 새롭게 들을 수 있었다. 지난달 17일 광주를 찾아 조천에서 의원을 운영하던 안영훈의 조카 안성모씨를 만나 당시 상황을 전해들었다.  

묘비에 따르면 안영훈은 21세였던 1941년 제주로 가 조천리에서 김시탁이 운영하던 의원에서 근무하며 병원일을 배웠다. 야간엔 공부를 하며 25세에 의사검정고시에 합격, 1945년 조천면에서 의원을 개업했다. 그러던 중 28세였던 1948년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진 것. 

안씨가 작은아버지 안영훈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김용철 학생은 평소 쓰고 다니던 모자 안에 비밀 편지를 숨겨 관련 조직에 전달하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조천지서에 끌려간 김용철 학생은 “누구를 만났느냐”, “무슨 일을 했느냐” 취조를 받으며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 

부검에 참여했던 안영훈은 검안서를 경찰의 뜻대로 써주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작성했다. 이 때문에 시련이 시작됐다. 김용철 치사사건에 연루된 경찰들이 실형을 선고 받은 데다 안영훈의 먼 친척이 제주지역 대표적인 항일운동가이자 ‘3·1기념집회’ 당시 연설까지 맡았던 남로당 제주도당위원장 안세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사촌도 아니고, 육촌도 아닌데 그래도 이름 있는 안세훈 선생이 친척이니까. 경찰들이 그걸로 엮어서 우리 삼촌이 ‘남로당에 포섭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셨던지요. 아주 이루 말할 수 없이 목숨만 겨우 부지했다고 합니다.”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제주신보 1948년 3월12일자 기사(붉은 네모). (사진=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제주신보 1948년 3월12일자 기사(붉은 네모). (사진=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지면서 조천중학원 학생들은 사인 규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미군정은 당시 조천지서 경찰관 5명 모두를 구속해 사태를 진정하고자 노력했다. 이 사건은 3월 14일 모슬포지서에서 청년 양은하가 고문 도중 목숨을 잃은 사건과 함께 유엔한국임시위원단 4차 회의에서 거론되며 국제적인 조명을 받았다. 

조천면 지역은 청년을 중심으로 대중투쟁을 통해 남한 단독선거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데다 김용철 고문치사 사건 등으로 인해 민심이 격화된 분위기,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최고 지도부의 비밀회의가 적발되면서 미군정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됐다. 결국 조천면은 4·3 당시 가장 치열한 무력 충돌과 극심한 주민 집단학살의 피해 지역이 되어버렸다.

※[다시 4·3을 찾다:3·10총파업에서 4·3으로] 연재에서 마을 명칭은 당시 행정구역 표기에 따른다. (예. 조천읍 →조천면, 제주시→제주읍)

증언으로 들여다본 현장

※북촌리 8·13사건(일명 ‘삐라 사건’)

‘3·10총파업 조사팀’은 지난 3월 29일, 1947년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북촌리 장윤승(남, 1933년생, 90세, 당시 13세)을 만났다. 장윤승의 누나 장윤수(93세, 1930년생, 당시 19세/ 2021년 사망)는 1947년 8월 13일 북촌리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당시 총상 입은 가족들과 북촌리 청년들 200여 명은 함덕지서를 찾아가 강렬히 항의했다. 지서의 집기를 부수고, 난동을 부리며 업무를 방해했다고 경찰은 이재훈 등 여러 명을 구속했다. 장윤승의 아버지 장기룡도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누님 장윤수는 6개월간의 병원 치료를 받고 회복되어 북촌리로 돌아왔다.

당시 상황에 대한 장윤승(90세, 북촌리)의 증언 내용이다. 

▷해방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일제강점기 때 동네 항일 분위기는 그다지 없었습니다. 그때는 일본 사람으로 감화된 것이지요. 여기는 독립운동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해방되니 구장 했던 사람들은 “너 이 새끼 (우리를) 착취했었지”해서 동네 사람들이 뭐라뭐라 해서 마을에서 도망쳤습니다. 치안대라는 조직이 있었죠. 그때는 청년들이 좀 셌습니다. 가다오다 뭣 하면 경찰관하고 경비대(군인)들이 와서, “너네, 어디 청년들이 너희들 와서 가르친다면 너네 어머니 아버지도 다 죽여분다고.” 협박했습니다. 경찰관이나 군인이 온다면은 우리도 다 숨어야 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걸리면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지난 3월29일 ‘3·10총파업 조사팀’이 장윤승씨를 북촌리 자택에서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3월29일 장윤승씨가 북촌리 자택에서 ‘3·10총파업 조사팀’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장윤수 누님이 총 맞을 때 상황은 어땠나요.

“집에 있는데 2년 위 선배가 “너네 누님 죽었다”고 말해줬습니다. “어디서?”, 학교 교문 앞에서 죽었다고. 아, 그런 말을 들으니 기가 막혔죠. 나중에 보니까 청년들이 삐라를 붙인 겁니다. 마을 집담에. 시커먼 돌 위에 글을 쓴 삐라를. 남로당이 무슨 뭐 한다고… 뭐뭐를 반대하고… 그런 거를 써 놓은 삐라를 붙인 겁니다.

경찰관들은 “누가 붙였냐! 누가 했냐!” 풀이 바싹 마른 걸 보니까 밤에 붙인 거 같습니다. 담마다 집집마다 전부 하얗게 붙여 놨습니다. 그걸 ‘삐라 사건’이라 합니다. 경찰들이 “이거 누가 했어! 누가 했어!” 하는데 누가 했는지 어떻게 압니까? 우리 마을을 왜 괴롭히냐고. 청년들이 어디 숨었다가 나와가지고 항의하고. 북촌리 ‘상회동산’ 큰 나무에 사이렌이 걸려 있었습니다. 사이렌은 뱃고동 소리나 마찬가지고. 손으로 돌리면 ‘빵~’. 뱃고동 소리처럼 ‘빵~’ 소리가 납니다.

당시 사이렌 울리면 마을 사람들이 다 나왔습니다. 그날도 경찰관이 북촌 사람들을 죽이려 한다고 사이렌을 울렸습니다. 북촌 사람들이 와~ 학교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돌멩이들 주우면서. 경찰관과 대항하려고. 경찰이 쏜 총에 우리 누님하고, 40세 난 사람하고, 인봉이 아방하고, 또 양수 어머니하고. 인봉이 아방은 우리 아버지하고 동갑이니까, 55세였습니다. 발 맞은 사람도 있었고. 그 때 네 사람. 우리 누님이 제일 크게 다쳤습니다.

지난 3월29일 ‘3·10총파업 조사팀’이 1947년 당시 사이렌이 걸려 있던 옛 북촌리 상회동산을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3월29일 ‘3·10총파업 조사팀’이 1947년 당시 사이렌이 걸려 있던 옛 북촌리 상회동산을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북촌리 사람들이 함덕지서 앞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고요.

그렇죠. 그때 총에 맞았는데, 그때 자동차가 없었습니다. 누님이 총 맞아서 제주시 병원에 가야 하는데, 트럭에 사람을 태워 다닐 때 아닙니까? 트럭만이라도… 누님은 피가 막 나고… 다행히 학교 보건소에 약품이 있어서 응급 처치를 하고, 함덕지서에 가서 차를 대라고. 지금 함덕의원 부근이 함덕지서가 있었습니다. 함덕출장소로. 우리 아버지가 화나서 책상을 엎고 할 거 아닙니까? “우리 딸 살려내라”고. 책상 위에 있는 전기도 부수고. 유리창도 깨고. 우리 딸 살려내라고. 자동차 빨리 대라고. 제주시 도립병원의 문종후 외과과장이 북촌리에서 간 네 사람을 다 치료해 주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날 다 (북촌리로) 돌아왔는데, 우리 누님은 못 왔습니다. 중상이라서.  

▷아버지는 재판받았습니까.

예. 아버지는 4·3희생자(2018년 신고)가 됐습니다. 경찰이 당신네 기물을 부쉈다고. 딸 살려내라고 한 것이 무슨 죄가 됩니까? 6개월 징역인가, 3년 집행유예 받았습니다.(1947년 9월 26일 장기룡의 판결문 참고) 

▷누님이 4·3후유장애 불인정 받으셨다고 하는데.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우리 누님의 총 맞은 사건이 들어 있습니다. 국가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 해서 자꾸 공적서를 써서 바쳐도 (4·3후유장애) 인정이 안 되었습니다. 아무런 병이 없다고요. 이재훈(북촌리)이가 누님이 다쳤을 때 약도 발라주고 했다고 보증을 서도 안됩디다.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장윤승은 누나 장윤수를 4·3후유장애 희생자로 신청했으나 최종 불인정 되었다. 총에 맞고 죽을 뻔한, 현장에서 벌어진 구체적인 사실을 목격한 장윤승은 누나의 4·3후유장애 불인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1947년 8월, 당시 장윤수 총상 사건과 관련한 사실을 입증할 구체적인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4・3진상규명위원회는 장윤수에게 후유증이 없다며 불인정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정리=제주4·3연구소 이사 김은희>

제주투데이는 올해 3·1발포사건 및 3·10총파업과 관련한 문헌자료를 수집·분석하고 도내 12개 읍면별 현지 조사를 진행, 결과를 20여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공동 기획했으며 조사·연구팀은 박찬식 제주문화진흥재단 이사장이 팀장을 맡고 조사·집필 담당 연구원에 강호진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김은희 제주4·3연구소 이사, 박성인 제주투데이 대표,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장, 조수진 제주투데이 기자, 영상·삽화 등 기록 담당 연구원에 김영화 작가, 양동규 작가가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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