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10월 24일자 제주신보 기사. '불멸의 공훈을 추념'이라는 제목으로 박진경 대령 추모비 제막식을 알리는 내용이다.
1952년 10월 24일자 제주신보 기사. '불멸의 공훈을 추념'이라는 제목으로 박진경 대령 추모비 제막식을 알리는 내용이다.

잘못된 탄생

애당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물건이었다. 박진경 추도비를 말함이다. 1948년 5월 6일 부임하여 불과 한 달 열흘 뒤인 6월 18일, 부하들의 총에 맞아 숨진 연대장을 추도하는 비석이다.

널리 알려진 그의 폭언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전임 연대장 김익렬 회고록에 나온다. 박진경의 참모였던 임부택 대위의 법정 증언에서도 이 섬뜩한 취임사는 반복 소개된다.

작전 한 달 만에 6000 명을 체포했다는 당시 언론 보도(<조선일보>, 1948년 6월 12일) 역시 그의 진압이 무차별적이었음을 암시한다. 미군정은 크게 만족하여, 부임 후 채 한 달이 안 된 그를 대령으로 특진시킨다. 그런 인물이었기에 학살 주체 세력들은 그를 추모함이 당연하다. 하지만 제주도민의 입장은 정반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설립 주체가 ‘제주도민 및 군경원호회’다.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1월에 세웠기 때문이다. 전쟁은 군의 권력을 극대화한다. 다른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단죄’를 말해야 할 제주도민이 엉뚱하게도 ‘추모’의 대열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1952년 박진경 추도비가 처음  세워진 제주방송국. 이후 1953년 사라봉 충혼묘지, 1985년 아흔아홉골총혼묘지, 2022년 제주공설묘지입구로 옮겨졌다.(사진= 제주100년)
1952년 박진경 추도비가 세워진 '제주방송국' (사진= 제주100년)

탄생에서 ‘역사의 감옥’까지

처음 건립된 장소는 전농로에 있는 옛 농업학교 터, 11연대 본부가 있던 곳이다. 1952년 설립 당시에는 ‘제주방송국’이 있었다. 지금의 교보생명 빌딩 근처다. 1952년 10월 24일자 <제주신보> 기사, “수일 내에 제주방송국내에 건립될 것이다. 이 건립 장소는 고박대령이 전사한 장소인 것이다”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사라봉 옆에 제주시충혼묘지가 조성되면서 그곳으로 옮겨졌다. 그 뒤 1985년 도시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충혼묘지가 노형동 아흔아홉골로 이전하자, 이 비석도 따라 옮겨갔다. 이때 비석 마모가 심하다고 하여 새롭게 제작된다. 최근 논란의 주인공은 1985년 재제작된 비석이다.

물론 오래 전부터 이 비석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4·3 진상 규명의 진척에 따른 당연한 결과다. 제주도민 학살자를 추모한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2004년에 펴낸 <제주역사기행>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다. 제주도의회에서는 2017년 이상봉 의원을 시작으로 해서 김경미, 홍명환, 강철남 의원이 잇따라 철거를 요청했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제주시충혼묘지를 국립제주호국원(국립묘지)으로 격상, 확장시키는 과정에서였다. 이 시설을 새롭게 관할할 국가보훈처가 문제의 비석 인수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 비석은 공공사업 시행에 방해가 되는 ‘지장물(支障物)’로 지정된다. 새롭게 국립묘지를 만드는 데에 방해가 되니 옮겨가든지, 치워버리라는 의미이다. 이에 제주도보훈청이 나서서 유족, 마을회 등 13곳에 인수, 이설을 타진했다. 그러나 모두가 거절했다.

작년(2021년) 말 국립제주호국원 개원이 다가오자, 제주도보훈청은 제주시공설묘지(한울공원) 입구인 연동 산132-1번지로 이 비석을 이설했다. 이곳은 ‘월남전 참전군인 위령’사업을 목적으로 제주시로부터 이관 받은 토지다. 현재 이곳에는 월남전 참전군인 위령 시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박진경 추도비는 월남전과는 관련이 없다. 그런데 왜 거기에?

2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하는 과정을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왼쪽)이 지켜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2022년 5월 2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훈청이 ‘4·3 도민 학살 주역’이라 평가 받는 박진경 추도비에 씌운 철창 조형물을 철거하는 과정을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왼쪽)이 지켜보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어쨌거나 철거 요구를 무시하고 다시 옮겨 세워진 된 박진경 추도비는 뜻있는 도민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그리하여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등 16개 단체가 그 비석 위에 철창 조형물을 설치하고 ‘역사의 감옥’이라 이름을 붙여줬다. 올해 3월 10일의 일이다. 이에 이 부지의 관할권을 가진 제주도보훈청이 철거를 요청하더니, 급기야 지난 5월 20일, 철거 행정대집행을 통해 ‘쇠창살’을 뜯어내고야 말았다. 그렇게 다시 이 비석은 단죄에서 벗어나는 듯하다.

비석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날의 철거 행정대집행은 정당한 것인가? 정당하다. 제주도보훈청의 승인 없는 시설물이기 때문이다. 그 토지의 관할권은 제주도보훈청이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철창 감옥’은 불법 시설물이다. 도덕적, 역사적 정당성은 논외로 하겠다. 법적 정당성으로는 행정대집행이 옳다. 그런 만큼 이것을 가지고 제주도보훈청과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다.

내가 문제 삼는 건 다른 데에 있다. 이제 묻겠다. 반드시 답을 해주길 바란다. 충혼묘지에서 현재의 장소로 이전한 권한은 누가 부여했는가? 제주도보훈청에 그럴 권한이 있는가? 본래 충혼묘지는 제주시 주민복지과 관할이었다. 따라서 그곳에 설치된 시설물을 직접 처리할 권한이 제주도보훈청에는 없다.

아니, 더 근본적인 문제로 들어가자. 이 비석을 처리할 권한은 비석의 주인에게만 있다. 그렇다면 이 비석의 주인은 누구인가? 설립한 사람이다. 누가 설립했는가? 비문 끝에 나와 있다. ‘濟州道民及軍警援護會一同’이라 되어 있다.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가 함께 만들었다는 말이다.

1952년 11월7일 '제주도민 및 군경원호외 일동' 명의로 세운 박진경 추도비. (사진=이영권)
1952년 11월7일 '제주도민 및 군경원호외 일동' 명의로 세운 박진경 추도비. (사진=이영권)

지금은 군경원호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주도민만이 이 비석의 유일한 주인인 셈이다. 제주도민만이 소유권을 가지며, 제주도민만이 처분 권한을 가진다. 그리고 그 ‘제주도민’은 현실에서 ‘제주도의회’라 말할 수 있다. 도민의 대의기관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제주도의회가 나서서 소유권을 명확히 하고, 그 소유권에 대한 법적 인정을 확보해야 한다.

다시 보훈청에 묻는다. 이 비석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다. 없다. 그렇다면 관리권이 있는가? 있다면 그 권리를 증명할 근거자료를 공개하라. ‘관행’ 따위의 흐릿한 단어를 들어 주장하지는 않길 바란다.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제주도보훈청은 이제 더 이상 이 비석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결자해지(結者解之)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제주도민이 세웠으니, 제주도민이 처리한다.

역사교육 교재가 된 박진경 추도비

이제 우리 제주도민은 이 비석을 어떻게 처리함이 옳겠는가? 혹자는 말한다.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의 전두환 비석과 같은 대우를 해야 한다고. 구 묘역에 막 들어서면 ‘전두환 대통령...민박...’ 등의 글자가 새겨진 비석 파편이 바닥에 박혀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비석 파편을 지근지근 밟고 지나간다.

원래 이 비석은 광주학살이 자행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전두환이 광주 근처 담양의 한 마을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민박했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학살의 기억이 생생할 때라 날것의 분노가 그러한 방식의 응징으로 나타났다.

(사진=한내)
노동자역사 한내 4·3 역사기행 참가자들이 4·3을 남로당 폭동으로 규정하는 현수막 위에 "당장 이따을 떠나라"를 현수막을 내걸었다. (사진=노동자역사 한내)

하지만 4·3은 다르다. 세월도 제법 흘렀다. 그런 만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학살 책임자들은 여전히 뻔뻔하다. 단 한 명의 처벌도, 반성도, 사과도 없었지만 분노만으로 해결할 일은 아니다.

박진경 추도비는 이제 그 자체만으로 역사가 되었다. 그런 만큼 파괴할 게 아니라 역사유물로 다뤄야 한다. 자랑스러운 과거만을 기억하는 건 허약한 역사의식을 만든다. 부끄러운 역사일수록 분명하게 드러내어 정면에서 바라보게 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의식에 근육이 붙는다.

이 비석은 그런 역사교육을 위한 교재다. 이 교재를 활용하여 누가, 왜, 어떤 배경에서 만들었는지부터, 그를 둘러싸고 어떤 기억 투쟁들이 벌어져왔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이 부끄러운 비석을 통해 2022년 오늘날까지도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성찰하게 해야 한다. 너무나 쉽게 ‘4·3의 완전한 해결’을 말하면서, 비석 하나 처리 못하는 정치인들의 비겁과 기만을 알려줘야 한다. 학살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추도비라는 상징물을 다시 살려 활용하려는 학살세력의 영악한 술책을 주시하게 해야 한다.

'영령들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이 비석을 짓밟아 달라'고 적혀있는 전두환 비석이 현재 광주 북구 옛 망월묘역(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 향하는 길바닥에 묻혀 참배객들이 밟고 지나가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사진=이영권)
'영령들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이 비석을 짓밟아 달라'고 적혀있는 전두환 비석이 현재 광주 북구 옛 망월묘역(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 향하는 길바닥에 묻혀 참배객들이 밟고 지나가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사진=이영권)

박진경 추도비 관리권을 제주4·3평화재단에

이 일을 누가 맡을 것인가? 제주4·3과 관련하여 가장 공신력 있고 규모가 큰 기관은 제주4·3평화재단이다. 제주4·3평화재단의 여러 사업 중에는 학술연구와 교육이 있다. 이를 위해서 다방면의 자료도 수집한다. 박진경 추도비도 하나의 중요한 자료다. 그런 만큼 이 자료에 대해 수집, 보관, 관리, 활용에 나서야 한다.

이 비석에 대한 소유권은 제주도의회가 가져야 한다고 앞서 말했다. 소유권 확보 후, 제주도의회는 제주4·3평화재단에 영구 임대 방식으로 관리권을 넘겨야 한다. 제주4·3평화재단은 이 비석을 ‘역사유물’로서 관리해야 한다.

4·3평화공원의 어느 공간에 ‘추도’를 위한 비석이 아니라, ‘연구, 교육’을 위한 비석으로 다시 세워야 한다. 유물을 소개하는 안내문이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박진경 추도비를 쉬게 하자. 출생과정부터 현재까지 고생이 많았다. 잠시나마 투옥까지 겪지 않았었나. 기억의 전쟁터에서 이제 놓아 주자. 유물로서 대접받을 때가 되었다.

이영권

역사사회학을 전공하고 《새로 쓰는 제주사》, 《제주역사기행》 등을 저술한 이영권 박사는 제주4.3연구소, 제주참여환경연대 등에서 활동한 바 있고, 일선 학교현장에서 역사 교사로 오랜 시간 교편을 잡았다. 올해부터 제주투데이 논설위원으로 위촉된 이영권 위원의 칼럼은 매달 두번째 금요일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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