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삶의 유일한 탈출구는 스크린 속이었다.

월요일 아침이면 신문 귀퉁이에 있는 영화 시간표를 스크랩하고 개봉 날짜를 꼼꼼히 메모했다. 그리곤 주말을 기다려 영화관을 찾았다. 중학생이었던 90년대는 헐리우드 영화와 더불어 홍콩영화가 붐이었다. 극장마다 각기 다른 영화를 상영하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들지만) 단관개봉 시절이었다.

코리아극장과 푸른극장, 동양극장이 있던 칠성통과, 아카데미 극장이 있던 한짓골 일대를 싸돌아 다녔다. 상영관은 매캐한 담배연기와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눅눅한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어둠속을 더듬어 두툼한 패브릭 의자에 앉으면  곧장 하얀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었다.

<영웅본색>, <첩혈쌍웅>, <정무문> 등의 비장한 홍콩 느와르는 중학생에게는 조금 버거웠지만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은 언제나 황홀했다. 무엇보다 영화 곳곳에 흐르는 음악들은 묘한 긴장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고등학생이 되자 영화관에 가는 횟수는 줄었다. 기타에 푹 빠졌기도 했고 바야흐로 비디오의 시대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더불어 <로드쇼>와 <스크린>, <키노>등의 영화 전문잡지들이 전성시대를 맞았다. 나 역시 열심히 영화잡지를 탐독하고 비디오대여점을 돌아다니며 희귀영화들을 찾아다녔다. 밤이면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들으며 영화 속 장면들을 상상했고 나의 음악들을 떠올렸다.

음악 인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영화는 갓 스무살 된 어느 봄날에 보게 되었다.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올리버 스톤 감독의 <더 도어스>. 미국의 사이키델릭 락밴드 The Doors의 짐모리슨의 일대기를 다룬 음악 영화였다. 상영 첫 날 조조할인으로 보무도 당당히 입장한 나는 내리 세 번을 연이어 관람했다. 그 엄청난 환각의 세계와 공간을 울리는 사이키델릭 사운드, 파괴적인 스토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후로 왠만한 음악영화로는 성이 안찼다.  내용은 미적지근했고 무대에서의 연기는 후줄근했다. (물론 또다른 의미에서 엄청나게 좋아하는 <벨벳 골드마인>은 예외다)

그러다 10여년이 지난 후 재즈를 접하면서 <도어스>의 뜨거움과는 다른  차갑고 고요한 서정의 영화  <라운드 미드나잇>을 만났다. 영화는 1950년대 노쇠한 재즈뮤지션의 거친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전설적인 테너 색소폰 연주자 테일 터너는 마약과 알콜중독에 찌든 삶을 살고 있다. 미국에서의 인기가 차츰 시들어 갈 무렵 새로운 삶을 계획하며 프랑스로 이주한다.

클럽에서 연주하던 도중 입장료가 없어 환풍기 창에 귀를 대고 듣고 있던 골수 재즈팬 프란시스를 만난다. 오랫동안 테일 터너를 흠모하던 프란시스는 그를 극진히 보살피며 그의 재기를 돕게 된다. 영화는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과 테너 색소포니스트 레스터 영을 모델로 했으며 실제 프란시스 포드라스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서사는 느슨하지만 농밀하게  녹아든 음악과 만나는 순간 매혹적으로 변한다. 특히나 파란 빛을 머금은 파리의 밤거리, 담배연기 자욱한 재즈 클럽(Blue note) 씬 등은 영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이미지를 전해준다. 주연인 타일 터너역엔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자 '덱스터 고든'이 맡아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허비 행콕, 존 맥러플린, 웨인 쇼터, 토니 윌리엄스, 론 카터 등 여러 재즈뮤지션들 역시 직접 출연해 무대에 선다. 마치 라이브를 보듯 리얼한 사운드와 현장감은 서사와 맞물려 더욱 깊이 있게 다가온다.

특히 <Body And Soul>을 연주하는 장면은 왠지 모르게 처연해 몇 번을 돌려 봤을 정도였다. 공항에서 홀로 터너를 기다리는 쓸쓸한 장면에 흐르는 "The Peacock"의 쓸쓸한 색소폰 선율 역시 잊을 수 없다. 영화의 제목이자 O.S.T의 타이틀 곡인 <Round Midnight>은 델로니어스 몽크 작곡의 너무도 유명한 스탠다드 곡이다. 이질적인 리듬과 투박한 멜로디의 Monk 특유의 작법과는 다른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을 가졌다. 하강하는 두터운 베이스 음율을 타고 터져 나오는 바비 맥퍼린의 중성적인 스캣은 신비함과 함께 자정의 음울함을 그대로 들려준다.

쳇 베이커의 목소리와 트럼펫 소리가  전하는  고즈넉한 발라드 곡 <Fair Weather>, 긴박한 구성의 <Berangere's Nightmare>의 독특함도 좋다. 경쾌한 스윙넘버 <Una Noche con Francis>는 이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버드 파웰이 프란시스를 위해 작곡한 곡이다.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뉴욕에 사는 친구 허쉘(레스터 영)의 사망소식 듣고 사라진 터너. 그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프란시스. 어디선가 색소폰 소리가 들리고 어두운 골목에 고개 숙여 앉아 있는 터너를 발견한다. 그는 울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가사가 생각이 안 나 연주를 할 수가 없어" 프란시스는 따스한 목소리로 그곡의 가사를 알려준다.  이윽고 터너는 무대에 서서 허쉘을 추모하는 듯 깊은 블로잉으로 <Autumn in New york>을 연주한다.

영화는 테일 터너의 독백으로 끝난다. "나는 말이지, 찰리 파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길 때까지 살고 싶어. 그리고 레스터 영 공원, 듀크 엘링튼 광장, 심지어 나의 이름이 들어간 거리까지 말이야"

양진우
양진우

음악행위를 통해 삶의 이면을 탐구해나가는 모험가,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양진우 씨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The Moon Lab 음악원 대표이며 인디레이블 Label Noom의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매달 네번째 월요일 음악칼럼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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