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육지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딸이 결혼적령기가 될 정도인 15년 정도가 지나면 가구를 만들기 딱 좋은 크기로 자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동나무는 마당이 넓은 집이라야 심을 수 있었을테니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는 집은 제법 살만한 집이고 딸이 태어난 집일 것이다.

제주에서도 집집마다 심어져있는 나무가 있다. 바로 감나무이다. 가끔 웃드르라고 불리는 중산간지대의 밭 구석에도 감나무가 있는 곳이 있는데 이것은 과거에 민가가 있었던 곳이란 증거일만큼 제주 사람들은 집집마다 감나무를 꼭 심었다.

이 멋진 감나무는 본인 집을 지으면서 심어진 감나무다. 집을 지으면 꼭 감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사진=고진숙)
이 멋진 감나무는 작가의 부모님이 집을 지으면서 심어진 감나무다. 집을 지으면 꼭 감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사진=고진숙)

이 감은 먹기 좋은 단감류가 아니라 고염에 가까운 작고 단단하면서 씨는 크고 매우 떫은 토종감이다. 게다가 감나무로는 가구는커녕 몽둥이 하나 만들기 어려울 만큼 약하다. 그런데도 집집마다 심은 이유는 옷감에 염색을 하기 위해서이다.

제주 토종감의 꽃은 고욤꽃과 거의 흡사하다. (사진=고진숙)
제주 토종감의 꽃은 고욤꽃과 거의 흡사하다. (사진=고진숙)

7~8월에 딴 풋감을 으깨어서 면직물에 염색하면 처음엔 빨갛다가 차츰 짙은 갈색을 띄게 되는데 이 옷감으로 만든 옷을 갈옷이라고 한다. 제주 전통의복을 꼽으라면 제주사람들은 누구나 갈옷을 꼽을 만큼 대표적인 제주 의복이다.

갈옷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29년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생활상태 조사에서 보인다. 그런데 제주의 풍토에 대해 시시콜콜 기록하길 좋아했던 조선시대 관리들의 제주여행기에는 이상하리만치 갈옷을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김상헌이 1601년에 펴낸 제주 풍물기라고 할 수 있는 <남사록>에 ‘감 또한 제주성안에 많이 있으나 크기가 새끼감과 같고 씨가 많으며 맛이 없다’란 표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식 복식이 보급되던 1970년 이전인 1950~1960년대 사진에는 제주의 성인 대부분은 갈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주 사람들은 언제부터 갈옷을 입었을까?

때가 잘타지 않고 세탁이 편리하기 때문에 제주 여성들은 거의 일상복처럼 갈옷을 입고 생활했다. 남자들은 바닷일을 하는데도 방수성과 자외선 차단효과가 뛰어난 갈옷을 입었고 목축일을 할 때 가시에 찔리지 않고 풀이슬에 젖지 않는 갈옷을 입었다. (사진=고진숙)
때가 잘타지 않고 세탁이 편리하기 때문에 제주 여성들은 거의 일상복처럼 갈옷을 입고 생활했다. 남자들은 바닷일을 하는데도 방수성과 자외선 차단효과가 뛰어난 갈옷을 입었고 목축일을 할 때 가시에 찔리지 않고 풀이슬에 젖지 않는 갈옷을 입었다. (사진=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갈옷이란 갈색옷이란 뜻에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그 유래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중국에서는 서민이나 하층민이 입는 옷을 거친옷이란 뜻으로 갈의라고 불렀다. 칡으로 짠 베는 갈색을 띄었기 때문이다. 또 고구려, 부여, 말갈, 몽골, 선비, 돌궐, 숙신 등 유목민족들의 노동복이 갈의였는데 이것은 품질이 나쁜 모직물로 만든 옷이었다.

제주에 처음 살았던 사람들은 주호, 즉 바다건너 오랑캐의 마을이란 뜻으로 불렸는데 이들의 입은 옷이 동물가죽으로 만든 옷이었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나 부여계 사람들이 제주에 살면서 갈의를 입었다고 보기도 한다. 탐라는 모직물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했다. 원은 탐라에 해마다 모직물을 100포씩 바치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탐라인들도 모직물로 만든 갈의나 칡베로 만든 갈의를 입고 살았을 것이란 추측은 쉽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주는 삼베가 거의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베는 비옥한 땅에서만 자라는 식물인데, 제주에선 그런 비옥한 땅이 많지도 않았고 설령 있다하더라도 먹거리를 심기에도 빠듯한 형편이었다. 아주 드물게 텃밭에 삼을 심어서 베를 짜 수의를 만드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삼베나 비단, 면화 같은 옷감은 모두 외지에서 수입해야 했고, 그러다보니 옷감이 귀했다. 그래서 제줏말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미젱 괴젱 밥 줄 인 셔도 미젱 괴젱 옷 줄 인 읏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밥은 줄 수 있어도, 옷은 줄 수 없다는 뜻으로 그만큼 옷이 귀함을 나타낸 말)

그만큼 귀하다보니 서민들의 옷은 말이 아니었다.

부인은 치마가 없었으며 다만 삼베끈으로 허리를 동이고 두어자 베로 앞뒤를 꿰매서 음부를 덮을 뿐이다.<남명소승>

섬사람 가운데 가난하여 옷이 없는 자는 흔히 멍석과 도롱이를 쓰고 추위를 견디고 있다.<남사록>

*<남명소승>은 임제가 과거시험에 합격한 해인 1577년에 제주 목사로 와 있던 부친을 찾아와서 4개월가량 머물 때의 일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갈옷은 갈의와는 조금 다르다. 갈의에서 나온 말이란 것은 추측할 수 있지만 갈옷은 고유명사이다. 즉 감물을 들인 옷만을 갈옷이라고 한다.

갈옷을 만들기 위해 풋감을 으깨는 모습. (사진=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갈옷을 만들기 위해 풋감을 으깨는 모습. (사진=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감물을 들인 옷은 제주만의 고유한 옷은 아니다. 한국, 일본, 중국에서는 감을 이용해서 염색을 하면 옷감이 질겨지고 방부성과 방수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이규태 코너로 유명한 언론인 이규태에 의하면 한국 남부지방에서도 오래전부터 노동복으로 갈옷을 많이 입었다고 하였다. 더러움이 덜 타고 세제를 쓰지 않아도 때가 잘빠질 뿐만 아니라 특별히 손질을 하지 않아도 구겨지지 않으며 좀이나 벌레가 일지 않는데다 땀에 젖은 옷을 그냥 두어도 썩거나 상하지 않고 통풍이 잘되고 가시 같은 잡물이 들러붙지도 않으며 심지어 화살이나 총탄에도 강해서 방탄복의 구실도 함으로 군복으로도 적합했다고 한다.

1600년대 무덤에서 발견된 3점의 면직물 중 감즙 염색한 면직물이 다른 섬유에 비해 파손됨이 적고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것이 확인됨으로써 감즙의 방부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갈옷은 근대 이후 제주를 제외하곤 맥이 끊겼다.

일본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에서도 감물을 들인 옷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히 여행을 다닐 때 밤이슬을 맞으며 야숙을 할 경우 방수성이 뛰어나 여행복으로 사용한다는 말이 나온다. 다른 문헌에서도 하층민들이 감물을 들인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중국은 이미 기원전에 감즙을 가죽가공에 이용했다. 또 명대 문헌에도 감칠을 어망, 우비나 우솔, 부채 등의 염색에 이용한 기록이 있다. 감즙이 가진 방부성과 방수성은 매우 일찍부터 이용되어온 것이다.

제주에 감즙염색법이 넘어 온 것은 언제일까?

1382년에 명을 세운 주원장은 원의 제후국인 운남을 평정하고 몽골의 귀족인 양왕의 태자 백백태자와 그의 아들 육십노 등 상류사회 인물을 탐라에 이주시킨다. 1392년에도 역시 양왕의 후손인 애안첩목아와 그 가족들이 탐라에 합류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고씨 종친회 자료와 제주의 대표적인 향토사학자인 김태능에 의하면 이것이 제주에 감물을 들이는 풍속이 전해진 경로라고 밝히고 있다.

갈옷은 방수성이 얼마나 뛰어난 지 이슬 맺힌 풀밭에서 일을 해도 물방울이 스며들기보다 떨어진다. 그런데 실험에 의하면 향균성은 다른 직물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향상되었지만 방수성은 오로지 면직물에서만 효과가 나타났다. 면직물에서는 자외선이 거의 완벽하게 차단되었고, 세탁 후에도 그 효과가 유지되었다. 따라서 면직물에 천연염색을 한 갈옷은 방부성,방수성,자외선 차단효과가 매우 뛰어나고 때도 안타고 통풍도 잘되고 땀에 젖어도 냄새도 나지 않는 완벽에 가까운 옷이 되는 것이다.

이토록 가장 완벽에 가까운 노동복이자 실용복으로서 갈옷은 오로지 면직물에 감물을 들일 때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면직물은 제주에선 귀한 옷감이다. 제주는 품질 좋은 목화가 나지 않아서 처음엔 이불솜을 만들었을 뿐 옷감을 짜진 못했다고 한다. 아마 그것이 조선 중기에 제주에 온 외지인들이 남긴 문헌에 갈옷이 등장하지 않은 이유라고 여겨진다. 당시 제주의 상류층은 조선의 백의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고 서민층은 칡베로 짜여 진 옷을 입었을 것이다.

제주에서 면직물은 ‘미녕’이라고 불리며 매우 성기게 짠 미녕옷에 감물을 들여 입은 갈옷이 노동복으로 정착한 것은 목화재배가 한림과 대정 등에서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보편화 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 이전에는 아주 드물게 갈옷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갈치술처럼 낚시줄의 염색법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옷감이 귀한 제주에서 내구성이 강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갈옷은 면직물이 보급되면서 비로소 제주 사람들의 대표적인 노동복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갈치를 낚는 낚시 줄인 갈치술을 만들때도 감즙을 이용했다.‘갈치를 낚는 도중에 줄이 서로 엉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풋감즙으로 물들인 후 20여일 정도 썩힌 돼지나 소의 피를 바르고 나서 말린 다음 다시 그 줄을 쏱에 넣어 떡을 찌듯이 쪄낸 후 건조시켜야 완전한 갈치술이 된다. 이렇게 만든 줄은 20여년 동안 쓸 수 있는데 1년에 한 번씩 풋감즙 또는 돼지나 소의 피를 칠하여 건조시켜서 쓴다-고광민’  (사진=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갈치를 낚는 낚시 줄인 갈치술을 만들때도 감즙을 이용했다. ‘갈치를 낚는 도중에 줄이 서로 엉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풋감즙으로 물들인 후 20여일 정도 썩힌 돼지나 소의 피를 바르고 나서 말린 다음 다시 그 줄을 쏱에 넣어 떡을 찌듯이 쪄낸 후 건조시켜야 완전한 갈치술이 된다. 이렇게 만든 줄은 20여년 동안 쓸 수 있는데 1년에 한 번씩 풋감즙 또는 돼지나 소의 피를 칠하여 건조시켜서 쓴다 <서민생활사 연구자 고광민>’ (사진=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이토록 우수한 갈옷을 만드는 데는 단감류가 아니라 떫어서 먹을 수 없고 단단하고 작은 토종감이라야 한다. 떫은 토종감은 단감에 비해 분자량이 큰 탄닌이 많은데 이것이 섬유와 결합하면 섬유를 뻣뻣하게 하면서 갈옷의 장점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또한 토종감도 제주의 토종감이 일본의 토종감에 비해 훨씬 우수한 갈옷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야말로 갈옷은 습하고 햇빛이 강한 제주에 가장 알맞은 옷이고 재료 또한 제주에서 나오는 토종감이 최고란 것이다.

갈옷은 상의를 갈적삼, 하의를 갈중이라고 한다. (사진=제주 민속자연사 박물관)
갈옷은 상의를 갈적삼, 하의를 갈중이라고 한다. (사진=제주 민속자연사 박물관)

최근에는 감즙염색을 이용한 다양한 제품들이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감즙염색이 천연염색으로서 가진 장점에 주목하는 연구도 많이 나오고 있다. 2022년에는 '제주 갈옷' 이 문화재청 무형문화유산 발굴·육성 사업 대상에 선정됨으로써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고 볼 수 있다.

 

고진숙

고진숙 작가

고진숙 작가는 용눈이오름 아래에서 태어나 제주 밖에서 바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일 년의 절반을 제주에서 보내는 반서(울)반제(주)인이다. 역사동화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시작으로 최근 '청소년을 위한 제주 4.3'까지 다양한 역사콘텐츠들을 쓴 고 작가. 올해부터 매월 세번째 월요일에 독자들과 만나는 [제주옛썰]은 고진숙 역사작가의 눈으로 제주가치를 재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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