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김동현)
(정리=김동현)

이승만과 박정희의 시대, 1950~60년대의 제주 개발의 키워드는 ‘재건’이었다.

김동현 박사(제주민예총 이사장)는 전후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진 60년대를 미국이 동북아 안보 논리에 기초를 둔 반공 거점 ‘남한’을 만들기 위한 원조를 통해 이뤄진 ‘국토 재건’의 시대로 바라봤다. ‘4.3 절멸’ 이후 제주 역시 같은 맥락 위에 서 있다.

김 박사는 “1950년대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원조 경제 시대이다. 전쟁 이후에 미국의 대남한 정책은 동북아 안보 위해 우선 경제 안정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남한을 방문 기지로써, 군사 기지로서 남한이 존립해야만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에 경제 원조를 한다. 45년부터 61년까지 미국 경제 원조 총액이 31억 달러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를 따져봤을 때 상당한 규모로, 50년대 미국 원조가 없었다고 한다면 이승만 정부가 아무리 경제 개발 또 국토 재건을 외친다 하더라도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것. 미국 원조 경제라는 영향력 하에 50년대가 놓여 있었고, 그 후 여러 가지 협정들을 맺는다.

4.3이 진행 중이던 1948년 12월, 한미 경제원조협정(ECA)을 체결한다. 원조물자 사용 계획과 경제부흥계획을 수립한다. 이어 1952년 5월에는 대한민국정부와 통합사령부 간에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마이어 협정)을 체결한다.

“원조 협정의 주요 골자는 원조 물자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인가라는 부분들, 그리고 반드시 미국과 협의하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경제 개발보다는 부흥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그래서 경제 부흥 계획을 수립하는데 미국과 반드시 협조 또는 협의를 거치라고 돼 있다.”

한창 전쟁 중인 1952년 5월 24일에 대한민국 정부와 통합 사령부 간에 체결된 경제 조정에 관한 협정이 또 맺어진다.

김 박사는 "전쟁 중에도 이렇게 계속해서 미국과의 경제 협정이 맺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50년대에 미국이라는 존재를 빼놓고는 우리나라 경제를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미국식 경제 원조와 관련된 이승만 정부의 반응이 굉장히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후 1958년, 부흥부의 산업개발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경제개발 계획이 수립된다. 김 박사는 이승만의 경제개발 계획과 관련해 “1공화국의 경제개발 계획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과 전혀 다르다."며 "특히 바로 직후에 있었던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과도 질적으로 좀 다르다. 철저히 미국의 요구에 의해서 경제 개발 계획이 수립되는데 이때 이승만이 실제로 국내에서 어떤 말을 발언을 하냐면 스탈린식 사고 방식이라고 엄청나게 비난한다.”고 말했다.

이승만이 미국식 경제 원조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한 데 대해, 김 박사는 “학자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당시 자유당과 기업과의 국가 관련 지배 연합 세력들이 미국 경제의 원조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영향력에 대한 위협을 받을 것이라 판단을 했다는 것”이라며 "1950년대, 한국이 미국 경제 원조 정책의 최대 수혜국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한국의 50년대는 미국의 영향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봤다.

제주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김 박사는 1949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우렁찬 재건의 고동 제주반도 완전 소탕>)을 소개하며 “4.3 진상조사 보고서에서 보면 1947년 3월 1일 3.1절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무장 봉기, 1954년 한라산 금족령 이렇게 얘기한다.”고 말했다. 

4.3의 광풍이 제주도를 감싸돌던 1949년 5월, 이승만은 제주도를 방문하고 낙토 재건을 주창한다. 김 박사는 "49년 5월 이후에 제주에서 가장 대표적인 슬로건 하나를 뽑으라 그러면 바로 재건”이라고 강조했다.

작년 4.3 사건 이래 일년여에 걸친 폭동도 이제 완전히 진압되고 남해의 고도 제주에는 가을바람과 함께 오곡이 무르익어 평화로웠던 옛 모습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장차관(내무무)을 맞이하여 이곳에서는 관민 좌담회가 개최되었는데 도민들은 중앙으로부터의 원조 부족에서 오는 재건사업의 부진을 지적하는 동시에 귀순자에 대한 확고한 대책과 따뜻한 포옹의 결여, 지도층 관공리들의 도민을 위한 자기희생적 노력의 결핍 등이 제주 재건의 앞길에 장해를 이르고 있다고 말하였다. 제주도에는 현재 35 재건 부락이 분산되고 있는 6, 7천명의 귀순자가 10만을 넘는 폭동 이재민들은 당국의 따뜻한 지도와 원호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9.8.30.>

김 박사는 “1949년 8월, 초토화 작전이 끝나고 난 직후에 바로 재건한다는 것. 이승만 정부와 군으로부터 지역에 강요되기 시작했다라고 하는 볼 수 있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마을이 바로 봉개동”이라고 말했다.
 
봉개 마을은 49년 7월, 4.3 이후에 처음으로 재건되기 시작한 마을이다. 이 재건 마을의 이름은 ‘함명리’로 바뀌었다. 2연대 연대장의 이름이 함병선, 작전과장은 김명인데 그들의 이름을 따서 함명리라고 붙인 것.

김 박사는 “저는 이게 당시 50년, 49년 그러니까 결국은 4.3 초토화 작전이 끝나고 난 직후에 재건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였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며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되돌아가서 옛날 마을들을 다시 만들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게 진정한 의미의 재건이다. 근데 이때 재건은 그런 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은 제주 마을이 갖고 있는, 말하자면 ‘장소성’들을 지워가는 그래서 새로운 이름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가 결국 권력의 위치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리=김동현)
(정리=김동현)

김 박사는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와 무능, 의지와 역량 이런 것들이 굉장히 부족했고 사실상 이 재건이라고 하는 것이 성공적으로 추진됐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재건이라고 하는 슬로건이 구호로 주창되지만 그 구호에 걸맞은 성과를 가져왔는지는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1961년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직후 재건 국민운동본부를 만든다. 김 박사는 “이때 다시 한 번 재건이라고 하는 것들이 벌어지는데 박정희라는 사람이 1939년 일본 제국주의의 국가총동원령이라고 하는 이 식민지 지배 전략을 얼마나 철저하게 학습하고 그것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사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며 “일본의 국가 총동원령이 각 마을 단위 호 단위별로 전부 국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제도였다. 쿠데타 바로 직후에 국가 재건 최고회의 산하에 재건 국민운동 본부라고 하는 게 생긴다.”고 설명했다.
 
재건 국민운동보부는 1963년 12월 16일 종료된다. 이에 대해 김 박사는 “1963년 12월 16일이라는 날짜가 함의하는 바가 크다. 1963년 10월에 박정희가 국가재건 최고회의가 국민운동 재건 본부를 만드는 이유는 굉장히 복잡한 당시의 정치 상황이 있는데 이걸 단순하게 쿠데타 세력의 일방적인 강요와 동원이라고 보기는 상당히 어렵다.”고 봤다. 당대 지식인들의 결탁이 있었다는 것.

(정리=김동현)
(정리=김동현)

김 박사는 “자꾸 조선일보가 쿠데타를 합리화하고, 당시 61년 쿠테타 직후에 당시 매체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의 글들을 쫙 읽게 해서, '봐라, 장면 정부의 무능과 부패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쿠데타 세력들이 결국은 그 구악을 일소하겠다는 것에 대해서 민중들이 얼마나 박수를 쳤냐'고 항변한다. 아직 국가 재벌 국민운동본부의 한 축이 쿠테타 세력이었다고 한다면 또 다른 한 축은 유진오, 유달령, 이광기 그러니까 굉장히 당시에 지식인 엘리트 그룹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지식인 그룹들은 1950년대 미국식 근대화라고 하는 것에 굉장히 많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미국식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역설적으로 미국식 근대화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게 된다.” 그런 계기로 그들이 국가, 전통, 민족 이런 것들을 강조하면서 재건국민운동본부에 대거 합류했다는 것이다. 쿠데타 세력의 국가 개조론과 당시 지식인 엘리트들의 ’국민 계몽주의‘와 맞아 떨어지며 공통의 목표를 향해 ‘위험한 동거’를 하게 된다.

김 박사는 대표적인 인물로 유진오와 이관구를 내세웠다. 유진오는 헌법학자이다. 해방 이후에 재헌 헌법의 기초를 닦은 엘리트다. 이광구는 일본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해방 이후 경향신문 부회장, 편집인협회 초대회장 등을 지낸 언론인 겸 경제학자다. 

김 박사는 박정희의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이승만식 재건 운동과 다른 점으로 강력한 조직망을 꼽았다. 이승만이 하부 단위까지 조직력을 갖지는 못한데 반해 박정희의 재건국민운동본부는 강력한 조직망을 갖췄다는 것. 

“박정희 시대에 민간인을 동원하기 위한 국가 단위의 동원의 계획들은 결국 80년대 90년대까지도 이어진다. 소위 말하면 요즘 관변 단체를 생각하면 될 텐데 80년대에 툭 하면 그게 이루어졌다. 관제 데모들도 이어지고 그랬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각 시도지사를 본부장으로 하고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을 차장으로 임명하며 마을 단위 그리고, 리 단위까지 들어가는 치밀하게 구성된 조직이었다. 이에 대해 김 박사는 “이걸 제주에서 볼 수 있다. 당시 60년대 신문을 보면 계속 이런 얘기가 나온다. 국민운동 그리고 개발 사업이라고 하는 단어들을 당시 신문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 뭐라고 돼 있냐면 ‘여러분 국민운동을 항구화해야 됩니다’라고 돼 있다.”고 말했다.

(정리=김동현)

재건 운동과 더불어 본격적인 관광 개발 환경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김 박사는 60년대 자유항 설정 구상을 하던 시기를 최초의 제주도 개발기로 봤다. 그는 “60년대 이 개발 계획을 보다 보면, 우리가 국제 자유 도시라고 하는 것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의 기원이 드러난다. 국제자유도시특별법 조문 이항의 국제 자유 도시가 뭐냐 그러면 사람 상품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그리고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규제 완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면서 당시 자유항 개발 계획과 관광 자유화 계획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 박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 개발과 관련된 수많은 문제들이 결국 64년부터 시작된 제주도 개발 계획에 일정 부분 들어있다는 사실들을 보면 지금 60년이 지났지만 이때의 여러 문제들이 결국은 6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해결되기는커녕 차곡차곡 쌓여왔던 것이 제주 개발의 역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결국 중앙의 의지와 입맛에 따라 지방-제주의 개발이 추진되어 왔고, 현재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 제주도의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역시 국토교통부 산하다.

김동현 박사(사진=고만자 제주투데이 사무국장)
김동현 박사(사진=고만자 제주투데이 사무국장)

중앙정부의 의도에 따라 추진되는 제주 개발의 문제점을 거론한 김 박사는 한국 정당 구조의 폐혜를 꺼내들었다. 김 박사는 “많은 사람들이 지역 정당이 필요하다면서 지역 정당 운동을 꽤 오랫동안 오래전부터 해 왔다. 근데 여전히 우리나라 정당법에 중앙당은 무조건 서울에 둬야 되고 5개 시도에 무조건 지역당이 있어야 되고, 당원은 몇천 명 이상 이렇게 규정이 돼 있다. 그러니까 지역당이 안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시군 의원은 도의원 눈치 보고 도의원은 국회의원 눈치 보고 이렇게 정치가 이렇게 서열화되니까 지역에서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가 없다는 문제점들을 많이 얘기하고 지역 정당이 필요하다, 지역 정당 운동을 해야 된다. 이 양당 체제를 부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밖에 없다는 말씀들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연방제 수준의 1국가 2체제를 꺼내 든 바 있는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를 거론했다. 그는 지난 2014년 제주도지사 후보로 출마하며 1국가 2체제 실현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볼 때는 매우 급진적인 공약이다. 한편, 신 전 지사는 2016년 박근혜 탄핵반대 집회에서 자신의 성과로 일컬어지는 삼다수를 박정희가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삼다수를 만드는 제주개발공사는 1994년 설립인가를 받고, 1996년 12월 공장을 착공해 지금에 이른다)

그는 신 전 지사의 행보에 대해 당대를 살았던 제주의 지식인의 엘리트들이 갖고 있는 시대적인 한계라고 평가하며 “다만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그 시대적 한계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