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식 틀밭이 나를 농민이 되게 하였다. 거기 더해 틀밭에 걸터앉아 작업하는 나이 많은 농부의 사진은 ‘이거다’ 확신이 들게 했다. 지금은 틀밭 농사를 짓고 있지는 않지만 자연재배 농민으로 지내온 몇 년 동안 두둑(밭 고랑)을 어찌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끝없이 고민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보고 있다.
처음에는 파종하기만을 반복하다 보니 파종한 곳에 또 파종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풀 관리를 잘하지 못하는 관계로 조그맣게 심고 또 심고를 반복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줄을 치고 파종한 곳과 파종하지 않은 곳을 구분할 줄 알았고, 풀이 무성하여 손을 대지 못하는 곳과 관리를 잘하여 작물이 예쁘게 자라는 곳을 구분하게 되었다.
줄을 쳐 놓고 두둑을 구분하였다. 줄을 쳐 놓은 안쪽으로 작물을 파종하고 풀을 베어 덮어 주었다. 작물이 싹을 틔우고 베어 덮어 주었던 풀이 퇴비가 되면서 소동물들이 생기는지 날 짐승들이 헤집어 놓곤 했다. 작물 줄기 중심에 두텁게 덮여있는 풀덮개를 다음날 가보면 꿩이 다 헤집어 놓곤 했었다. 헤집어진 풀들이 두둑 밖으로 마구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잠깐 ‘두둑쪽이 더 낮아야하나?’ 생각도 했었다.
그 사이 농장 위치가 바뀌었다. 제주도 서쪽마을에서 농사를 시작한 난 제대로 농민이 되기로 하고 제주도 동쪽 마을로 터를 옮겼다. 좁은 제주도이지만 땅도 다르고 기후도 많이 다름을 느낀다. 비가 와도 딱딱하게 굳지는 않아서 호미 하나로 경작하는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비가 많아서 풀이 금방 무성해지는 것도 어찌 보면 좋았다. 감당 가능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비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폭우의 횟수는 동쪽이라 빈번하고 기후위기의 징조로 더 빈번해 진듯하다. 한 번에 쏟아지는 물이 양이 엄청나니 아무리 풀을 키워 공생하는 자연재배라 해도 물이 고이고 빠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작년 나에게는 무경운 무투입 자연재배 5년차 밭이 있었다. 시험재배를 마친 양파를 조금 넉넉히 심고 자라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두 구역의 양파 자람새가 영 달랐다. 한참을 보아도 이유를 알지 못하다가 두둑이 원인임을 알게 되었다. 두둑을 만들고 고랑을 조금 파 준 곳의 양파는 물고임 피해를 보지 않았고, 평이랑인 곳은 양파가 잘 자라지 못하였다.
봄이 되고 폭풍성장 하여야 할 양파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오히려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풀멀칭을 충분히 해 주고 적당한 시기에 풀관리도 해 주었으나 두둑이 만들어진 곳은 실하게 자라고 평이랑에선 물이 빠지는 시간 동안 피해를 주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모든 무경운 밭에는 두둑을 조금 높게 만들어 작물을 심거나 파종하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올해의 양파는 작년의 양파보다 더 실하다. 무경운 무투입으로 밭이 살아나고 흙이 포실포실해지니 작업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풀도 안정적으로 잘 자라주어 우악스럽지 않다. 다만 넝쿨작물을 재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두둑의 폭이 1미터 조금 넘는 정도라 넝쿨작물을 심으면 두둑 2개를 넘나들어야 해서 고민 중이다. ‘두둑을 아예 넓게 만들어야 하나?’ 양파를 수확한 자리에 참외 모종을 심으면서 두둑 가장자리에 심었다. 올해 참외 농사를 지어보고 다시 고민해 봐야겠다. 지금까지는 두둑을 한 번 만들어 작물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보수하면서 쓰는 것이다.
장마철답다. 모든 물건에 곰팡이가 생겼다. 폭우가 내리지는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오늘은 안개가 잔뜩이다. 지난밤에는 덥고 습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여 한참을 뒤척였는데….
전업농이 된 지 4년 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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