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 새벽녘 산속으로 향해갔습니다. 성판악에 도착하니 6시 40분쯤 되었습니다. 이미, 주차장에는 많은 대형버스가 세워져 있었으며 주차 초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등산객들로 붐비는 매표소 앞에서 스패츠, 아이젠을 착용하고 등산준비 완료를 마친 후 설국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뽀드득뽀드득 밟는 긴 행렬의 소리에 어둠의 자락은 조금씩 산산이 흩어지며 구름에 가린 엷은 빛이 겨울나무들을 일제히 깨우는 아침, 상쾌한 공기가 가슴속 끝까지 스며드는 맑은 새벽 공기, 이 얼마 만에 맡아보는 새벽 공기인가. 아, 상큼한 나무숲의 맑은 고요 속에서 느껴오는 새벽 향기 속으로 젖어들며 겨울산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음도 눈도 맑아지는 겨울 등산로에는 앞도 끝도 보이지 않는 긴 행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온통 새하얀 나라 백설의 길 따라 오르면 오를수록 雪國성처럼 높이 쌓인 눈 벽 속에 숲은 마법에 걸린 숲 마냥 고요한 침묵만이 흐릅니다. 나뭇가지 흔들림 없는 고요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수많은 등산객의 밟는 발걸음 소리 뽀드득뽀드득 거리는 발걸음 소리만이 숲 속을 가득 채우는 긴 행렬, 오로지 정상을 가기 위해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걷는 발걸음, 인생도 그런 것입니다. 인생의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오로지 묵묵히 쉬지 않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라약수터 마저 숨어버린 겨울 산, 온통 새하얀 눈으로 쌓인 성판악 등산로는 단조로움이 있지만, 경사가 완만해서 그다지 힘든 코스는 아닙니다. 단지, 9.6km 되는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힘들 뿐입니다.

어느새 걷다 보니 겨울 하늘이 환히 보이는 진달래 밭 휴게소에 도착했습니다. 수많은 등산객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휴식을 취하거나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한쪽에 앉아 간단한 식사와 커피를 마시고 휴식을 취한 다음 이제 남은 저 능선을 오르면 우리도 정상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정상을 향해 가는 기쁨, 백록담이여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새하얀 눈 속에 파아란 이파리들이 손짓하는 구상나무숲은 깊은 고요 속에 빠져버린 설국입니다. 깊은 고요 속에 사알짝 바람이 스치며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눈 덩어리, 바람의 흔적이 소리가 가끔 들려옵니다.

새하얀 눈 속에 파묻혀 버리고 싶습니다. 어느 누구의 흔적도 없는 새하얀 눈 위로 쓰러져 눕습니다. 오늘만큼은 유년의 시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냥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눈 위로 눕습니다. 까르륵 까르륵···, 이 얼마나 행복의 순간인가요. 오늘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기회 있을 때 포착하는 것입니다. 마음껏 눈길을 걸어보고 마음껏 즐거워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잠시 무거운 짐이 있으면 훌훌 벗어버리고 눈 위로 뒹굴며 하늘을 향해 웃어보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고비가 남아 있습니다. 계단만 오르면 우리는 정상에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곤. 야호! 야호! 외치는 것입니다. 정상을 향해 가는 계단에서부터는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힘들게 오릅니다. 희뿌연 안개가 자욱한 마법의 성처럼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한 운문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세찬 칼바람 소리와 정상에서 외치는 환호성!

아, 우리도 정상에 섰습니다. 흐린 날씨 탓으로 백록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결국 우리도 정상에 섰습니다. 정상에서 서니 12시, 꽁꽁 얼어버린 마법의 성에는 사랑의 입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호! 야호! 즐거운 환호성이 마법에 걸려버린 백록담을 깨워 줄 것입니다. 수많은 등산객의 뜨거운 사랑 속에 백록담은 맑고 신비로운 파란 하늘빛을 가득 담아낼 것입니다. 그날이 오는 날 다시 정상을 향해 갈 것입니다.

슬슬 하산 준비를 했습니다. 하산하는 길은 미끄럽고 위험을 따릅니다. 조심조심 한 계단 한 계단 내리면서 지나왔던 흔적들을 돌아보면서 가는 것입니다.

인생도 그러합니다. 정상을 서게 될 때까지는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이 오로지 정상을 향해 가지만, 하산하는 인생에서는 여유를 가지고 걸어왔던 지난날의 흔적을 되새겨 보며 앞으로의 남은 인생을 즐겁고 알차게 다시 계획을 세웁니다.
새하얀 솜털 같은 함박눈이 날립니다. 참으로 즐거운 산행입니다. 깡충깡충 뛰다가 미끄럼도 타고 아늑한 자연의 이글로 속에서 잠시 따끈한 차도 마시는 여유와 즐거움을 가졌습니다.

하산하는 길에 겨울 사라악을 보고 싶은 충동에 사라악을 향해 다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 아름다운 호수였던 사라악은 온통 새하얀 눈밭으로 변했습니다. 새하얀 눈밭에서 뒹굴고 까르륵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넓은 경기장 같은 원형의 굼부리 안에 누우니 빙 둘러싸인 나무들의 원형을 그리며 내 주의를 빙글빙글 돌면서 겨울 산속에 나를 가둬 놓습니다. 눈밭에 한참 누워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취해보는 이 느낌은 춥다기보다는 즐거움이 앞서고 정신이 맑아지는 상쾌한 느낌은 무엇이라 표현하기 힘듭니다.

세상은 온통 나와 새하얀 겨울 뿐인 것입니다. 겨울 산속에 묻혀 버려도 좋을 듯합니다.

이 즐거움은 오늘이 아니면 맛보기 힘들 것입니다. 언제 다시 겨울 사라악을 볼 수 있을까요? 이처럼 눈이 쌓인 겨울 산행은 행복의 순간입니다.

아름다운 사라악이여! 잘 있거라.  맑고 고운 하늘빛을 가득 담아낼 즈음이면 맑고 고운 샘물 소리를 따라 너를 찾아오마! 즐거운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걸어서 그런지 다리는 아려오고 힘들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만큼 다리는 아려오며 피로는 겹쳐왔습니다. 흐린 날씨 탓인지 숲은 금세 엷은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참나무향기가 솔솔 풍겨왔습니다. 향긋한 참나무향기에 피로에 지친 다리를 가끔 풀어주면서 눈 위에 덥석 누워 피로를 풀고 다시 걷고 다시 걸었습니다.  뽀드득뽀드득 새하얀 눈길을 밟는 소리 아직도 아련히 들려옵니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