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표류기는 '동인도회사의 동방무역개발 정책의 일환으로 당시 이익 우선주의를 그대로 반영한 업무용 보고서'라는 주장이 나왔다.

네덜란드 라이덴대학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렘코 에릭 브뢰커씨(R. E. Breuker)는 26일 국립제주박물관(관장 김영원)에서 열린 하멜 제주도 표착 350주년 기념 '하멜과 동인도회사의 동방무역'이란 주제의 특별강연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브뢰커씨는 이날 논문 강연을 통해 "하멜은 '동인도회사 직원을 위한 보고서 작성 지침서'에 따라 보고서를 작성했다"며 "이 지침서에는 보고서 작성방법과 각종 자료를 정리하는 방법 등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브뢰커씨는 또 "하멜은 직접 동인도회사 17인 위원회(Heeren XVII; 동인도회사의 최고 결정권을 갖고 있던 위원회)의 명령을 받아 표류기를 작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며 "따라서 하멜표류기가 기행문이 아니라 형식적인 업무용 보고서와 가깝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 하멜은 동인도회사 직원이었고 조선 탈출 직후에도 동인도회사 무역상관인 일본 데지마(出島)로 향했다가 동인도회사의 실제본부인 바타비아(Batavia.현재 인도네시아 수도)에 오래 머물러 있는 등 하멜 표류자체가 동인도회사와 매우 관련이 깊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결국 하멜표류기는 동인도회사 동방무역의 직접적인 결과이며 일행의 표류와 귀국, 표류기 작성, 조선과의 무역 개시 등과는 무관하다"며 "동인도회사의 동방무역이 없었다면 '하멜표류기'도 빨리 잊혀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브뢰커씨는 또  "13년동안 조선에서 생활을 했던 하멜일행은 예외없이 조선의 제도, 풍속, 언어 등을 잘 알고 있었으며 결국 동인도회사는 바타비아에서 씌여진 '하멜표류기'라는 간략한 '코레아 가이드북'을 소유할 수 있었다"며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가 '장삿꾼의 나라'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복잡한 무역전략을 통해 커다란 이익을 남겼다"고 강조했다.

한편 하멜표류기가 기행문이 아니라 업무용 '하멜보고서'라는 지적은 강원대 신동규 교수(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가 지난 1999년 하멜 관련 세미나에서 제시한 바 있다.

신 교수는 "'하멜 표류기'의 저본인 '하멜 보고서'가 당시 조선 정세, 난파 경위, 임금 청구서 내용 등을 담고 있다"며 "흥미본위의 접근으로 인한 부정확한 번역본과 해석의 오류도 많았다"고 지적했었다.

이에앞서 항해와 표류에 대한 역사연구 전문가인 이훈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은 이날 '조선인의 표류와 기록물-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대마도종가문서를 중심으로'라는 논문 강연을 통해 "임진왜란 이후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일본에 표착됐다가 송환된 사례는 1000건을 웃돌며, 조선인의 숫자는 1만여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그는 또 "1만여명의 조선의 표류민 가운데 경사도와 전라도가 출항지 또는 추린지로 기재된 경우가 90%에 달했으며 단일지역으로는 130건의 사고를 기록한 제주가 가장 많았다"고 분석했다.

▲ 렘코 에릭 브뢰커 네덜란드 라이덴대학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동인도회사는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는 17, 18세기에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무역회사로 부상해 1,500여 척의 선박을 경영했으며 네덜란드와 아시아에 100만여 명의 고용인을 갖고 있었다.

1602년부터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기 시작한 동인도회사는 도시 및 요새 건설과 전쟁 수행, 군대 통솔, 관료 임명 등의 막강한 권리까지 행사했고, 일종의 독립 국가적인 성격을 띠고 스페인 및 포르투갈과 경쟁을 벌였다.

동인도회사는 현재 인도네시아 수도인 바타비아를 무역망의 중심지로 해 아시아 30여 국가에 교역소를 설치했고, 이로써 동인도회사의 무역 해로는 부채꼴로 펼쳐져 나갈 수 있었다.

바타비아로부터 인도로, 실론Ceylon으로, 인도네시아 군도로, 중국으로, 일본으로의 무역 관계가 펼쳐지면서 네덜란드에 있었던 17인 위원회의 정책은 구체적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

네덜란드가 '장삿꾼의 나라'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동인도회사는 복잡한 무역 전략을 통해 커다란 이익을 거두기에 성공한 것이다.

나아가 동인도회사는 포르투갈을 비롯한 모든 경쟁자를 맹렬한 폭력으로 축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협박, 폭행, 증회, 무역 약정 또는 외교적인 수완을 통해 막대한 무역망을 설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17세기 동인도회사 전체 무역 분량의 약 60%는 정향, 육계피, 육두구(肉豆), 유두부의 껍질을 말린 향미료와 향신료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18세기를 들어서면서부터는 인도 나염 직물, 중국의 차, 자바Java의 커피와 설탕이 차츰 전체 무역량의 상당한 부분을 점유하게 되었다.

이익 창출이 많았던 아시아 무역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상업 문화를 아시아에 소개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대로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를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에 널리 보급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ㅇ참조=국립제주박물관(http://jeju.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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