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는 어느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문화적 비평의 범주를 벗어난 ‘사건’이다. 문화상품이(그것이 문학, 영화가 됐든) 문화적 가치 판단의 범주 안에서 숨쉬고 있을 때에는 그것의 예술성에 대한 검토가 가능하다. 영화의 흥행 여부를 떠나 이 영화처럼 모든 매체가 거의 동일한 목소리로 영화의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는 현실 앞에서 영화는 스크린 위에서 숨쉬는 ‘문화상품’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문화적 ‘현상’이자 우리 사회의 모습을 암시하는 ‘징후’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남한 인구 4명 중 한 명이 보았다는 ‘실미도’ 이후 등장한 이 영화는 우리 영화계의 한국적 모순인 분단 상황에 대한 영화적 관심 또는 영화상업주의적인 선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그 관심의 초점은 형제애/부성애로 대변되는 한국적 가부장제에 있다. 월북한 아버지에 대한 일그러진 증오심을 가진 ‘실미도’의 강인찬과 동생(이진석)을 구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중심에 서는 진태의 모습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희생을 정당화하는 한국적 가부장제를 대변한다. 우리는 이 두 영화가 보여준 지극히 한국적인 가족애에 대해 동일성을 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우리의 부모세대들이 보여준 지극한 희생과 국가 권력의 희생양이 되는 등장인물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단어 대신 ’국가’라는 단어로 쉽게 대치되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한국적 가부장제는 종종 ‘국가적’ 가부장제의 모습을 띠게된다.‘아버지=대통령=국가’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태극기 …’에서 진태가 보여주는 형제애는 이런 의미에서 단순한 형제애가 아니라 부성애의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철저한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한 이 지독한 부성애 앞에서는 어떠한 영화적 비평도 불가능하다. ‘아버지=국가’는 비평과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접근 대신 부성애/가족애를 택한 강제규 감독의 전략은 교묘할 정도로 영리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관람했던 진보진영과 극우보수 진영의 평가는 엇갈린다. 진보주의자는 인민군의 양민 학살 장면에 대해 ‘당시 양민학살은 국군에 의해 더 많이 자행됐다’며 감독이 역사적 진실을 외면했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국방부와 보수 국회의원은 국군의 강제징집 장면이 용공성을 나타냈다며 편치 않은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따라서 ‘태극기 …’는 해방 이후 역사적 진실에 대한 사실적 접근 자체가 용인되지 않고 있는 지금의 우리 영화상업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이며 ‘쉬운’ 접근법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태극기 …’가 보여준 지고지순의 부성애에 눈물을 흘리며 할리우드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스펙터클에 찬사를 보내고 있을 때 한나라당은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통합 특별법’의 국회통과를 반대하겠다고 결의했다. 우리 사회의 ‘보수’를 믿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제 ‘태극기…’는 ‘실미도’가 세운 한국 영화 1000만 관객의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신파적 부성애에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50년 넘게 왜곡된 역사적 진실에 대해 ‘분노’하지 못하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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