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청년문화운동을 조명한다. 유신체제와 5·18 광주항쟁, 두 차례의 군사정권, 학원안정법, 1987년 6월의 시민항쟁 등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 문화 전반에 일기 시작한 새로운 문화운동, 이른 바 청년문화운동은 기존 문화계와 대립·접목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역문화의 구심체로 자리잡고 있다.

청년문화운동에 대한 개념 정리부터 하자. 일단 연령층을 기준으로 하되, '문화적 창조력을 지녔는가'가 관건이 된다. 그렇게 본다면 20대가 주류를 이루겠고 기성 문화권에 포함돼 있지 않을 것을 전제로 30대 초·중반도 청년의 범위에 포함될 것이다.

운동의 방향은 민족주의의 지향, 탈 권위주의, 강한 정치성 지향, 비합리성 거부 등으로 요약된다.

특히 현기영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임명과 이창동 감독의 노무현 정권 초대 문화관광부 장관 취임을 보듯, 최근 문화계는 진보세력이 기득권층을 제치고 주류에 나섬에 따라 문화운동에 대한 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도 이 시대의 흐름이다.

마당극 통해 도민의 끈질긴 삶 조명
황석영씨 제주 방문 이론적 틀 제공

제주지역 청년문화운동은 '지역적인 것에 대한 재인식'과 함께 '제주지역 삶의 공동문제'가 이면에 철저히 흐르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는 1980년 8월 탐라민속문화연구회 극단 '수눌음'(대표 김후배)가 창단되면서 구체화된 양상을 띤다.

83년 외압에 의해 해체의 아픔을 겪을 때까지 '수눌음'은 창립공연인 마당극 '땅풀이'를 비롯해 '항파두리 놀이' '여우와 포도' '돌풀이' '잠녀풀이' '태손땅' 등의 공연을 통해 제주인의 끈질긴 삶의 의지를 표출해냈다. 

특히 82년 12월 공연을 가진 '잠녀풀이'는 서울소재 극단 '연우무대'초청으로 83년 2월 국립극장 실험무대에 올려져 다른 지역 연극인·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게 된다.

'수눌음'창단의 주역으로서는 문무병, 김창후, 김후배, 강남규, 김수열씨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김후배씨는 초창기 극단 대표로서 제주지역에선 처음으로 제주우체국 맞은 편 당시 전시공간 '동인' 지하건물에 개설했다. 당시 김후배씨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등 남다른 열의를 갖고 있었다.

특히 출범에 즈음해 소설가 황석영씨가 이곳을 찾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론적인 틀을 제공함으로써 극단활동의 밑거름이 된다.

이들이 이용했던 문화공간은 수눌음 소극장과 YMCA 소극장 정도였다. 열악한 공연환경과 극단운영에 따른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기간 문화활동의 중앙집중화 현상 속에서 소외돼 온 지역 청년문화인들이 지역문화활동의 주체로서 결의를 다져나갔기 때문이다.   

'대본 검열'이란 절망감을 딛고 주체적인 시각에서 역량 있는 연희무대를 이끌어온 '수눌음'은 83년 공안당국에 외압의 빌미를 준 '태손땅' 공연을 끝으로 해체돼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수눌움'의 정신은 85년 극단 '한올래' '눌', 87년 놀이패 '한라산'으로 계속 이어진다.

또 '수눌음'발기인 가운데 당시 문무병·김창후(4·3연구소)·김수열(제주문화운동협의회 대표) 등은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해직, 인생역정에 또 다른 아픔을 맛봐야 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문화 일꾼들의 '현장'에 대한 인식과, '민중문화'라는 용어가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독재정권에 의해 억압당하고 소외되고 가장 희생의 큰 계층인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을 기본 축으로 광범위한 학생·시민·대중들에까지도 그 대상을 넓히게 된 것도 의미가 크다.

놀이패 '한라산'은 특히,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89년 '4월굿 한라산'을 무대에 올린 것을 시작으로 '백조일손' '헛묘' '꽃놀림' '서청별곡' '사팔생오칠졸' '사월' '애기 동백꽃의 노래' '살짜기 옵서예' '상생굿' '목마른 신들' 등의 작품을 통해 4·3을 대중화시키고 제주도민을 하나로 응집시켜 나가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이 가운데  '목마른 신'(김수열 연출, 장윤식 각색)은 소설가 현기영씨의 단편을 무대화 한 것으로 95년 제8회 전국민족극한마당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다.    

연극이 좋아서 놀이패를 만든 이들은 이제 대부분 40대 초·중반의 배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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