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다분히 근대적 산물이다.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속에서 세워진 단일 국가(사실상 단일 국가라고 말하기도 어렵지만)의 틀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국가’, 혹은 ‘국가주의’는 모든 가치판단에 앞서 존재한다.

그리 먼 과거도 아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오후 여섯시만 되면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어야만 했다. 오른 손을 왼쪽 가슴에 올린 채 경건한 자세로 국기에 대한 맹세를 들으며 국기 하강식을 지켜봐야 했다. 그 순간 ‘국가’라는 존재 앞에서 모든 시간과 사고는 정지했다. 아찔한 자본주의의 속도 경쟁에서 그 순간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국가’의 위엄 앞에 머리 숙여야만 했다. 또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모두 ‘민족중흥의 사명’을 가져야만 했다.(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게 ‘너는 우리 민족의 중흥을 이뤄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는 부모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하지만 국가의 폭력성을 유감 없이 발휘한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를 감행했다. 그것도 아주 자랑스럽게)

이러한 ‘국가’의 틀 안에서 우리의 사고는 경직되고 자유로운 상상력은 점점 고갈되어 갔다.(생각해보라. 머리모양과 옷차림까지 구속했던 제도교육의 무시무시한 폭력을. 감히 단언하건대 다양한 개성을 가진 학생들을 숫자로 대변되는 성적을 앞세워 한 줄로 줄을 세우려는 제도교육은 ‘오야붕’앞에서 무조건적인 복종을 맹세하는 조폭적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몇 년동안 인문학의 화두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획일적 국가주의에 대한 반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적 모색의 한 자리에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타리가 서 있다. 서구철학의 전통인 이성중심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전복을 꿈꾸는 이 두 명의 철학자는 제도의 폭력을 거부하며  ‘천의 고원’을 써냈다. ‘천의 고원’은 근대의 산물인 국가장치와 제도, 자본주의 지배담론으로부터의 자유로운 탈주를 꿈꾼다.

하지만 ‘천의 고원’은 그 난해함으로 악명이 높다. 이진경의 ‘노마디즘’은 ‘천의 고원’에 대한 해설서이자, 그것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해석(변주)이다. 

들뢰즈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개인의 욕망을 ‘국가’라는 이름으로 억압하는 현대사회에서 ‘중앙’과 ‘지방’의 이분법적 구도는 다분히 폭력적이다. 우리가 우리 안의 ‘국가’를 버리지 않은 한 ‘지방’은 영원히 ‘중앙’의 아류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지방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태를. 중앙에 대한 질시와 변방에 대한 모멸감 사이에서 오히려 중앙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숱한 모습들을)

‘변방은 중심을 타격한다’는 명제는 중앙으로 편입되고 싶어하는, 그 터무니없는 ‘국가주의의 원심력’을 벗어날 때만 가능한 것일 터.

어쩌면 진정한 지방의 시대란 단순히 중앙의 제도를 동경하고 그것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들뢰즈/가타리는 지금 우리 앞에 화두처럼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자유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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