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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이야기> 기억의 암살
제주투데이 | 승인 2008.02.29 14:28

재판소의 법정에는 두개의 정의와 진실이 존재한다. 하나는 사실 그대로의 정의와 진실이고 또 하나는 허구의 정의와 진실이다. 즉 만들어진 거짓의 정의와 진실이다.

신성한 법정의 재판에서 때로는 허구의 정의와 진실이 사실로서 선언되고 승소한다. <기억의 암살>은 재판소의 최고심에서 허구의 진실을 사실로  인정한 오심에 대한 반론서이다.

이 책의 정식 제목은 <남경 대학살, 기억의 암살>로서 부제<副題> <아즈마 시로오(東史郞)는 왜 재판에 졌는가>이다.

저자는 우치야마 카오루<內山薰>라는 펜네임으로 베이징<北京>에서 2007년 12월 13일 발행 되었다. 저자는 펜네임을 사용했지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펜네임의 개념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펜네임이기 때문에 가명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자신의 후기에 <나는 더 빠른 시기에 아즈마시로오의 남경재판 기록을 출판하기 위해 대형 출판사와 소규모지만 역사인식에 대해서 정평 있는 출판사 등 몇 군데에 알아 봤지만, 명예훼손재판의 패소 판결이 걸림돌이 돼서 실현 되지 않았다.> 물론 일본 국내에서였다.

즉, 최고심에서 패소한 내용의 반론서를 출판했을 때 출판사는 물론 저자까지 다시 명예훼손으로 고소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출판했고 저자는 가명을 사용했다.

필자는 작년 12월 이 책을 읽었다. 상세한 재판 기록만이 아니고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중국 방문은 물론 남경학살사건 당시를 재현하는 실험까지 두차례 실시했다.

그리고  이 재판이 일어나게 된 배경까지 광범위하게 취재하고 기술한 내용들은 설득력 있고 진한 감동까지 불러 이르켰다.

아즈마 시로오씨는 일제시대 일본군의 병사로서 중일전쟁의 남경공략전에 1937년 참전했다.
당시 25세였던 아즈마씨는 50년 후인 1987년 신문기자의 요청으로 자신의 종군일기를 공표하고 출판하면서 자신의 전쟁범죄를 사죄했다.

그런데 이것이 원인이 돼서 자신이 소속해 있던 분대<分隊>의 상관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기자회견당시 아즈마씨와 모두 3명이 했다. 한 사람은 1973년 12월 13일 남경이 일본군에 함락됐을 때 중국의 패잔병과 젊은 남자들 500명의 포로를 일제 사격으로 처형했다고 증언했다. 다른 한 사람도 숫자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 자리에서 아즈마씨는 <나는 이것을 공표함으로 인해서 비난 받을런지 모른다. 또 목을 자른 장소.일시도 써 있습니다.  중국측에서 알면 어떤 반응이 있을런지 모른다. 오늘 여기에 이르기까지 감출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서두를 꺼내고 50년 전의 일기를 보여주었다.

아즈마가 말하는 <비난>이라는 것은 일본의 국수주의자들로부터 <영령을 모독한다>는 비난이며, <반응>이라는 것은 반대로 중국측으로부터 전쟁범죄 추궁의 움직임을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령 그러한 비난과 반응이 있더라도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싶다는 아즈마의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때에 우편물자루 사건이 공표되었다. 우편물자루 사건은 남경점령 일주일 후인 1937년 12월 21일 일어났다.

남경중심부 관청가에 있는 최고법원앞에서 아즈마가 소속한 제3중대 부대원이 젊은 중국인을 발견했다. 상관<분대장>은 그 청년을 우편물자루에 넣어서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또 자루끈에 수류탄을 묶어서 연못에 던지고 수류탄을 폭팔시켜서 죽였다고 했다.

그해 12월 그는 남경학살 50주년에 남경을 방문하여 전쟁 범죄를 사죄했다.  모든 수모와 비난을 각오하고 남경에서 사죄했던 아즈마에 대해 중국인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당신을 용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는 달랐다.

전쟁에서 전사한 영령들을 모독하고 전우를 배반한 행위라면서 보수세력과 전우회에서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종군일기를 토대로 책을 간행했고 전우회에서는 그를 제명했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많은 사실을 공표한 아즈마자료 속에서 앞에 쓴 우편물자루사건만을 문제시 삼고 실행했던 상관이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아즈마가 기자회견 후 6년이 지난 1993년이었다. 다른 자료들은 복합적인 증거와 증인이 있어서 반론의 여지가 없었지만 우편물자루 사건만은 아즈마 혼자만이 공표한 잔인한 사건이었다.

고소를 머뭇거리는 실행자에게 보수세력의 끈질긴 설득 속에 진행된 고소와 재판은 일중양국에 커다란 반향을 이르켰다.

1996년 일심판결이 내렸다. 당재판소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남경사건을 역사학상 논쟁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우편물자루 사건의 유무에 대해서만 판단한다면서 남경사건 전체에 대해서는 평가를 피했다.

그러면서 원고가 수류탄 폭팔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루에 사람을 넣고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지르고 수류탄을 묶어서 연못으로 던질 수 있을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아즈마일기는 신빙성이 없다면서 원고 승소의 판결을 내렸다.

아즈마 측은 남경에 가서 이 상황을 치밀하게 재현하고 그것을 증거물로 제출했지만 1998년 이심에서 항소를 기각했다.

다시 그들은 남경에 가서 수류탄 폭팔실험을 하고 그 증거 비데오를 제출했지만 2000년 상고 기각으로 아즈마 패소가 확정되었다.

<기억의 암살>은 이 재판 기록은 물론 사회적  배경까지 저자 스스로 일본과 중국까지 몇 차례 드나들면서 쓴 역작이었다.

왜 일본의 보수세력들은 우편물자루 사건에 집착했는가.

이 재판에서 이긴다는 사실은 이 사건만이 아니고 남경학살 그 자체가 허구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였다.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기억)을 타인으로부터 거짓말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자의 첫머리 구절이다.

아즈마 시로오씨는 2006년 93세로 타계했다. 일류미디어의 50대 현역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기억의 암살>이 한국어로 출판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제주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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