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건데 3월 12일 탄핵 이후부터 그리고 선거가 막바지에 이른 지금까지, 칼럼니스트로서의 직무를 유기했다. 탄핵과 선거 열기를 지켜보는 내내 극심한 정신적 공황상태가 나를 엄습했기 때문이다.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사태를 지켜보며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마저 들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가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직무유기라는 점에서 독자여러분께 겸허히 고개 숙이고 싶다.

숱한 정치적 수사가 난무하는 그 말의 성찬 속에서 솔직히 그 수사학의 의미와 배경에 대한 진단을 내리기가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몇 편의 글을 썼다가 그만 두기도 했다.

이제 불과 이틀 밖에 남지 않은 4.15 총선. 더 이상 직무유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과 함께 그동안 심중 깊이 묻어뒀던 분석적 언어의 벼리를 꺼내야 하는 시점이 왔음을 느낀다.

 '거여 견제론' 과 '거야의 부활' . 열린 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똑 같이 서로의 세력이 크다고 말을 하고 있다. 자체 여론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한 판세분석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전장의 선봉장이었던 여당의 선대위원장은 달리던 말에서 내려 칼 대신 침묵의 언어를 우리 앞에 내밀고 있다. 이에 대해 야당은 '정치적 엄살'에 불과하다고 한다.

역대 선거 가운데 유독, 상대의 진용이 더 위협적이라고 서로 말하는 가히 한국 선거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객관적 사실(엄밀한 의미에서 가치중립적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가는 차후의 문제다)은 한 가지다. 이기는 쪽이든 지는 쪽이든 그 승패는 이틀 후면 판가름난다. 누가 '정치적 엄살'을 부렸는지, 누가 상대의 진용을 제대로 읽었는지는 그때가서 판단할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선거는 승자만이 그 가치를 인정받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선거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선거의 과정 역시 그에 못지 않다.

특히 이번처럼 이미 객관적 사실조차 교묘하게 왜곡되는 매스미디어의 과잉과 범람 속에서는 과정의 진실과 결과가 인과론적으로 합치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흔히 조중동이라고 불리는 수구 언론은 야당에 대해 심정적 지지를 던졌다는 미디어 비평마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새삼스러울 것 조차 없다고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다. 맥루한식으로 말하자면 우리 언론은 쿨 미디어가 아니라 핫 미디어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현행 외국의 언론처럼 특정정당이나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한국 언론 상황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 숨어서 교묘하게 심정적 지지를 보내는 것보다 지지와 비판의 이유를 공개적으로 밝혀 독자의 판단을 요구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지금 인터넷을 중심으로는 소히 카더라 통신의 정제되지 않는 정보가 넘쳐나고 있다. 그 중에서는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정보도 있고 상당히 신뢰가  가는 정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차피 판단은 개별적이다.

다만 이 시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의 선택이 차별과 배제가 아닌 차이와 다름의 인정으로 가는 선택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역대 선거에서 상대방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승리를 부르는 '절대 반지'였다. 하지만 이런 선택의 결과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오만과 독선과 멸시와 배제가 한국정치사를 점철해 왔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동안 우리의 선택은 많은 부분, 정치 권력의 오만을 방임해 온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 정치적 권력의 오만함 속에서 무뇌아처럼 통치받길 원했던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 독재정권이 붕괴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민주적 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절대 권력으로부터 통치받기를 원하는 관성적인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야당의 대표를 바라보면서 '엄마 많이 닮았다'고 외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함성을 들으며 지지층의 결집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며 과거 통치권력의 관행에 기대려는 퇴행적 지역주의의 환영을 보았다고 하면 사실 분석의 오류일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헌법 제 1조.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과거 우리는 명목상 민주주의이지만 사실상 준왕정 시대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지 않았다. 쿠테타에 의해, 또는 체육관에서 전체 국민의 한줌도 되지 않는 숫자를 모아 놓고 그들만의 정치적 권력을 독점해 온 것이 사실이다. 

지속된 왜곡은 결국 진실의 눈을 가린다고 했던가. 이처럼 왜곡된 민주주의가 50년 가까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권력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가지게 됐다. 민주주의가 아닌 권력에 의해 통치받기를 자의든 타의든 원했던 시절, 권력은 경외의 대상이자 타도의 대상이었다.

권력에 대한 경외는 곧 신민으로서의 무비판적 충성으로 이어졌고 권력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모든 권력은 불온하다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됐다.

사실 모든 권력은 불온하지 않다. 권력의 불온성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그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수십년 동안 폭압적 권력의 비호 아래서 온갖 수혜를 누렸던 세력이 이제와서 다수당의 위험성을 확산시키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민주주의는 권리와 의무를 맹세하는 장이 아니다. 권력이 국민에게 있음을 매순간 확인하는 장이자, 그 권력의 위임을 누구에게 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과 자유의 공간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동안 우리는 대의민주주의체제 속에서 그 것이 온전한 민주주의라고 믿어왔지만 결국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절대적 통치자를 바라는 무의식적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번 선거는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통치자는 백성들로부터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통치자는 국민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통치자의 신민과 그렇지 않은 백성들을 가르고 줄 세우며 그 절대 권력을 누리는 것이 바로 통치자이다.  국민국가 내에서의 배제와 차별. 그 가장 생생한 증거가 바로 지역주의가 아니던가.

이제 이틀 남은 선거, 우리는 과거 선거에서 배제와 차별의 작동을 묵인하고 방조했던 선택을 넘어서야 할 기로에 서 있다.

'우리가 남이가'식의 편가르기가 아니라, 적과 아군의 이분법이 아닌 '다름'을 용인하되 통치자의 신민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권력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방사되는 그 권력의 민주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민주적 권력의 선택. 그것이야말로 뿌리깊은 차별과 배제의 기제가 작동하는 국민국가의 국민으로서가 아닌 민주적 국가의 시민으로서 우리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일 수 있다.

4.15. 이날은 우리 한국 정치사에 진정한 의미의 민주적 권력의 대리자를 선택했다고 기록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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