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근 평화박물관 대표
지난 18일, 일요일은 비 날씨였다. 그러나 제주문화원 역사탐방 팀은 아침부터 서둘러 두 대의 대형 버스에 나눠 타고 현장으로 갔다.

홍순만 원장과 양중해, 고응삼 시인, 김석윤 건축가들이 일행 속에 섞여 있었다.

이들 일행 100여 명이 처음 찾은 곳은 일본 군인들이 2차 대전 말기에 파놓은 지하갱도가 있는 한경면 청수리 가마오름 평화박물관.

먼저 영상관으로 안내되어 전쟁 말기 일본 군인들이 파놓은 굴의 현황과 평화박물관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기자는 이 자리에서 평화박물관의 대표인 이영근씨(李英根: 52세)를 만났다. 그는 잠바 차림에 수수한 시골 중년이었다.

홍순만 원장의 안내에 따르면 일제가 제주에 요새를 구축하기 위하여 공병대를 보낸 것은 1944년 11월이었다. 그리고 전문 기술자들에 의해서 굴 파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에는 제17방면군 사령부가 제주로 이동해 온다.

이해 3월 유황도가 함락될 무렵 제주를 요새로 사수하는 <결7호 작전>이 하달된다.(이 작전에 대해서는 이미 SBS가 ‘그것이 알고 싶다-1945년의 제주도’에서 파헤친 바가 있다.) 이 무렵에 제58군사령부가 제주에 설치된다.

이 부대는 제주농고 자리에 있다가 어승생악으로 옮겨서 제주를 장악한다. 96사단도 와서 삼양악 일대에 포진한다. 111사단은 안덕면 동광리 당오름에 주둔하고, 혼성 108여단과, 121사단도 제주로 들어온다.

해방이 되었을 때 제주에 남아있던 일본군은 무려 74,000명. 당시 제주 인구 25만에 비교할 때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가마오름은 높이 148m, 여기서는 차귀도까지 제주섬 서부와 해안이 한눈에 들어오는 방어의 요지다. 여기 지하갱도에서 50미터쯤 떨어져 이영근씨는 일제시대의 전쟁 유물들로 박물관을 지었다.

전시실 안에는 일본 군인들이 쓰던 철모, 군복, 총, 일본도, 포차 바퀴, 측량기, 곡괭이, 사이렌 등과 창씨개명을 할 무렵의 여러 자료들을 포함 5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씨는 이것들 중 70% 정도는 21세 청년기 직접 굴을 판 경험이 있는 그의 아버지 이성찬 옹(李聖贊: 85세)이 전쟁 후에 보관했던 것이며, 나머지는 충청도에서 수집했노라고 했다. 그는 유물 수집을 위해 전국을 다 돌았다고 했다.

이곳의 지하갱도 진지는 송악산처럼 사방팔방으로 뚫려 있다. 연대 규모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을 것이라는 판단. 다행히 이 오름은 단단한 송이로 되어 있어 굴이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씨는 그 굴을 한바퀴 돌아올 수 있는 구간을 굴 양쪽과 천장에 판자를 대며 안전하게 보수했다.

갱도 안에는 2단계 회의실이 두 군데나 있으며, 사령관실, 의무실등이 따로 되어있다. 전시실에는 마침 사령관실에 전기를 일으키는 발전기도 있어 그들의 용의주도함을 엿보게 했다.

이제까지 조사된 도내 지하갱도는 제주시 20개소, 서귀포시 8개소, 북제주군 50개소, 남제주군 35개소 등 113군데. 이곳의 갱도는 전체 2,000m 중 800m가 보수되어 볼 수 있다.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이씨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굴을 파던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는데, 이것을 혼자만 듣고 끝내버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쨌든 전쟁보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는 10년 전부터 이 일을 계획해오다가,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했다.
예산이 얼마나 들었느냐는 물음엔 지금까지 30억 정도가 들었는데, 가족들의 도움도 받고, 은행 빚도 얻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중문동 소재 약천사의 혜인 스님으로부터도 1억 원이나 되는 돈을 도움 받았다고 했다.

전시관은 아직 여러 가지 미비점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개인의 힘으로 이런 사업을 추진했다는데, 찬사를 아니 보낼 수는 없다. 그는 박영품 여사와의 사이에 딸 하나와 아들 형제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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