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이라는 흥미롭고도 가슴 떨리는 작업에 대해 공부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에 늘 긴장된다. 하고 싶었던  일이고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작가들을 존경한다.

제주에 정착한지 10년도 훨씬 넘었지만 이 고장 작가의 글은 별로 읽지 못했다. 특히 언어생활이 육지와 사뭇 다르고 어휘 또한 고어들이  많아 세련되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글을 쓰려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대도시의 생활이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겠나 하는 편견에 사로잡힌 나였으니 이 곳 향토작가의 글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이 곳 제주 출신 작가 오성찬님을 알게 되고 그 분의 글을 읽게 된 것은 나의 오만과 편견에 일침을 가하는 뜻밖의 기쁨이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작가의 책 몇 권을 접하면서 무척 흥미로웠다.

특히 그 분의 수상 작품집 『나비로의 환생』에 실린 몇 편의 글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 것은 불운한 예술가 이중섭에 관한 이야기인 「어두운 시대의 초상화」라는 작품이다.

몇 해 전인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서귀포에 이중섭 거리가 조성되고 그가 잠시 머물렀던 집이 새롭게 단장되는 등 이른바 ‘이중섭 붐’이 일자 나는 다소 생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중섭과 서귀포, 잘 연결이 되지 않는 거였다. 막연하게나마 서귀포출입이 잦은 남편에게 들어서 알았는데 “그랬었구나......” 정도였다. 그 후 시댁도 근처라서 서귀포에 가게 되자 그 곳을 찾았다. 한 눈에도 시내 중심가는 아니었다.

둘러 본 즉 그림엽서에서나 본 것 같은 프랑스 파리풍의 가로등과 창호지 바른 찻집이  한 두 군 데 보이는 게 이중섭 거리의 전부였다.

바다로 향한 내리막길에서 본 서귀포 앞바다가 빼어난 풍광을 자아내긴 했지만 살았다는 집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전쟁 통에 얻어 들어간 집이었으니까.

글 「어두운 시대의 초상화」를 읽고 이중섭과 서귀포의 인연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작품은 ‘소’와 담뱃갑 포장지에 그렸다 해서 세간에 관심을 산 ‘은지화’ 정도였다. ‘서귀포의 환상’이라는 작품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척박한 환경과 토양 속에서도 예술가로서의 삶을 잃지 않으려했던 이중섭의 생애가 한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현실에 매달렸을 그의 서귀포 생활이 낡은 흑백필름처럼 떠오르기도 했다. 불행한 시대를 견디다 간 그가 현실과는 거리가 먼 환상이라는 작품을 남겼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 같다.

그 환상이라는 것은 어쩌면 동란을 피해 어쩔 수없이 들어 온 제주의 이미지가 육지와는 다른 역사와 전설로 인해 그에게 예술가적인 상상을 불러 일으켰을 수도 있고, 작중 인물의 생각처럼 그의 작품이 ‘가족’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나머지 오로지 가족과의 아름다운 이상향을 꿈꾸며 그렸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환상은 환상을 남기는 법인가? 나는 다시 서귀포의 그 거리에 가고 싶다.

그가 떠난 지 반세기 가까이 되지만 알지 못해 놓쳤던 그 무엇을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이제 뭔가 조금은 색다른 감회가 생기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나의 이런 관심은 책 속 주인공의 질시에서 시작된 그런 호기심과는 분명 다르다. 이중섭이 천재화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느낀 환상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나도 그 하늘아래서 맛보고 싶은 것이다. 

 문학이란 이래서 좋은 것이다. 몰라서 지나쳤던 것, 알지 못해서 느낄 수 없었던 것을 각성시켜주기도 하고, 또한 탐정과도 같은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과 관심이 삶의 행로를 짚어주고 문화의 지평까지도 넓혀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쉬움도 많다. 원작보관의 어려움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어쨌든 그 흔적은 남겼어야 되지 않을까? 작품 속 이중섭의 행적을 보면서 짐작은 가지만 말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이중섭의 삶을 다소나마 알게 되고 그를 기리는 일을 하는 것이 이작품의 영향이지 않나 싶다.

**이 글은  조용숙씨가 『어두운 시대의 초상화』를 읽고 보내준 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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