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신제주의 한 호텔에서 '13세기 동아시아 역사와 삼별초 문화'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있었다.

이 세미나는 북제주군이 주최했으나 내용적으로는 삼별초가 남하하기 시작한 강화도와 또 용장성을 쌓고 버티었던 진도까지 '삼별군(三別郡)'이 함께 한 세미나였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이렇듯 관계된 세 개 군이 함께 모여 공동의 관심사를 풀어 가는 모습이 우선 보기에 좋았다.

공주대학 교수이며 문화재전문위원인 윤용혁 박사는 주제 발표를 통해 삼별초의 '문화사적, 국제적 관점'을 밝혔다. 그는 "대몽항전의 공간적 현장은 고려였지만, 전체적 상황은 몽고의 세계 정복이라는 큰 맥락 속에서 고려를 침범한 것이며, 이 침략도 고려 자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몽고는 고려를 징검다리로 일본열도에까지 진출할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점에서 삼별초의 대몽 항전은 국내사의 관점이 아닌 동아시아 전체사의 시각에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일본에서는 삼별초 항전이 몽고군이 일본 침입을 저지하는 효과가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심지어 '일본 고교사(詳解 日本史)'에서도 삼별초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고 밝히고, 만일 삼별초 항전이 없이 몽고가 조기에 일본으로 쳐들어갔다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1273년 삼별초가 궤멸하고, 이듬해 몽고연합군 선단이 일본으로 가다가 태풍으로 침몰 당했던 나가사키 현 다카시마의 출토 유물 중에는 당시 선박에서 사용했던 귀가 달린 흑갈색의 도기(葛釉壺)가 다수 인양되고, 큐슈 연안에서는 종종 군선의 닻돌이 인양된다고 했다.

이날 방청했던 일본의 고고학자 도다유지 교수는 항파두리 현장에 남아있는 기와나 다른 유물들도 연대가 확실하기 때문에 그 전후 일본과 중국 등지 유물의 연대를 측정하는데 기준이 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밝혔다.

토론에 나선 김형우 강화역사문화연구소장은 "개경 환도가 결정된 1270년 5월 삼별초는 창고를 부수며 봉기했고, 6월 3일 배 1천 척으로 강화도를 떠났는데, 이 긴박했던 열흘 동안의 상황을 통해서 삼별초 항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고, 그들이 내세운 기치는 무엇이며, 참여자와 규모는 얼마인지 알게 된다"고 밝히고, 여기 따른 인원을 1만여 명으로 추정했다.

김정호 진도문화원장은 용장성과 왕 무덤 등 진도의 삼별초 유적들을 소개하고, 연구기금을 마련하여 국내 역사학계가 공감할 수 있는 사업을 펴나가자고 주장했다. <장보고>처럼 드라마화 하는 작업도 제기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의 김일우 박사는 삼별초와 고려군 양쪽의 눈치를 살피던 당시 제주도민의 입장을 기록을 살피며 밝혔다.

어쨌든 북제주군은 삼별초의 터전인 항파두리에 2008년까지 700억 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성안의 토지를 매입하고, 내 성터와 부속 건물 터, 성문 터 등의 발굴 조사를 벌일 계획이어서 이 치열했던 싸움터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바라기는, 이제까지 다른 유적들에서처럼 복원을 한다면서 더 망쳐놓는 일이 없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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