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는 역사적으로 큰 궤적을 남긴 시기였다. 문화예술 분야에도 정치적·사회적 변혁이란 큰 줄기를 따라 내적이든 외적이든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87년 ‘6월’을 겪으면서 도내 청년문화인들 사이에는 문화운동에 따른 조직창출 요구가 고조됐다. 결국 그동안 일정한 틀 없이 고립분산 내지 이합집산으로 움직였던 각 문화패들이 연대해 ‘제주문화운동협의회’라는 협의체를 결성한다.

“지배적·향락적 퇴폐문화를 극복해내어 건강한 삶의 문화를 회복시켜 나가는 민중예술운동의 본래적 의미를 다하며, 또한 이 땅의 구체적 문제를 문화적 실천을 통해 해결해 내려는 지역문화운동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87년 8월 출범의 닻을 올린 제주문화운동협의회(대표 김수열) 결성 취지문의 한 구절. 당시 참여 문화단체로는 놀이패 ‘한라산’과 노래패 ‘우리노래연구회', 문학패 ‘제주청년문학회’를 들 수 있다.

제주청년문화운동을 총체적으로 담보하기에는 협소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결성 기념행사인 ‘우리문화 한마당’ 개최와 함께 89년 1월부터 주민·학생 대상의 ‘문화교실’을 개설, 운영하는 등 ‘문화의 대중적 실천과 확산’차원에서 역량 있는 활동을 펼쳐온다.

더욱이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획일주의에서 다원주의로, 추종에서 자유로-'를 슬로건으로 내건 ‘우리문화 한마당’은 87년 제1회 행사를 시작으로 매해 꾸준히 개최, 종합문화제 성격의 민중문화잔치로 자리잡아 간다.  

그러나 모든 게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조직운영에 따른 재정적인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라도 초창기 협의회 결성과정에서 다소의 성급함 등으로 인해 급조된 형태를 띠게 됨으로써 활동과정에서 조직적인 한계에 직면한다.

제주문화운동협의회 결성 주역가운데 한 사람인 정공철씨(43)는 “상대적이긴 하지만 놀이패 ‘한라산’의 경우 활동경험에 따른 일정 틀의 조직력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우리노래연구회', ‘제주청년문학회’ 등은 경험부족으로 조직적인 위상 또는 전망을 세우지 못하는 난점을 지니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점들은 문화운동 실천과정에서 하나 둘 극복되기 시작한다. 특히 문화운동 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제주문화예술운동연합 건설준비위원회(노래패 ‘숨비소리', 그림패 ‘보름코지', 영상분과 ‘움직거리', 풍물춤패 ‘새날', 극분과 ‘새길')와 제주지역문학단체협의회(제주청년문학회, 글왓, 풀잎소리, 초승 동인, 서귀포의 트임소리, 제주대의 국문과 시 분과, 신세대, 민초섬) 등의 유관단체와 연대의 틀이 모색됐고, 91년 9월에는 도내 14개 문화운동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제주도개발특별법 저지를 위한 연합공연, ‘새날을 위하여’를 무대에 올려 결집된 힘을 한껏 드러낸다.

제주문화운동협의회의 활동은 결국 94년 2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제주도지회 결성의 밑거름이 된다.

출범 당시 제주민예총은 문학, 미술, 연극, 음악, 사진, 평론, 굿 위원회 등 7개 장르위원회로 구성, 각 장르의 특성을 살리며 지역 문화예술 창달에 힘을 쏟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와 함께 주체적인 지역문화창출을 위해 ‘4·3예술제’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전통문화예술의 발굴과 재창조, 생산적인 민족문화의 창달을 위해 민족예술 문예아카데미, 제주문예기행, 민간주도의 도민예술축제를 개최함으로써 지역문화예술 정책에 대한 대안제시에 역점을 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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