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의료계와 법조계를 중심으로 존엄사와 이른바 '연명(延命) 치료'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다소 위험하더라도 환자가 선택한 치료방식에 따라 수술을 하던 중 해당 환자가 사망했다면 "의사에게 업무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번 판결은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의사의 업무상 과실 여부를 둘러싼 법.의학계 내부의 오랜 논란에 대한 이례적인 유권해석이어서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광주지법 형사5단독 박정수 부장판사는 26일 치료 도중 환자 이모씨(62.여)를 숨지게한 혐의(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된 광주 모 대학병원 정형외과 의사 이모씨(52)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특정 종교 신도인 환자 이씨는 골반과 대퇴골의 피부와 근육을 붙이는 유합 수술을 받은 지 34년만인 지난 2007년 11월 오른쪽 고관절을 인공 고관절도 교체하는 수술을 받기 위해 수소문 끝에 인천 H병원, 서울 K병원, 부산 D병원을 찾았으나, 번번이 거부당했다.

나이가 많은데다 고관절 파괴가 심해 수술 도중 과다출혈이 불보 듯 뻔함에도 이씨가 종교적 신념 등을 이유로 다른 사람의 혈액을 받지 않는 '무수혈 방식'만을 고집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병원측 입장에선 도박과도 같은 수술을 강행할 리 만무했던 것.

상심한 이씨는 같은 해 12월 광주의 한 대학병원을 찾았는데 병원측은 피해자 건강 상태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 결과, "수술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결론을 내렸다. 앞선 몇차례 무수혈 수술에서 성공한 자신감도 한 몫을 했다.

결국 이씨는 그 해 12월20일 오전 11시 수술대에 올랐다. 그러나 수술 과정에서 크고 작은 혈관이 터지면서 출혈이 시작됐고, 혈관외과 전문의의 긴급 봉합수술도 소용이 없었다.

이씨는 수술대에 오른 지 4시간만에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이때까지도 '무수혈'을 원하는 환자측 요구에 따라 수혈은 전혀 이뤄질 수 없었고, 끝내 이씨는 같은 날 밤 9시35분께 과다출혈에 따른 폐부종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후 의사 이씨는 환자의 생명과 신체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기소됐고, 검찰은 "업무상 과실로 사망에 이르게 했다"며 유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의사결정능력이 있는 환자가 의사로부터 직접 '수술 도중에 대량 출혈이 발생할 경우, 타가 수혈(남의 혈액을 공급받는 것)을 하지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의학적 정보를 제공받았음에도 이를 거부한 데다 출혈 후 의사가 타가 수혈을 제외한 모든 가능한 치료방법을 시도한 사실도 인정되는 만큼 의사에게 잘못을 묻기는 힘들다"고 밝혔다.

이어 "환자의 자기결정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생명과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이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과 신체의 기능을 어떻게 유지하고 발달시킬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며 "따라서 의학적 견지에서 생명 보호를 위해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만으로 국가나 의사가 환자에 대해 치료를 강제할 순 없다"고 설명했다.

"환자의 결정을 존중해 타가 수혈을 하지 않은 행위는 형법상 피해자의 승낙에 의한 행위에 해당돼 위법성 조각사유가 된다"는 것이 재판부 판단이다.

이번 판결은 지난 수십년간 논의돼온 환자의 자기결정권 논란에 대한 사실상 첫 법률적 해석이어서 적잖은 법률적, 의학적 파장과 함께 향후 유사소송에 대한 법적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광주지법 김종복 공보판사는 "사안과 결론이 사회적 이목을 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선례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상급심의 판단이 주목된다"고 밝혔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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